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막장, 버티는 어깨
지하 구백 자 깊이의 어둠은 언제나 축축한 유황의 비린내와 광부들의 땀 절은 악취로 가득했다.
범무강은 묵직한 흑철 삽을 거칠게 쥔 채 흙바닥을 디뎠다. 전날 밤 장님 의원 갈홍에게 받았던 역침맥법의 약효 덕분인지, 굳어 있던 무릎 관절의 회전 톱니들이 한결 부드럽게 맞물려 돌아갔다. 하지만 천근에 달하는 현철 갑옷의 물리적인 중량은 여전히 그의 어깨와 척추를 매 순간 무자비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뼛속 깊은 곳에서 갈려 나가는 신경통이 일었지만, 무강은 투구 속에서 이빨을 악물며 고통을 삼켰다.
“형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흑철을 캐던 거구의 광부 철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철우는 주위를 슬쩍 살피더니, 자신의 누더기 허리춤에서 단단히 싸여 있던 무명천 뭉치를 꺼내 무강에게 보였다. 그 안에는 전날 밤 무강의 무자비한 주먹에 박살 났던 죄수 우두머리 귀수 삼랑의 철편 조각이 들어 있었다.
“삼랑 놈이 쓰던 철편 조각입니다. 비록 부러졌지만 명색이 북방의 고순도 한철이라 꽤 단단합니다. 언젠가 무기나 도구를 만들 때 요긴한 쐐기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제가 몰래 챙겨두었습니다.”
무강은 좁은 투구 틈새로 철우의 눈을 응시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으나 가문의 은혜를 기억하고 자신을 따르려는 우직한 동생을 향한 무언의 신뢰였다. 철우는 무강의 묵묵한 인정을 받자 안도한 듯 철편 조각을 다시 깊숙이 숨기고는 곡괭이를 힘차게 내리쳤.
그때, 갱도 입구 쪽에서 횃불의 붉은 불빛과 함께 가죽 채찍을 손에 쥔 간수들의 거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더러운 쥐새끼들아! 일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라!”
나타난 자는 철사방의 수석 간수장 마태강과 부방주 조백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의 뒤에는 화약 항아리를 어깨에 멘 기술자 노예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9번 갱도의 십장 삼돌이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혔다.
“간수님, 이 깊은 막장 구역에서 화약을 쓰시려는 겁니까? 이곳은 지난번 붕괴 사고 이후 지반이 극도로 약해져 있습니다. 여기서 무리하게 발파를 강행하면 갱도 천장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겁니다!”
“시끄럽다, 늙은 죄수 놈이 어디서 훈수질이냐!”
하급 간수가 가죽 채찍을 휘둘러 삼돌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찰싹!
삼돌이 거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철우가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곡괭이를 꽉 쥐었으나, 무강이 육중한 철갑 장갑을 얹어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 지금은 힘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제갈무경의 감시망이 갱도 전체를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무모한 충돌은 파멸을 부를 뿐이었다. 무강은 투구 속에서 마태강의 수하들을 차갑게 눈으로 담았다.
간수장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화약 설치를 독촉했다.
“제갈 분타주님의 명령이시다. 오늘 채굴량이 반 장이나 모자란다! 지반이 무너지든 말든 흑철 원석만 캐내면 그만이다. 어서 도화선에 불을 붙여라!”
노예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바위 틈새에 화약 항아리를 밀어 넣고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간수들과 광부들이 비좁은 통로를 따라 급히 대피하기 시작했다.
치이익, 타들어 가는 불꽃 소리가 어두운 갱도 내부의 침묵을 찢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폭발.
콰아아앙!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갱도 전체가 거대한 거인의 손에 붙잡혀 흔들리듯 요동쳤다. 사방에서 귀를 찢는 암반의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화약의 양이 너무 많았던 탓에, 약해져 있던 9번 갱도의 천장 바위들이 도미노처럼 금이 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진다! 대피해라!”
“으아악! 출구가 막혔다!”
아수라장이었다. 쏟아지는 흙더미와 자갈들이 사방을 가로막았고, 자욱한 먼지가 광부들의 시야를 완벽히 가렸다. 그 혼란 속에서 다리를 다쳐 심하게 절뚝거리던 젊은 광부 석두가 무너진 바위 더미에 발이 걸려 쓰러졌다.
“살려주십시오! 형님! 십장님!”
석두가 절규했다. 삼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먼지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으나, 그들의 머리 위 천장에서 수만 톤에 달하는 거대한 주 암반이 통째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위의 그림자가 삼돌과 석두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속도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찰나의 파멸.
