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의원과 뒤틀린 뼈
귀수 삼랑의 바스러진 턱뼈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선혈이 지하 9번 갱도의 축축한 진흙 바닥을 더럽혔다. 어둠이 짙게 깔린 막장 안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수십 명의 노예 광부들은 숨을 죽인 채, 제자리에 우뚝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거대한 검은 철갑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단 한 번의 투박한 주먹질로 광산의 무자비한 지배자를 폐인으로 만들어버린 거인. 내공의 푸른 광풍도, 화려한 초식의 잔상도 없었다. 오직 천근의 무게를 실어 내리꽂은 순수한 완력과 강철 같은 골격의 힘뿐이었다.
“우, 우윽…….”
벽면에 처박힌 귀수 삼랑이 신음하며 피 섞인 이빨을 뱉어냈다. 그의 수하들은 무기마저 바닥에 떨어뜨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범무강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정작 승리를 거둔 범무강의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다. 투구의 좁은 틈새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무겁게 울렸다. 무강은 가슴팍을 짓누르는 끔찍한 압박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공이 완전히 봉인된 상태에서 천근 현철갑의 중량을 순수 근육과 뼈로만 버텨내며 삼랑의 기습을 받아내고 주먹을 지른 여파였다.
우두둑, 뚝.
그의 무릎과 척추 마디마디에서 뼈가 갈려 나가는 듯한 끔찍한 파열음이 일었다. 골밀도 마모(骨密度 磨耗)였다. 내공의 온화한 진기가 뼈와 장기를 보호해 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천근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은, 매 순간 자신의 골막을 숫돌에 갈아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기에 에피소드 1에서 간수장 마태강의 가시 채찍에 맞았던 어깨의 쇠독 상처가 열기를 품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장갑 내부에서 쓸려 나간 살점이 쇠붙이의 독성과 반응하여 짓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 장군님…….”
흙바닥에 쓰러져 있던 9번 갱도의 십장 삼돌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범무강의 검은 철갑 주위로 미세한 증기와 함께 삐걱거리는 기계적 마찰음이 심상치 않게 흘러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삼돌은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삼랑의 패거리들이 겁에 질려 있긴 하나, 이 소란이 간수장 마태강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마태강이 경비병들을 이끌고 들이닥친다면 지금처럼 신체 상태가 무너진 장군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삼돌이 조용히 무강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두꺼운 현철 장갑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장군님, 이리 오셔야 합니다. 곧 마태강의 보초들이 순찰을 돌 시간입니다. 지금 장군님의 뼈 소리와 호흡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대로 두면 경맥이 막혀 쓰러지십니다.”
무강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자, 쇠사슬이 진흙 바닥을 쓸며 둔탁한 진동을 일으켰다. 쿵, 쿵. 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 관절 내부의 톱니바퀴가 뻑뻑하게 맞물리며 끔찍한 저항감을 만들어냈다. 하체의 관절들이 굳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다리 자물쇠가 풀리기도 전에 스스로의 무게에 눌려 영구적인 불구가 될 터였다.
삼돌은 거구의 광부 철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철우는 순박한 얼굴에 긴장감을 가득 담은 채, 무강의 거구 뒤에 서서 혹시 모를 간수들의 시선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삼돌은 9번 갱도 가장 구석, 붕괴 사고로 인해 오랫동안 방치되어 가죽 휘장으로 대충 가려둔 폐기물 보관창고 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간수들이 유독 가스와 붕괴 위험 때문에 접근조차 하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사각지대였다.
가죽 휘장을 걷어내고 비좁은 바위 틈새를 지나자, 퀴퀴한 유황 냄새와 축축한 흙먼지 사이로 기묘한 약초 향이 배어 나왔다. 말린 지황과 한련초의 쓸쓸하고 매캐한 냄새. 그곳이 바로 광산 노예들 사이에서 유일한 구원의 성소로 불리는 ‘갈홍의 맹인 의원’이었다.
창고 안쪽에는 낡은 기름등잔 하나가 흐릿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상 위에는 정체 모를 약초 가루와 낡은 무명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중앙에 한 사내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남루한 죄수복을 단정하게 기워 입은 마른 체구의 노인. 양쪽 눈은 허연 막으로 덮여 있는 장님이었지만, 그의 자세만큼은 꼿꼿하여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풍겼다. 범씨 대장군가의 전직 군의관이자, 지금은 장님이 되어 유배된 의원 갈홍이었다.
