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순찰의 빈틈, 움직이기 시작한 거인
관절을 적신 검은 기름이 무강의 뼈마디를 녹여내리듯, 그의 발끝이 대지를 향해 고요히 가라앉았다.
주조소의 붉은 열기 속에서 밤새도록 끓여낸 돈피 마찰유(豚皮 摩擦油)는 지독하게 퀴퀴한 돼지 비계 냄새와 매캐한 흑철 가루 향을 풍겼다. 일반적인 기름이었다면 천근 현철갑의 무시무시한 금속 마찰열을 견디지 못하고 즉시 타서 말라붙었을 터였다. 하지만 고대 흑철 제련구결의 배합대로 주조된 이 검고 걸쭉한 비약은 달랐다. 무릎과 골반의 톱니바퀴 틈새를 타고 흘러든 기름은 뻑뻑하게 고착되어 있던 기계 장치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스스슥. 지이익.
무강이 천천히 하체에 힘을 주어 무릎을 굽혔다 폈다. 언제 부러질지 모를 끔찍한 쇳소리가 멈추고, 묵직하면서도 매끄러운 기계음이 고요한 주조소 내부를 채웠다. 하체 가동성 70% 회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억누르던 쇠틀의 무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제 힘으로 다리를 온전히 굽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기적 같은 활력이 감돌았다. 동물 가죽 방열 내의(動物 가죽 防熱 內衣)가 기름에 젖어 들며 피부를 조여오던 쇠독의 통증도 한결 누그러졌다.
주 노장이 쇠 의수를 털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소, 장군. 쇠틀이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소?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되오. 이 기름의 효능은 길어야 사흘이오. 게다가 냄새가 너무 강해 사냥개들의 코를 피하기 어려울 터이니, 낮에는 철저히 이전처럼 다리를 저는 척 연기해야 하오.”
무강은 투구 속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과묵한 안광은 이미 주조소 창살 너머, 푸르스름한 새벽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한 광산의 외곽을 향하고 있었다.
낮에는 간수장 마태강의 가혹한 매질과 채찍질을 견디며 완전히 폐인이 된 척 굴종을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밤은 달랐다. 철사방이 제정한 가장 가혹한 규칙인 ‘광산 야간 통행 금지령(鑛山 夜間 通行 禁止令)’이 가동되는 시간. 밤에 갱도를 벗어나는 노예는 즉시 활로 쏘아 죽인다는 공포의 규칙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이 시간은 보초들의 교대 틈새가 가장 벌어지는 유일한 빈틈이었다.
무강은 덕칠과 주 노장을 먼저 노예 막사로 돌려보낸 뒤, 홀로 어둠이 짙게 깔린 제9번 지하 갱도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 새로 발견된 흑철 동혈(黑鐵 洞穴)의 입구는 무너진 바위 잔해로 가득해 보초들의 눈길을 피하기에 가장 완벽한 은신처였다.
동굴 내부의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현철갑 표면의 열기를 식혔다. 무강은 품속 깊이 숨겨두었던 낡고 피 묻은 서책, ‘장장군의 군부 병법 비책(張將軍의 軍部 兵法 秘策)’을 꺼내 들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이었으나, 무강은 이미 스승 장장군이 남긴 구결들을 뼈에 새기듯 외우고 있었다.
‘내공이 봉인된 무인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가? 아니다. 대지가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힘, 즉 중력(重力)과 전신이 지닌 질량의 관성을 지배하는 자는 내공 없이도 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
비책에 적힌 자성 외공의 기초 구결들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무강은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굳건히 대지를 디뎠다. 다리 관절이 풀렸으니, 이제는 속도의 한계를 극복할 신법을 재정립해야 했다. 천근의 무게를 지닌 거구가 어떻게 날렵한 무인들의 신법을 따라잡을 것인가?
장장군의 대답은 단순했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쓰러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무강은 상체를 앞으로 슬쩍 기울였다. 천근의 무쇠 갑옷이 지닌 거대한 질량이 대지의 인력에 이끌려 앞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처박힐 상황. 그러나 무강은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의 찰나, 새로 윤활유를 칠한 무릎 관절을 굽히며 발끝으로 대지를 강하게 찼다.
쿵!
쿠르릉하는 둔탁한 지진음과 함께, 앞으로 쏟아지던 중력 가속도가 고스란히 전방을 향한 폭발적인 전진력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이 바로 비책에 적힌 ‘중력 낙하 보법(重力 落下 步法)’이었다. 내공의 바람을 타고 가볍게 나는 경공(輕功)이 아니었다. 거대한 바위가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 발생하는 무시무시한 물리적 운동 에너지를 수평의 전진 관성으로 바꾸는 군부의 실전 신법.
