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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선 갈홍과의 비밀 밀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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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천마전(天魔殿)의 침전은 얼어붙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바닥에 쏟아진 연하진의 검은 피는 구음절맥(九陰絶脈) 특유의 극음(極陰)의 냉기로 인해 하얗게 성에가 낀 채 대리석 바닥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사혈 동조 침술의 격렬한 반동과 만독즙의 잔여 화독이 체내에서 충돌하며 하진의 의식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였다. 전신이 마비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곁에서, 늙은 시종 아복이 침대 하단의 비밀 장치에 청동 열쇠를 꽂아 돌렸다.


쿠구구구구-


무거운 침대 바닥이 소리 없이 갈라지며 지하로 통하는 어두운 석조 계단, 즉 백초당과 연결된 비밀 통로인 천의각 밀도(天의각 密道)가 그 음습한 아가리를 벌렸다. 독고린은 하진의 마른 신형을 가볍게 안아 들고 소리 없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복은 바닥의 피 흔적을 완벽히 지운 뒤, 밀도의 문을 닫아걸고 천마전의 침묵을 수호했다.


밀도 내부의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를 뚫고 얼마를 달렸을까. 이윽고 도착한 곳은 천마전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 밀실이었다. 촛불 몇 자루만이 간신히 어둠을 밝히는 그곳에, 한 노인이 아복의 은밀한 전령을 받고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백발에 약초 냄새가 진동하는 누더기 옷을 걸친 노인. 까칠한 주름 사이로 예리하게 번뜩이는 안광을 지닌 사내, 바로 마교 최고의 은퇴 의선(醫仙) 갈홍(葛洪)이었다.


“우호법, 이 밤중에 교주를 안고 밀도를 통해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설마 대장로파의 눈을 피해 내게 보일 상처라도 있는…….”


갈홍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독고린이 석상 위에 눕힌 하진의 얼굴에서 은빛 천마 철가면을 조심스럽게 벗겨냈기 때문이었다.


드러난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턱선이 날카롭고 마른 서생의 안색이었다. 입가에는 아직 닦이지 않은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성에처럼 맺혀 있었다. 전임 교주 독고혈과 똑같이 생겼으나, 기운은 완전히 다른 기묘한 존재.


“이, 이자는 누구인가? 교주님이 아니지 않은가!”


갈홍이 경악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독고린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하진의 손목을 가리켰다.


“의선, 질문은 나중에 하시오. 지금 주군의 심맥이 멈추려 하고 있소. 어서 맥을 짚고 살려내야 하오.”


갈홍은 침을 삼키며 다가와 하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을 통해 전해지는 맥동을 느끼는 순간, 천하제일 의선이라 불리던 노인의 안광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맥동은 비정상적으로 약했고, 흐름은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단전 부근에는 내공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경맥을 갉아먹고 있었다. 게다가 그 냉기의 틈새로 만독즙의 치명적인 화독이 날뛰며 오장육부를 부식시키고 있었다.


“구음절맥(九陰絶脈)……! 게다가 단 한 푼의 공력도 없는 완벽한 폐인(廢人)이 아닌가! 이 몸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었단 말인가?”


갈홍의 목소리에 경악을 넘어선 공포가 서렸다. 천하를 공포로 지배하던 천마 독고혈의 껍데기를 쓴 자가, 실제로는 내공 한 조각 없는 시한부 서생에 불과했다는 진실은 갈홍의 평생 의학적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갈홍은 소매 속에서 정교하게 제련된 은침을 꺼내 들었다. 그의 안광에 살기가 어렸다.


“우호법,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마라. 역적 독고용을 피해 이딴 가짜 광대를 내세워 교단을 찬탈하려 한 것인가? 이 사실을 당장 장로회와 교도들에게 공포하고, 교단의 정통성을 바로잡을 것이다!”


갈홍이 은침을 쥔 손을 치켜세우며 하진의 목의 사혈을 겨누었다. 초일류의 의술을 지닌 그의 손끝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무공이 없는 하진을 단숨에 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독고린이 급히 검자루를 잡으며 가로막으려 했으나, 하진이 먼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철가면이 벗겨진 하진의 눈빛은, 육체의 붕괴 속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맑고 고요했다. 그는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 속에서도 후두의 은판을 진동시키지 않고, 자신의 원래 미성(美聲)으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의선 갈홍…… 당신은 평생 백초당(百草堂) 구석에서 약초 냄새를 맡으며,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갈홍의 은침이 하진의 목덜미 한 푼 앞에서 멈췄다. 노인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가짜 놈이.”


“천마비록(天魔秘錄)에 적힌 당신의 기록을 기억하오.”


하진은 머릿속 가상의 서고인 ‘기억의 궁전’을 작동시켜, 갈홍의 과거 행적과 심리 분석 페이지를 실시간으로 인출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밀실의 어둠을 뚫고 갈홍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었다.


“십오 년 전, 전임 교주 독고혈이 반대파 장로들의 가문을 몰살하고 그 어린 자식들까지 독살하려 했을 때…… 당신은 그 독약을 조제해 바쳤소. 의원으로서 살려야 할 생명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 그리고 교주의 잔혹함을 이기지 못해 은퇴를 핑계로 숨어버린 비겁함. 그것이 당신이 평생 백초당의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둔 진짜 이유가 아니오?”


“닥쳐라!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갈홍이 격분하며 은침을 내리찌르려 했다. 하지만 하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의선, 내가 가면을 벗고 이 대역극을 끝내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 같소? 대장로 독고용이 교주 자리를 찬탈하는 즉시, 흑월마교는 정파 무림맹과 전면전을 벌일 것이오. 수만 명의 교도들과 민초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질 것이고, 강호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터요. 당신은 의원으로서, 또다시 수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방관할 셈이오?”


갈홍의 손이 공중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 하진이 제시한 명분과 정세 분석은, 갈홍이 평생 외면하고자 했던 도덕적 양심과 의사로서의 사명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나는 힘이 없소. 단 한 푼의 내공도, 적을 벨 칼날도 없소.”


하진은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내며, 차가운 석상 위에서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철가면을 쓰고, 적들의 공포를 지배하여 정사 대전의 파멸을 막을 것이오. 피를 흘리지 않고 무림의 평화를 지킬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 망가진 육체를 유지해 줄 당신의 의술이 필요하오. 나를 도와, 이 기만의 연극을 완성해 주겠소?”


갈홍은 하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공이 지배하는 이 가혹한 강호에서, 단 한 줌의 힘도 없는 서생이 오직 지혜와 목숨을 건 의기만으로 천하를 구원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대담하고도 고결한 안목에, 노회한 의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평생의 죄책감과 열망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갈홍은 떨리는 손으로 은침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의 안광에서 살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깊은 감복과 경외심이 차올랐.


“천하를 속이는 광대의 연극일지라도…… 기꺼이 동조하겠소.”


갈홍은 마침내 하진의 발치 아래 무릎을 꿇었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천하제일 의선이, 무공 없는 서생을 자신의 진짜 주군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갈홍은 품속 깊은 곳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작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약병의 마개를 열자, 주변의 한기를 단숨에 녹여버릴 듯한 은은한 천년설삼의 향취가 밀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이것은 백초당의 극비 약재들을 배합해 만든 구음단(九陰丹)이오. 주군의 뒤틀린 절맥의 냉기를 일시적으로 얼려 통증을 마비시키고 정상적으로 거동하게 도울 것이오. 하지만…… 복용할 때마다 오장육부가 서서히 부식되는 시한부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하진은 붉은 약병을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기만의 대가는 언제나 자신의 생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약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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