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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눈을 뜬 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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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마치 얼음 송곳이 뒤틀린 경맥을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격통에 연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끼 낀 축축한 석벽과 창살 틈새로 스며드는 음습한 안개뿐이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와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 이곳은 마교의 악명 높은 지하 감옥, 흑월천뢰(黑月天雷)였다.


"으윽……!"


하진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내 단전 부근에서 시작된 얼음 같은 냉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선천적으로 모든 경맥이 뒤틀려 막힌 채 태어난 시한부의 육체, 구음절맥(九陰絶脈). 삼류 무사의 가벼운 손길 한 번에도 절명할 수 있는 나약한 서생의 몸뚱이가 지금 그가 가진 전부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하진은 이를 악물고 기어가 굳게 닫힌 감옥의 철문을 완력으로 열어보려 했다. 하지만 쇠사슬을 움켜쥔 순간, 심맥을 억누르는 냉기가 폭발했다.


"쿨럭! 컥……!"


차가운 검은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기맥이 뒤틀려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하진은 차가운 돌바닥 위로 처참하게 주저앉았다. 힘없는 약자로 태어난 서생의 설움과 절망이 가슴을 짓눌렀다. 무공이 지배하는 이 사나운 강호에서, 자신 같은 약자는 그저 짓밟힐 운명에 불과한 것인가.


그때, 어둠 속에서 횃불 불빛이 일렁이며 두 개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발치에 거대한 시신 한 구가 놓여 있었다.


하진은 흩어지는 시야를 간신히 붙잡으며 그 시신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고통을 압도했다.


시신의 얼굴. 그것은 거울을 볼 때마다 마주하던 자신의 얼굴과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다만 뺨에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고, 살아서 천하를 오만하게 굽어보았을 살기가 죽어서도 안광에 서려 있는 노년의 마두. 천하제일 마두이자 흑월마교의 전임 교주, 천마(天魔) 독고혈이었다.


"믿기지 않는군. 정말 똑같아."


서늘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붉은 가죽 무복을 입고 허리에 채찍과 보검을 찬 여무사, 독고혈의 친딸이자 소교주인 백화련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철처럼 단단한 체구에 묵직한 대검을 등 뒤에 멘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마교의 최강의 방패라 불리는 우호법 독고린이었다.


스릉-


백화련이 허리춤에서 적련검(赤蓮劍)을 뽑아 들었다. 붉은 검날이 하진의 창백한 목덜미에 닿았다. 서늘한 쇠붙이의 감각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누구냐, 네놈은? 어찌 감히 천마의 얼굴을 하고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이지?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 개먹이로 주겠다."


절체절명의 위기. 일류 고수의 검기 앞에서 하진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하진은 서생으로서 평생 단련해 온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두뇌를 가동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방대한 서고가 펼쳐졌다. 선친 연우량이 남긴 정세 비망록과 만 권의 기서들이 구역별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는 가상의 공간, '기억의 궁전'이었다. 하진은 눈앞의 시신과 주변 인물들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스캔하며 뇌리의 서랍을 열었다.


'독고혈. 천하제일인의 무공 경지인 화경에 도달한 자. 주화입마로 급사했다고 알려졌으나…… 아니다.'


하진은 천천히 눈을 뜨며 목을 겨눈 검날을 응시했다. 그리고 피 묻은 입술을 열어 나지막이 읊조렸다. 목소리는 비록 가냘팠으나 흔들림이 없었다.


"주화입마가 아닙니다."


백화련의 안광이 좁혀졌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천마의 시신을 보십시오. 입술이 검붉게 타들어 가고, 손톱 끝에 미세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기혈이 뒤틀려 폭주한 자는 혈맥이 터져 붉은 피를 토하지만, 이 시신의 피는 검고 지독한 비린내가 나는군요. 이것은 만성 기맥 파괴 독약인 사혼산(사혼산)에 중독되어 서서히 단전이 부식당해 급사한 흔적입니다."


백화련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호법 독고린의 눈동자 역시 크게 흔들렸다.


"네놈이 그걸 어찌 알지?"


"학문을 닦은 자라면 독물과 인체의 반응을 기록한 기서 몇 권쯤은 외우고 있는 법입니다."