갈홍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동굴 바닥을 울리며 들어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쇠가 쓸리는 기계적 마찰음과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뼛마디의 미세한 공명 소리. 갈홍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발걸음…… 이 웅장하고 묵직한 무쇠의 울림은…….”
갈홍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의 손이 허공을 더듬다, 무강의 가슴팍을 덮고 있는 차갑고 두꺼운 현철갑 표면에 닿았다. 거친 단조 흔적과 가문 특유의 철혈병도법 문양. 갈홍의 허연 눈동자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려 풍상에 찌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장군 범철심 장군님의 뼈대…… 그리고 소장군 무강 님이시로군. 결국 이 지옥 같은 밑바닥에서 뵙게 되는구려.”
“……갈 숙부.”
무강의 투구 안쪽에서 쇳소리가 섞인 무겁고 투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멸문지화의 그날 밤, 갈홍은 무강에게 가해지는 황실의 구중 경맥 봉인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기 위해 은밀히 혈도를 보호하려다 적들에게 들통났다. 그 대가로 두 눈이 뽑히는 참형을 당하고 이곳 북방의 철사광산으로 끌려와야 했다. 자신 때문에 어둠 속에 갇히게 된 충신을 마주한 무강의 가슴속에 붉은 부채감과 슬픔이 끓어올랐다.
“제 상처보다 장군님의 상태가 급합니다. 어서 평상에 앉으십시오.”
갈홍은 장님이었으나 무강의 신체 상태를 누구보다 정밀하게 짚어냈다. 그의 마른 손가락이 현철갑의 이음새 사이, 무강의 목덜미와 손목 혈도를 짚어 내려갔다. 맥을 짚던 갈홍의 미간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럴 수가…… 단전의 구중 금제는 여전한데, 갑옷의 압박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구려. 제갈무경과 마태강 그 비열한 개들이 장군님의 숨통을 끊기 위해 사슬을 한계까지 조여 놓았소. 이대로 가다간 단전이 터지기 전에, 물리적인 압박으로 인해 전신의 경맥이 완전히 Rot 괴사할 것이오! 지금 당장 기혈을 우회시키지 않으면 이 무릎 관절은 영구히 굳어 폐인이 됩니다!”
갑옷 압박으로 인한 경맥 폐색 위기였다. 내공을 쓸 수 없는 무강의 육체는 스스로 기혈을 정화할 수 없었고, 쇠독과 압박은 그의 척추와 골반을 서서히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고통이 뼈를 깎을 것이나, 결코 비명을 지르거나 단전의 진기를 억지로 끌어올려선 안 됩니다. 황실의 금제가 반응하면 그 즉시 단전이 파괴될 것이오.”
갈홍이 품속에서 낡았지만 기묘한 청색 빛을 발하는 ‘갈홍의 자석 침통’을 꺼냈다. 침통을 열자 그 안에 정밀하게 벼려진 수십 자루의 강철 은침이 드러났다.
일반적인 은침이나 금침은 만년한철로 주조된 현철갑의 강력한 자성(磁性)에 끌려 침 끝이 휘어지거나 궤적이 뒤틀려 급사를 유발할 수 있었다. 오직 갈홍이 가문에서 물려받은 이 특수 자석 침통 속의 강철 침만이, 갑옷의 자성을 역이용하여 미세한 관절 틈새로 미끄러지듯 침투할 수 있었다.
“장군님, 도가의 장생식(長生食)을 전개하십시오. 심장 박동을 늦추고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켜 침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무강은 묵묵히 눈을 감았다. 그는 무당파 속가제자 진무에게 배웠던 보조 호흡법인 도가 장생식의 구결을 떠올렸다.
‘숨을 세 번에 나누어 깊이 들이쉬고, 날숨을 가늘고 길게 내쉬며 전신의 모공을 연다.’
