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연판장, 음모의 실타래
허공에서 떨어지는 천근의 신형은 가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질량의 폭풍을 몰고 왔다. 단상 위에 서 있던 제갈무경의 동공이 극도로 수축되었다.
“피, 피하라!”
제갈무경이 철사강기를 발끝에 모아 뒤로 몸을 날린 순간, 범무강의 전신이 단상 한가운데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연무장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솟구쳤다. 굳건하던 목조 단상은 단 한 격에 가루가 되었고, 사방으로 비산하는 나무 파편과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제갈무경이 겨우 도약하여 지면으로 내려섰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수라장이었다.
“장군을 죽여라!”
부방주 조백이 가시 채찍을 휘두르며 다시 쇄도했다. 그의 채찍 끝에 실린 사혈공의 독기가 범무강의 찢어진 목덜미 상처를 노렸다. 혈투대장 염귀 역시 어깨 관절이 어긋난 고통을 악물며 귀두도를 비스듬히 뉘어 무강의 옆구리를 베어 왔다.
무강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할 이유도 없었다.
철컥! 콰직!
무강이 양손에 감긴 현철 사슬을 거칠게 가로저었다. 사슬이 염귀의 귀두도 칼날을 감아쥐는 동시에, 무강은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두꺼운 어깨 장갑이 조백의 가슴팍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철산고(鐵山靠).
“끄학!”
내공의 보호막이 없는 조백의 갈비뼈가 순식간에 바스러지며 내부 장기를 찔렀다. 조백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가는 찰나, 무강은 사슬에 묶여 있던 염귀를 제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천근의 압도적인 완력에 끌려온 염귀의 목덜미를, 무강의 무거운 철갑 손아귀가 움켜쥐었다.
우드득!
단 한 번의 움켜쥠이었다. 염귀의 목뼈가 모래성처럼 으스러졌다. 무강은 그 시신을 바닥에 팽개치고, 쓰러진 채 버둥거리는 조백의 가슴을 철장화로 짓밟았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철사방의 두 핵심 인물이 연무장 바닥의 진흙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참혹하고도 자비 없는 단죄였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단상 아래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제갈무경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꼈다. 일류 극성의 고수 둘이 단 수 초 만에 고기덩이로 변했다.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노예 광부들은 팽대혁의 지휘 아래 무기를 들고 철사방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제갈무경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품속의 연판장과 황금 열쇠를 움켜쥐고, 철사방 분타 대전 뒤편의 지하 금고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도망치게 두지 않는다.”
무강의 목소리가 연무장 전체를 무겁게 울렸다. 쿵, 쿵, 쿵. 발을 디딜 때마다 대지파쇄보의 진동이 대전을 향해 뻗어 나갔다. 철사방 분타 대전 지하 깊은 곳, 삼중 기관 자물쇠로 잠긴 강철 밀실인 제갈무경의 지하 금고 앞이었다.
무강이 도착했을 때, 비밀 연락책 배충이 이미 금고 문 앞에서 쇠꼬챙이를 들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장군님! 제갈무경 놈이 안쪽에서 문을 잠그고 다른 통로로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이 삼중 기관 자물쇠는 제갈세가의 정교한 기계 장치라 함부로 열었다간……!”
배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고 문틈에서 불길한 태엽 소리가 울렸다. 틱, 티틱.
“비켜라!”
무강이 배충의 덜미를 잡아 뒤로 던진 순간, 금고 벽면의 숨겨진 구멍에서 수십 발의 독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나왔다. 슝! 슝! 슝! 슝!
무강은 자신의 거구를 방패 삼아 배충과 아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깡! 까강! 날카로운 독화살들이 현철갑의 두꺼운 장갑 표면에 부딪혀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그러나 화살의 밀도가 너무 높았다. 몇 발의 예리한 화살촉이 갑옷의 어깨와 옆구리 관절 틈새, 가죽 내의가 찢어진 틈을 파고들어 무강의 살을 긁었다.
“으읍.”
살을 에는 듯한 독성이 상처를 타고 퍼졌으나, 무강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망자 구덩이에서 각성하기 시작한 그의 천생골격과 만독불침의 기틀이 체내의 독소를 무섭게 밀어내고 있었다. 다만, 미세한 쇠독 상처들이 추가로 늘어나며 전신에 찌르는 듯한 열기가 번졌다.
“자물쇠를 풀 시간이 없다.”