하진은 각혈의 통증을 참아내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지 못하고 이 어두운 지하 감옥으로 끌고 온 이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천마의 급사가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순간, 좌호법 설천우와 대장로 독고용이 이끄는 반란파가 교단을 찢어발기겠지요. 마교는 하루아침에 멸망할 것이고, 소교주인 당신 역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겁니다. 그래서……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이 시신을 대신할 대역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독고린이 묵직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하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위압적인 살기가 감옥 내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했다.


"영민한 놈이군. 하지만 똑똑한 놈일수록 다루기 어려운 법이지."


독고린은 품속에서 가죽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그 안에는 하진의 고향 가문인 연씨 서가의 가계도와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연하진. 명문 서가였으나 몰락한 연씨 가문의 장남. 네 고향 집에는 눈먼 노모 임씨 부인과 어린 동생들이 살고 있더군. 네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대역극 도중 허튼짓을 한다면…… 네 가문은 흔적도 없이 멸문당할 것이다. 네놈의 목숨과 가문의 생사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가족의 이름이 나오자 하진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는 철저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화를 내거나 비굴하게 굴면 주도권을 영원히 빼앗긴다. 상대방의 절박함을 역용해야 했다.


하진은 기억의 궁전에서 마교 내부의 권력 구도를 다시 분석했다. 그들이 이토록 무리한 대역극을 기획할 만큼 좌호법 설천우의 세력은 강력하고 집요하다. 즉,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자신이 유일한 열쇠다.


하진은 핏자국을 닦아내며 서서히 몸을 곧게 폈다. 그리고 비웃듯 나지막하게 미소를 지었다.


"가문을 멸문시키겠다고 위협하셨습니까?"


"겁대가리가 상실했군.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더냐?" 백화련이 검날을 바짝 밀어붙였다.


"죽이십시오. 내 가족을 건드리는 순간, 나는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 설천우와 독고용이 천마전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 당신들은 무엇으로 그들의 칼날을 막을 생각입니까? 천마의 죽음이 공식화되는 순간, 당신들이 가장 먼저 사지가 찢겨 처형당할 텐데 말입니다. 나와 내 가문은 당신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유일한 동줄입니다."


독고린의 안광이 매섭게 번뜩였다. 하진의 논리적인 반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의 심장을 찔렀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독고린이 마침내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협상의 주도권이 약자인 서생에게로 넘어오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간단합니다. 첫째, 내 노모와 동생들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하고 매달 은밀하게 활동 자금을 송금할 것. 둘째, 대역극을 연기하는 동안 당신들은 내 물리적인 무력이자 방패가 되어 내 명령을 오차 없이 수행할 것. 나는 무공을 전혀 쓰지 못하는 절맥의 몸입니다. 그러니 대외적인 위협은 당신들이 온몸으로 막아내야 합니다."


백화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진을 바라보았다. 단 한 줌의 공력도 없는 병약한 서생이, 마교 최고의 무인들을 상대로 오히려 거래를 제안하고 복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좋다. 약조하지."


독고린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은 바닥에 놓여 있던 전임 천마의 상징, 차갑고 은빛으로 빛나는 은빛 천마 철가면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쇳덩이의 무게가 손끝을 통해 묵직하게 전해졌다.


가면 뒤에 얼굴을 숨기는 순간, 평범한 서생 연하진은 죽고 천하에서 가장 잔혹한 마두 천마가 탄생할 것이다. 매 순간 정체가 들통날지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쓸쓸하고 고독한 양심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가문을 살리고 이 피비린내 나는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기꺼이 악마의 가면을 쓰기로 결단했다.


하진은 은빛 철가면을 자신의 얼굴에 밀착시켰다. 철컥하는 기계음과 함께 가면 뒷부분의 걸쇠가 정교하게 잠겼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좁고 서늘했다.


"우호법 독고린."


철가면 전면의 슬릿을 통해 하진의 나지막하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술의 움직임이 가려진 목소리는 기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문을 열어라. 이제 흑월마교의 진짜 주인이 세상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독고린이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흑월천뢰의 육중한 철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며 쏟아지는 차가운 안개 속으로, 가짜 천마의 철가면을 쓴 병약한 서생이 장엄한 첫발을 내디뎠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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