무강은 여기에 군부 전통의 사장보(死葬步)를 결합했다. 모래사장에서 뼈를 깎으며 연마했던, 무게중심을 극단적으로 낮추어 적의 예측 범위를 비껴가는 보법이었다.
쿵! 쿵! 쿵!
어두운 동굴 내부에서 검은 거인이 땅을 무너뜨리며 돌진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자갈들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현철갑의 쇠사슬이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동성이 회복된 하체는 전신의 무게를 버텨내며 엄청난 추진력을 뿜어냈다. 비록 휘두를 무기는 없었으나, 이 속도로 적을 들이받는 것만으로도 일류 고수의 뼈와 장기를 단숨에 으스러뜨릴 수 있을 터였다.
얼마나 보법을 연마했을까. 무강은 돌진을 멈추고 좁은 투구 틈새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의 근육 세포에 정기가 압축되며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관절에 바른 돈피 마찰유가 마찰열로 인해 타들어 가며 비린 기름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그때였다.
무강은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는 순간, 발바닥을 통해 대지의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지형 진동 감지(地形 振動 檢知)’.
어둠 속에서 시야가 제한된 투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진 초인적인 감각이었다. 천근의 무게를 지탱하는 하체는 대지의 미세한 공명조차 온전히 빨아들였다.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너머로, 극도로 가볍고 정교한 발걸음의 파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서른 보 밖. 지하 갱도 입구의 거대한 석회 기둥 뒤였다.
기척을 완벽히 지운 살수의 움직임. 철사방의 간수들이나 하급 무사들의 무식한 발걸음이 아니었다. 명문가의 고강도 경공을 익힌 일류 무인의 가볍고 매끄러운 기척이었다.
무강은 움직임을 멈추고 굳건히 섰다. 마치 작동을 멈춘 거대한 무쇠 석상처럼, 호흡마저 극도로 가라앉혔다.
스으으읍.
어둠 속에서 공기가 미세하게 찢어지는 파공음이 들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지 않는 특수 제련된 무음 석궁의 소리였다. 암기 궤적 예측술(暗器 軌跡 預測術)이 무강의 뇌리에서 즉각 가동되었다. 적의 어깨 긴장도와 손끝의 미세한 진동 파동을 통해 날아오는 암기의 궤적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목표는 단 하나. 무강의 얼굴을 가린 현철 투구의 좁은 눈구멍 틈새였다.
피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무강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왼쪽으로 딱 삼 치 비틀었다.
깡-!
어두운 동굴 내부를 찢는 청명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칠보단혼독이 발라진 검은 강철 화살이 투구 이마의 가장 두꺼운 돌출부에 부딪혀 무참히 튕겨 나갔다. 투구 표면에 순간적인 불꽃이 튀며 자객의 위치가 일시적으로 드러났다.
‘철벽 참수방어(鐵壁 斬首防禦)’.
적의 기습을 피하지 않고 가장 단단한 장갑 부위로 정면으로 받아내어 적의 무기를 무력화시키는 대장군의 실전 방어술이었다. 화살이 부러져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석회 기둥 뒤에서 나직한 각혈 소리와 함께 경악 어린 숨소리가 흘러나왔.
“……!”
자객은 자신의 완벽한 기습이 허망하게 막힌 것에 극도의 충격을 받은 듯했다.
무강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쓰러뜨리며 중력 낙하 보법을 시전했다.
콰과광!
지면을 부수는 거대한 발구름 소리와 함께, 검은 거인의 신형이 안개 속을 뚫고 석회 기둥을 향해 탄환처럼 돌격했다. 천근의 질량이 가속도를 받아 돌풍을 일으켰다. 자객은 경악하며 신형을 가볍게 띄워 뒤로 날아오르려 했으나, 이미 무강의 거대한 몸체가 기둥을 통째로 들이받아 부수며 자객의 퇴로를 완전히 가로막은 뒤였다.
“누구냐.”
무강이 거대한 철갑 손을 뻗어 자객의 덜미를 낚아채려 했다. 쇳소리가 섞인 육중한 목소리가 동굴 벽면을 울렸다.
자객은 허공에서 유연하게 몸을 비틀며 허리춤에서 날렵한 보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매화 향과 함께 청명한 도가 계열의 검기가 어둠을 갈랐다. 무강의 손목 장갑에 검날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는 찰나, 새벽안개가 동굴 입구로 밀려들어 와 자객의 모습을 비추었다.
하얀 도포를 휘날리며 수려한 남장을 한 여검사. 맑고 차가운 눈동자 속에 경악과 의협심을 동시에 품은 명문가의 후기지수, 모용선(慕容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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