무강의 가슴팍이 미세하게 오르내리며 심장의 박동 소리가 고요해졌다. 뼛속을 찌르던 피로 골절의 통증이 장생식의 온화한 호흡에 의해 일시적으로 가라앉았다. 신체의 긴장이 풀리는 찰나, 갈홍의 손끝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갈홍은 장님이었으나, 오직 손끝의 감각과 뼈의 진동만으로 현철갑 내부의 혈도를 완벽하게 짚어냈다. 그가 자석 침통에서 길쭉한 강철 장침을 꺼내 무강의 등 뒤, 현철갑의 미세한 관절 이음새 사이로 정확히 밀어 넣었다.
스스스, 스윽.
현철갑의 강한 자성이 침을 안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갈홍은 그 인력을 역으로 이용해 침 끝의 궤적을 미세하게 비틀며 무강의 척추 옆 대저혈(大杼穴)과 도도혈(陶道穴)을 관통시켰.
“우윽……!”
무강의 전신이 반사적으로 크게 경직되었다. 내공이 봉인된 상태에서 뼈마디의 신경을 직접 찌르는 고통은 쇼크사에 준할 정도로 끔찍했다. 뼛속에 박힌 강철 침이 막혔던 경맥의 벽을 억지로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무강의 입술 틈새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오직 이빨을 악물며 도가 장생식의 호흡 주기를 유지하려 애썼다.
갈홍의 손길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등에서 시작된 침술은 어깨의 쇠독 상처 부위를 지나 무릎 관절의 음곡혈(陰谷穴)과 위중혈(委中穴)로 이어졌다. ‘갈홍의 역침맥법’이었다. 봉인된 단전의 중심 경로를 우회하여, 육체의 물리적인 가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세한 기혈의 우회로를 강제로 개척하는 비전의 의술이었다.
침이 깊숙이 박힐 때마다 현철갑의 이음새 사이로 쇠독에 오염된 검붉은 죽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지독한 유황 향과 썩은 피 냄새가 좁은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철우와 삼돌은 범무강이 겪고 있는 초인적인 고통에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무강의 이마와 턱밑으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려 현철갑 내부를 적셨다.
치익, 치익.
갑옷 내부의 뜨거운 열기가 침술에 의해 우회된 기혈의 순환을 타고 미세한 수증기가 되어 투구 틈새로 방출되었다. 마침내 갈홍이 마지막 침을 무강의 골반 관절 혈도에서 부드럽게 뽑아냈다.
“하아…… 하아……”
무강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적적인 변화였다. 뻣뻣하게 굳어 통나무 같았던 무릎 관절이 미세하게 부드러워지며, 뼛속을 짓누르던 극심한 압박감이 한결 가벼워졌다. 완전히 막혔던 우회 경맥이 활성화되면서 육체의 물리적인 가동력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이다.
갈홍은 땀에 젖은 얼굴을 무명천으로 닦아내며, 무강의 무릎 옆에 놓인 자석 침통을 조용히 거두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엄숙했다.
“우회로를 열었으나 이는 임시방편일 뿐이오. 갑옷의 물리적인 무게와 압박은 매 순간 장군님의 골밀도를 갉아먹고 있소. 근본적인 해결책은 오직 하나뿐이오.”
갈홍이 무강의 쇠사슬이 감긴 다리를 가리켰다.
“제갈무경이 품에 지니고 있는 첫 번째 황금 열쇠를 빼앗아 다리의 자물쇠를 풀어야 하오. 하체의 자유를 얻어야만 비로소 전신의 중량을 제어할 수 있는 보법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무강은 투구 속에서 눈을 감고 자신의 다리 관절을 움직여 보았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줄어들고 미세한 힘이 하체에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복수를 향한 첫걸음을 뗄 준비가 비로소 끝난 것이다.
갈홍이 마지막 침을 뽑아 침통에 밀어 넣으며, 범무강의 투구 귀가 닿는 곳으로 상체를 바짝 밀착시켰다. 그의 허연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하는 가운데, 쇳소리보다 더 낮은 충성 어린 속삭임이 무강의 고막을 두드렸다.
“장군님, 가슴의 자물쇠가 풀리기 전까지는 단전의 진기를 억지로 끌어올려선 안 됩니다. 그것이 풀려야만 봉인된 내공이 안전하게 해방될 것이오. 그전까지는 오직 육체의 힘과 중량만을 무기 삼아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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