무강이 강철 자물쇠 장치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의 철갑 손가락이 삼중 기어의 틈새를 억지로 파고들었다. 뼛속의 금강골이 공명하며 천근력의 완력이 폭발했다.
끼이이이익! 쿠구구궁!
제갈세가의 천재 제갈문이 설계했다는 정교한 삼중 자물쇠 장치가, 범무강의 무식한 질량과 괴력 앞에서는 한낱 찌그러진 깡통처럼 뜯겨 나갔다. 두꺼운 강철 문이 통째로 일그러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부서진 금고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제갈무경은 이미 비밀 통로를 통해 귀곡 암봉 정상으로 달아난 뒤였다. 하지만 무강의 눈은 금고 구석, 일그러진 기어 장치 너머에 숨겨진 비밀 벽장을 향했다. 그는 벽장을 부수고 안쪽에서 가죽으로 꽁꽁 싸인 무거운 철제 실린더를 꺼냈다. 실린더 표면에는 황실 섭정부의 붉은 밀랍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가죽을 찢고 밀서를 꺼내 든 무강의 동공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갈무경의 지하 금고 속 밀서이자, 범씨 가문 역모 누명의 진짜 배후를 증명하는 붉은 연판장이었다.
밀서의 첫머리에는 황실 섭정 조경신의 친필 서명과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로 적힌 글귀들은 범무강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북방의 범철심이 국경 영토 매각에 관한 황실의 밀약을 눈치챘다. 범씨 가문이 군부를 규합해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는 명분을 조작하여 삼족을 멸하라. 무림맹 대장로 독고황은 현철위를 지원하여 가문의 무공 비급과 병기 제련법을 회수하고, 범무강은 현철갑에 가두어 북방 철사광산에서 서서히 말려 죽여라.]
“……아.”
무강의 이빨이 부러질 듯 맞물렸다. 투구 안쪽에서 묵묵히 참아왔던 피눈물이 흘러내려 쇠독으로 짓무른 뺨을 적셨다.
그의 아버지 범철심 장군이 대역죄인으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던 날의 비명 소리. 그의 형 범무령이 전장에서 배신당해 화살받이가 되던 날의 피비린내. 그의 여동생 수희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비녀로 목을 찌르며 자결하던 순간의 붉은 피. 그 모든 비극이, 고결한 충신이었던 가문이 황실의 영토 매각이라는 추악한 매국 음모를 덮기 위해 조작된 덫에 걸려 파멸했다는 진실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더욱이 무림의 영수라 불리던 무림맹 대장로 독고황이 섭정의 사냥개가 되어 가문의 멸문을 도왔다는 사실은 무강의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분노를 광포한 마성으로 화하게 만들었다.
“장군님! 제갈무경 놈이 귀곡 암봉의 절벽 위로 도주했습니다!”
동굴 구석에서 곰보의 급박한 전음이 들려왔다. 제갈무경은 연판장이 털린 줄도 모른 채, 마지막 황금 열쇠를 쥐고 귀곡 암봉 정상의 수성 함정으로 달아난 것이다.
무강은 붉은 연판장을 가슴 품 안쪽, 가장 단단한 심장 보호 플레이트 밑에 깊숙이 갈무리했다. 그는 품속의 작은 가죽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갈홍이 전해준 비약, 경맥 연화단이 만져졌다. 복용하는 순간 단전의 봉인을 일시적으로 풀어주지만 수명을 갉아먹는 독약. 무강은 이를 악물며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쿠르릉, 콰광!
밖으로 나서자마자 하늘이 쩍 갈라지며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먹구름이 귀곡 암봉을 집어삼킬 듯 내려앉아 있었다. 그 순간, 뼛속 깊은 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조백의 가시 채찍에 찢겼던 무릎 관절 상처와, 방금 전 금고에서 맞은 독화살의 미세한 독소들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폭우와 결합하여 최악의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전신의 뼈마디가 얼어붙고 근육이 돌처럼 굳어가는 극심한 쇠독 통증이 무강의 거구를 덮쳤다.
“으, 읍……!”
무강은 비틀거리며 굳어가는 무릎을 짚었다. 천근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사지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감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귀곡 암봉의 험준한 절벽 길을 올려다보았다. 정상에는 제갈무경이 쳐둔 마지막 함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신을 마비시키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무강은 이글거리는 황금빛 안광으로 어둠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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