무강의 안광이 투구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신체였지만, 무강은 전신의 중량을 관성으로 전환하는 ‘중력 낙하 보법(重力 落下 步法)’을 전개했다. 천근의 무쇠 갑옷 무게를 앞으로 쓰러뜨리듯 던지며, 하체의 지지력을 순간적으로 폭발시켰다.
콰직!
무강의 거구가 먼지 폭풍을 뚫고 탄환처럼 돌진했다. 그는 떨어지는 거대 암반의 바로 밑으로 자신의 왼쪽 견갑과 단단한 어깨를 무식하게 밀어 넣었다.
쿠우우웅!
하늘과 땅이 맞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지하 막장을 흔들었다. 수만 톤의 낙하 충격이 범무강의 어깨를 타고 그대로 내리꽂혔다.
“으으윽!”
무강의 입에서 쇳소리가 섞인 처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해진 엄청난 물리적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양발이 단단한 광산의 흙바닥 속으로 한 자 깊이 박혀 들어갔다. 무릎 관절 내부의 톱니바퀴들이 비명을 지르며 불꽃을 튀겼고, 전신의 뼈마디가 일제히 어긋나는 듯한 격통이 휘몰아쳤. 어깨 장갑 내부의 쇠독 상처가 터져 검붉은 피가 갑옷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이대로 짓눌리면 척추가 부러져 즉사할 터였다.
무강은 즉시 ‘골격 분산(骨擊 分散)’의 기법을 가동했다. 어깨 관절을 미세하게 좌우로 흔들며, 어깨로 집중되는 무시무시한 충격 에너지를 전신의 현철 갑옷 표면으로 고르게 흘려보냈다. 갑옷을 감싸고 있던 굵은 쇠사슬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웅웅웅!
무강의 몸을 타고 흐른 파괴적인 진동이 그가 디디고 있는 대지로 고스란히 배출되었다. 그가 서 있는 주변의 석조 바닥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며 사방으로 솟구쳤다. 대지가 무강의 방패가 되어 충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삼돌! 철우! 어서 석두를 끌어내라!”
무강이 포효했다. 투구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쇳소리는 무너지는 동굴의 굉음보다 더 웅장했다.
정신을 차린 철우가 다급히 석두에게 달려갔다. 석두의 한쪽 다리가 무거운 돌더미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철우는 품속에서 삼랑의 바스러진 철편 조각을 꺼내 돌더미 틈새에 쐐기처럼 박아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천생 괴력을 실어 철편을 정으로 내리치듯 딛고 지렛대 삼아 바위를 들어 올렸다.
콰직, 쩍!
단단한 한철 조각의 쐐기 덕분에 바위가 갈라지며 석두의 다리가 극적으로 빠져나왔다. 삼돌과 철우가 석두를 양옆에서 부축하며 무너져 내리는 낙석 지대를 벗어나 안전한 상부 통로로 달아났다. 그들의 뒤를 따라 갇혀 있던 30명의 광부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피했다.
“장군님! 어서 피하십시오! 천장이 통째로 무너집니다!”
삼돌이 먼지 너머를 향해 처절하게 소리쳤다.
무강은 마지막 광부의 신형이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다. 그의 왼쪽 어깨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일시적으로 탈골되는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현철 갑옷의 쇠사슬들은 이미 터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져 붉은 마찰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신체의 한계였다.
“하아아압!”
무강은 단전의 봉인을 건드리지 않은 채, 오직 전신의 근육 세포에 압축되어 있던 순수 완력(천근력)을 폭발시켰다. 어깨를 위로 강하게 튕겨내며 지탱하고 있던 거대 암반을 뒤로 밀쳐냈다.
동시에 무게중심을 뒤로 던지며 중력 낙하 보법의 반동으로 신형을 뒤로 날렸다.
콰과과광!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수만 톤의 암반과 흙더미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먼지 폭풍이 전장을 휩쓸었다. 간신히 대피한 광부들은 무너진 막장을 바라보며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장군이 바위 무덤에 갇힌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욱한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을 때, 광부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무너진 암반 더미 너머, 붕괴의 충격으로 인해 단단한 지하 암벽 한쪽이 완전히 깨어져 나가며 거대한 공동(空洞)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깊고 어두운 고대의 동굴 입구 앞에, 어깨 장갑이 심하게 그을리고 사슬을 질질 끄는 검은 거인 범무강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어깨뼈가 우두둑 비명을 지르고 현철갑의 쇠사슬이 터질 듯 팽팽해진 순간, 무너진 암반 너머에서 기묘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고대의 공동(空洞)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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