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철의 눈물, 쇠틀에 기름을 치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로 배어 나오는 은은한 푸른빛이 무강의 투구 표면을 차갑게 물들였다.
지하 구백 자 깊이의 어둠 속, 방금 전의 대붕괴가 남긴 먼지 구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범무강은 왼쪽 어깨가 기괴할 정도로 밑으로 툭 내려앉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수만 톤의 암반을 맨몸으로 지탱해 낸 대가는 참혹했다. 왼쪽 어깨 관절이 완전히 탈골되어 팔이 대롱거렸고, 현철갑 내부의 가죽 내의는 이미 터져 나온 피와 진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장군님! 어깨가……!”
삼돌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경악 어린 비명을 질렀다. 철우 역시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무강의 어깨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단순한 죄수가 아닌,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지와 맞서 싸운 거인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무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굳건히 디디고 있던 오른발에 무게중심을 실은 채, 탈골된 왼쪽 어깨를 단단한 암벽 모서리에 그대로 가져다 댔.
그리고 전신의 무게를 실어 옆으로 몸을 강하게 부딪쳤다.
우드득!
동굴 내부를 울리는 끔찍한 뼈 마찰음과 함께 어깨 관절이 강제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 보통의 무인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혼절했을 격통이었으나, 무강의 투구 틈새로 흘러나오는 호흡은 단 한 줌의 흔들림도 없었다. 혹독한 고문과 갑옷의 압박 속에서 단련된 고통 면역(痛覺 遮斷)의 힘이었다.
무강은 삐걱거리는 목 관절을 돌려 새로 열린 어둠의 공간을 응시했다. 무너진 암벽 너머로 드러난 고대의 공동, 즉 흑철 동혈의 내부였다. 그 안쪽 벽면에는 기묘하게 푸른 광채를 발하는 암석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때, 9번 갱도의 소란을 피해 숨어 있던 늙은 대장장이 주 노장이 쇠로 만든 의수를 절렁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는 동굴 벽면의 푸른 광채를 보더니, 단숨에 눈을 크게 뜨고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이것은……! 만년한철의 기운이 섞인 고순도 흑철 원석(高純度 黑鐵 原石)이다! 이 지옥 같은 광산 깊은 곳에 이런 천하의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니!”
주 노장은 흙먼지가 가득한 손으로 푸른 광석의 결을 더듬었다. 쇠의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늙은 장인의 눈빛이 광기 어린 열정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는 뒤를 돌아 무강의 무릎 관절을 살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장군, 이 원석이 있어도 지금 장군의 몸 상태로는 제명에 살기 어렵소. 보시오, 무릎 관절의 톱니들이 이미 쇠독과 마찰열로 인해 쩍쩍 갈라지고 있소. 내공이 봉인된 상태에서 천근의 무게를 오직 뼈로만 지탱하니, 연골이 갈려 나가는 건 시간문제요.”
주 노장은 무강의 무릎 자물쇠 부위를 쇠 의수로 툭툭 건드렸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렸다.
“이 갑옷의 양쪽 다리 관절은 정교한 기계식 자물쇠로 잠겨 있소. 철사방의 분타주 제갈무경 놈이 차고 다니는 첫 번째 황금 열쇠가 없다면 절대로 풀 수 없는 쇠틀이오. 그 열쇠를 빼앗기 전까지 버티려면, 당장 이 관절의 마찰을 줄여줄 극약 처방이 필요하오.”
그때, 동굴 구석의 음침한 그림자 속에서 윤활유 보급책 덕칠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칠성이 취사장에서 목숨을 걸고 빼돌린 거대한 돼지 비계 덩어리들이 들려 있었다.
“장군님, 준비해 왔습니다. 주 노장님의 말씀대로 동물 비계를 달여 기름을 만들 준비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름으로는 이 현철갑의 무시무시한 고열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즉시 타서 말라버릴 것입니다.”
주 노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벽면의 푸른 원석을 가리켰다.
“그렇소. 그래서 이 고순도 흑철 원석이 필요한 것이오.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대 흑철 제련구결(古代 黑鐵 鍛造口訣)에 따르면, 이 원석을 극도로 미세하게 갈아낸 흑철 가루를 끓는 동물 기름과 특수한 비율로 배합해야 하오. 그래야만 현철의 극독한 마찰을 견뎌내고 톱니를 부드럽게 만들어줄 돈피 마찰유(豚皮 摩擦油)가 완성되오.”
무강은 조용히 손을 뻗어 벽면에 박힌 푸른 원석을 움켜쥐었다. 내공이 봉인된 그의 손아귀에 천근력(千斤力)의 무식한 악력이 가해졌다.
콰드득!
