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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의 체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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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전당(長老 殿堂)의 웅장한 석조 기둥들 사이로 차가운 밤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기둥 사방에 걸린 청동 화로에서는 붉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으나, 전당 내부를 채운 기류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드르륵, 드르륵.


고요한 전당의 침묵을 깨뜨리며 정교한 흑단목 거치 휠체어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은빛 천마 철가면을 얼굴에 고정하고 화려한 흑색 비단 장포를 걸친 연하진이 휠체어에 앉은 채 전당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의 왼손에는 은빛 철선 ‘천기선’이 가볍게 쥐여져 있었고, 장포 자락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경맥이 타들어 가는 것 같군.’


하진은 철가면 너머로 거친 숨을 삼켰다. 사흘 전 장로 사패를 포섭하기 위해 감행했던 사혈 동조 침술의 여파가 여전히 그의 심맥을 갉아먹고 있었다. 단전에서는 단 한 푼의 내공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오직 구음절맥의 차가운 한기만이 뼈마디를 시리게 찔러왔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은 극통이 밀려왔으나, 하진은 철가면 뒤에서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힘이 지배하는 이 사수들의 전당에서 단 하나의 약점이라도 노출되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처참한 죽음뿐이었다.


전당 좌우로 늘어선 수십 명의 장로들이 뿜어내는 살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그들의 시선은 하진의 철가면에 집요하게 꽂혀 있었다. 의심과 탐욕,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그 전당의 가장 높은 단상 아래, 대장로 독고용(獨孤龍)이 서 있었다. 백발을 높게 묶고 화려한 장로포를 입은 늙은 마두의 얼굴에는 음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독고용은 하진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안광에는 자신이 훔친 가짜 비급 ‘허무심법’의 위력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이 서려 있었다.


"교주님을 뵙사옵니다."


독고용이 허리를 숙였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주군을 향한 공경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하진을 단숨에 끌어내리겠다는 오만한 기세가 전당을 가득 채웠다.


"본좌가 소집한 비상 장로회다. 대장로가 이토록 다급하게 장로들을 모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진은 목에 밀착된 은판을 진동시켰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천마의 목소리가 전당 천장의 돔 구조를 타고 증폭되어 사방의 벽면을 흔들었다. 소리 반사 성음공 트릭이었다. 그 위압적인 성음에 몇몇 소장파 장로들이 흠칫하며 몸을 웅크렸으나, 독고용은 오히려 비열하게 웃었다.


"교주님, 최근 교단 내부와 강호 전역에 불길한 유언비어가 돌고 있사옵니다. 교주님께서 주화입마에 빠져 모든 무공을 잃으셨으며, 현재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은 껍데기에 불과한 대역이라는 소문이옵니다."


독고용의 말에 전당 내부가 일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장로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살기가 피부를 찌를 듯이 팽팽해졌다.


"소문은 바람과 같아서 막지 않으면 온 교단을 뒤흔드는 법. 이에 본 대장로는 교단 내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교주님의 건재함을 전 교도들 앞에 증명하고자 제안하나이다."


독고용이 하진의 철가면을 정면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탐욕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역대 교주님들의 신성한 상징인 철가면을 벗어 던지시고 진면목을 보여주십시오! 만약 안색이 창백하지 않고 주화입마의 흔적이 없으시다면, 그 누구도 감히 교주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렇습니다! 교주께서 떳떳하시다면 가면을 벗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독고용의 뒤에 서 있던 행동대장 장로 마불(馬佛)이 거구의 몸을 일으키며 거칠게 동조했다. 반란파 장로들이 일제히 무기를 바닥에 찧으며 압박을 가해왔다. 쿵, 쿵, 쿵 하는 묵직한 진동이 하진의 휠체어까지 전해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진의 안색은 구음절맥과 내상으로 인해 시체처럼 창백했고, 얼굴에는 전임 천마 독고혈의 상징인 깊은 흉터조차 없었다. 철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대역극은 그 자리에서 종막을 고할 터였다.


하지만 하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관찰안(Observation Eye)이 독고용의 미세한 움직임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독고용의 안색은 어딘지 모르게 검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의 호흡 주기는 평소보다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 단전 부근의 기맥이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흔적. 하진이 일부러 흘렸던 가짜 비급 ‘허무심법’의 역류 구결을 연마한 부작용이 벌써 그의 체내에 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진은 속으로 냉소했다.


‘늙은 뱀새끼, 내 덫에 걸려 단전이 썩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기고만장하는구나.’


하진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휠체어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탁,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전당의 무거운 압박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하진은 품속으로 손을 뻗었다.


철가면을 벗으려 하는 줄 알고 독고용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지던 찰나였다.


쾅-!


하진이 품속에서 꺼낸 묵직한 pitch-black 철패를 석조 탁자 위에 거칠게 내리쳤다.


전당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할 정도의 충격음과 함께, 은밀한 마교의 신물 천마령(天魔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철로 주조된 패 전면에 새겨진 붉은 마교의 문양이 등잔불 밑에서 피비린내 나는 안광처럼 번뜩였다.


"천마령이다……!"


누군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교주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신물이 등장하자, 정면 돌파를 시도하려던 반란파 장로들의 기세가 단숨에 한풀 꺾였다. 하진은 목의 은판을 극도로 수축시키며, 사방의 벽면을 뒤흔드는 성음공의 위엄으로 일갈했다.


"네놈들이 정녕 죽기를 작정했구나!"


성음공 트릭에 의해 증폭된 교주의 사자후가 장로들의 고막을 찢을 듯이 강타했다. 전당 내부의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하진은 철가면 너머로 독고용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본좌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 하였느냐, 대장로?"


"교, 교주님. 소신은 오직 교단의 안정을 위해……."


"닥쳐라!"


하진의 일갈이 다시 한번 독고용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진은 품속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자, 바로 대장로의 횡령 장부(대장로의 횡령 장부) 실물이었다.


"가면을 벗으라 장담하는 네놈의 더러운 입에서, 과연 이 이름들이 나올 때도 그리 당당할 수 있을지 보고 싶구나."


하진은 장부를 펼쳐 들고, 나지막하지만 전당 전체에 뚜렷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장부의 내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의 절대 기억력이 뇌리 속 기억의 궁전에서 인출한 정확한 날짜와 숫자들이 사형 선고처럼 흘러나왔다.


"건안 삼년, 사월 십사일. 흑철광산에서 채굴된 양질의 삼등 흑철광석 오만 근 누락. 인도자, 외당 상단 대장로 대리인. 수취인, 정파 무림맹 소속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휘(南宮輝)."


전당 내부의 공기가 기이하게 흔들렸다. 중립파 장로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팽창했다. 마교의 가장 소중한 군사 자산이자 영토의 핏줄인 흑철광석이, 정파의 명문 세가인 남궁세가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매교(賣敎) 행위였다.


"이, 이것이 무슨……!"


독고용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의 주름진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닥쳐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진은 장부의 다음 장을 넘기며 더욱 서늘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동년 칠월 이십일, 구만 근 누락. 수취인 남궁휘. 동년 십이월, 십만 근 누락 및 은자 삼만 냥의 비밀 거래 확인. 대장로 독고용, 네놈이 교단의 자산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우고, 정파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준 매교노(賣敎奴)였다는 물증이 여기 고스란히 적혀 있거늘!"


하진이 장부를 독고용의 발치 앞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장부의 펼쳐진 페이지에는 대장로 독고용의 친필 수결과 외당 상단의 비밀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장로 사패가 이끄는 혈조각의 무사들과 중립파 장로들이 장부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몰려들었다. 장부를 확인한 사패의 눈빛이 극도의 분노와 살기로 번뜩였다.


"대장로…… 정녕 네놈이 교단을 배신하고 정파의 개들과 손을 잡았단 말이냐!"


사패의 일갈에 전당 내부의 여론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하진의 정체를 의심하며 철가면을 벗으라 압박하던 장로들의 시선이, 이제는 교단을 배신한 대역죄인 독고용을 향해 칼날처럼 쏠렸다. 독고용을 지지하던 반란파 장로들조차 당황하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완벽한 대역전극이었다. 하진은 적이 제시한 '대역 의혹'이라는 링 위에서 싸우지 않고, 적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인 '매교 반역 혐의'라는 새로운 거대한 명분을 제시하여 판 전체를 재정의해 버린 것이다.


독고용은 자신의 평생 권위와 야심이 단 한 권의 장부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극도의 절망과 광기에 휩싸였다. 그의 호흡이 가빠지며 허무심법의 부작용인 단전의 기혈 뒤틀림이 심장을 압박해 왔다. 얼굴이 붉게 충혈된 독고용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달았다. 정치적 파멸이 확실해진 순간, 늙은 마두의 마음속에서 이성이 완전히 날아갔다.


"이 가짜 교주 놈이 감히 나를 모함하는구나! 죽어라!"


크아아아아-!


독고용이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허리춤에서 혈영검(血影劍)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날에서 뿜어져 나온 피비린내 나는 붉은 검기가 전당의 바닥 돌판을 찢어발기며 휠체어에 앉은 하진을 향해 번개처럼 쇄도했다. 초일류 고수의 일격필살 기습이었다. 무공이 없는 하진으로서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가루가 될 치명적인 위기였다.


하진은 밀려드는 파괴적인 살기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왼손은 이미 천기선의 격발 스위치를 조준하고 있었으나, 그가 부채를 펼치기도 전에 전당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빙백검기(氷白劍氣)가 허공을 가르며 독고용의 붉은 검기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두 초일류 고수의 내력이 충돌하며 전당 내부의 석조 기둥들이 바르르 진동했고, 자욱한 충격파의 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먼지 안개 속에서, 은빛 무복을 입은 한 사내가 하진의 휠체어 앞을 가로막아서며 굳건히 버티고 섰다.


좌호법 설천우(薛天宇)였다.


그의 손에 쥐여진 설화검(雪花劍)에서는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독고용을 향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진의 정교한 가스라이팅과 심리적 지배에 완전히 잠식당한 좌호법이, 스스로 교주의 방패가 되어 반란의 칼날을 막아선 것이다.


설천우가 설화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서늘하게 일갈했다.


"대장로 독고용. 감히 교주님께 칼을 겨누다니, 정녕 미쳤구나."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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