단단한 암반이 으스러지며 푸른 광채를 뿜어내는 고순도 흑철 원석 한 덩이가 그의 거친 철갑 장갑 속으로 떨어졌다. 무강은 그것을 주 노장에게 건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자. 시간이 없다.”
쇳소리가 섞인 육중한 목소리가 동굴 내부의 습한 공기를 가르며 묵직하게 퍼져나갔.
***
깊은 밤, 철사광산 외곽에 위치한 흑철 주조소(黑鐵 鑄造所).
사방에서 용광로가 뿜어내는 붉은 열기와 검은 연기가 가득한 이곳은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매캐했다. 평소에는 간수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 흑철괴를 생산하는 곳이었으나, 깊은 밤의 교대 시간에는 보초들의 눈길이 다소 느슨해지는 유일한 틈새가 존재했다.
무강은 전신에 동물 가죽 방열 내의(動物 가죽 防熱 內衣)를 단단히 밀착해 입은 채, 주조소 중앙의 거대한 용광로 앞에 섰다. 주 노장이 한 손으로 거대한 풀무를 당기며 제련 온도를 극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붉은 불꽃이 무강의 검은 철갑 표면을 사정없이 달구었다. 갑옷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가 엄습했으나, 무강은 묵묵히 고순도 흑철 원석을 정으로 내리쳐 미세한 가루로 분쇄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땀방울이 투구 틈새로 흘러내려 붉은 용광로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덕칠은 커다란 가마솥에 돼지 비계를 가득 넣고 달이기 시작했다. 주조소 내부가 동물 기름 타는 비린내와 흑철의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찼다.
바로 그 순간, 주조소 바깥의 어두운 길목에서 거친 발소리와 함께 횃불의 불빛이 흔들리며 다가왔.
“이봐! 밤중에 주조소의 굴뚝에서 웬 연기가 이리 많이 나는 거냐? 안에서 불법 제련이라도 하는 쥐새끼가 있는 거 아니야?”
철사방의 하급 경비병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이 주조소 내부의 비정상적인 열기와 비린 냄새를 의심하고 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용광로의 불길을 지금 끌 수도 없었고, 무강의 거구가 숨을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그때, 주조소 문밖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나으리들! 이 추운 밤중에 순찰을 도시느라 고생이 너무 많으십니다!”
취사장의 침모 춘자였다. 그녀는 요염한 몸짓으로 횃불을 든 경비병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의 뒤에는 식사 담당 노예 칠성이 커다란 술독과 기름진 고기 접시를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취사장에서 내일 간수장님께 올릴 특별 약주를 거르고 있었는데, 마침 나으리들을 만나려고 이리 향하던 참이었습니다. 뜨끈한 약주에 잘 구운 고기 한 점 하고 가시지요. 주조소 연기는 저희가 내일 쓸 숯을 미리 굽느라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셔요.”
칠성이 약삭빠르게 독한 술을 사발 가득 부어 경비병들에게 건넸다. 비린 고기 냄새와 달콤한 약주 향이 경비병들의 코를 찔렀다. 경비병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주조소 문을 등지고 앉아 술사발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흐흐, 역시 취사장 춘자가 눈치가 빠르구나. 좋다, 딱 한 잔만 하고 가마.”
바깥에서 술판이 벌어지는 사이, 주조소 내부의 제련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주 노장은 붉게 달아오른 흑철 가루를 끓어오르는 돈피 기름 가마솥에 들이부었다.
콰아아아!
푸른 안개와 함께 기묘한 자성(磁性)의 기운이 섞인 걸쭉하고 검은 액체가 완성되었다. 고대 흑철 제련구결에 따른 완벽한 배합이었다. 덕칠은 완성된 돈피 마찰유를 특수 호리병에 신속하게 회수했다.
“장군님, 다리를 굽히십시오. 관절 마찰 최소화 기법(關節 摩擦 最小化 技法)을 전개하겠습니다.”
덕칠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끓어오르는 검은 마찰유를 무강의 굳어 있던 무릎 관절 톱니 틈새에 조심스럽게 붓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자욱한 연기와 함께 쇳물 끓는 냄새가 주조소 내부를 가득 메웠다.
동시에, 그동안 무강의 머릿속을 찢어놓을 듯 괴롭히던 현철갑 특유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쇳소리가 기적처럼 멈추었다. 검은 기름이 뻑뻑하게 맞물려 있던 톱니바퀴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들며 굳어 있던 금속의 마찰 저항을 완벽히 지워버렸다.
무강은 천천히 힘을 주어 왼쪽 무릎을 굽혔다.
철컥. 웅웅.
그동안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던 갑옷의 하체 관절이, 마침내 묵직하고 부드러운 기계음을 내며 꺾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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