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검의 서명 서약
어둠이 짙게 깔린 낙안현의 밤은 고요하다 못해 음산했다. 마교 소교주 독고운이 은자 열 냥을 남기고 붉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은 시각, 팔도익스프레스 임시소의 낡은 마구간 지붕 위로 기괴한 금속성 안광이 번뜩였다.
사천당가의 방계 약탈자이자 기계 공학자인 당철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기와 틈새로 대장간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마당 구석에 주차된 주황색 삼륜 자전거, ‘번개호’에 고정되어 있었다. 철수의 대장간에서 영석 합금으로 마개조되어 은은한 광택을 내뿜는 그 자전거는 당철의 눈에 천계의 신물이자 공간을 가르는 축지 보패로 보였다.
“흐흐흐, 공간 대종사인지 뭔지 하는 놈이 고작 이런 허름한 마구간에 천계의 보패를 방치해 두다니. 오늘 밤 이 철마는 내 손에 떨어질 것이다.”
당철은 소리 없이 마당으로 착지했다. 그는 품속에서 사천당가의 기계 공학 기술로 특수 제련된 전설의 무쇠 기계 톱 ‘적염’을 꺼냈다. 무림의 그 어떤 단단한 쇠사슬도 단숨에 잘라버린다는 명기였다.
그는 번개호의 뒷바퀴와 프레임을 굳건히 묶고 있는 검은색 U자형 강철 자전거 락으로 다가갔다. 대남이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채워둔 현대식 고강도 특수 합금 자물쇠였다.
“흥, 조잡한 흑쇠 고리 따위, 3초 만에 썰어주마.”
당철은 기계 톱의 손잡이를 당겨 고속 회전 톱날을 작동시켰다. *위이이잉!* 미세한 진동음과 함께 적염의 톱날이 U자형 자물쇠 표면에 닿았다.
*깡-!!!*
어둠을 찢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사방으로 붉은 불꽃이 폭발하듯 튀었다. 하지만 잘려 나간 것은 자물쇠가 아니었다.
*바지직! 콰직!*
당철이 아끼던 특제 기계 톱 ‘적염’의 고속 회전 톱날이 현대의 고탄소강 열처리 기술로 다져진 자물쇠의 무식한 경도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부러져 나갔다. 부러진 톱날 파편들이 당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마당 구석구석으로 흩어졌다.
“이, 이럴 수가……! 내 적염이 이빨 하나 내지 못하고 부러지다니! 이 검은 고리는 대체 무슨 물질로 주조된 것이냐? 설마 전설로만 전해지던 천외현철(天外玄鐵)의 잠금 보패란 말인가!”
당철은 전율했다. 천외현철의 방어막을 건드렸다는 공포와, 자물쇠 내부의 도난 경보 센서가 미세하게 깜빡이는 붉은 빛을 보고 기겁한 그는 부러진 쇠톱날 파편들을 수거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엉금엉금 기어서 담벼락 너머로 도망쳤다.
***
다음 날 아침, 눈부신 햇살이 마구간 자취방의 틈새로 쏟아졌다.
“아, 잘 잤다. 근데 삭신이 쑤시네.”
대남은 기지개를 켜며 평상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독고운에게 받은 은자 열 냥을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당으로 나선 대남의 눈에 바닥에 흩어진 은빛 쇳조각들이 들어왔다.
“아니, 어떤 미친놈들이 남의 집 마당에 쓰레기를 버리고 간 거야? 이거 자전거 바퀴에 밟히면 타이어 펑크 난다고! 튜브리스 통가죽 타이어라도 쇠붙이는 피해야지.”
대남은 투덜거리며 빗자루로 부러진 쇠톱날 파편들을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자전거 번개호의 상태를 점검했다. 다행히 U자형 자물쇠는 먼지만 조금 묻었을 뿐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역시 국산 자물쇠가 튼튼하네. 자, 오늘 배달 물량도 장난이 아니니까 빨리 출발해야지.”
대남은 스마트폰을 켜고 배달 앱을 활성화했다. 배터리 잔량은 25%. 아직 자가발전을 돌리지 못해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정파 맹주가 보낸 감시자들의 눈초리가 낙안현 대로를 향해 좁혀오고 있다는 소칠의 경고가 떠올라 마음이 급했다.
그가 배달 가방에 독고운에게 받은 비밀 서찰과 여러 상자들을 적재하고 자전거 안장에 오르려던 바로 그 순간, 마구간 사방의 대기가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맑은 아침 하늘에 붉은색 살기 어린 기류가 소용돌이치더니, 마구간 사당 마당 한가운데로 한 여인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붉은색 머리끈을 질질 매고 등에는 낡았지만 범상치 않은 제천검(祭天劍)을 멘 여인. 강호를 유랑하며 수많은 일류 고수들을 꺾었다는 오만한 천재 여검객, 임소라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대남의 주황색 유니폼과 플라스틱 헬멧을 관통하듯 쏘아보았다.
“그대가 허공을 가르고 청운문의 천년 결계를 찢어발겼다는 공간 대종사, 김대남인가?”
임소라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검기가 실려 있어, 마당의 잡초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남은 미간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았다. 배송 완료 제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단 20분.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면 일당이 깎이고 평점이 날아간다.
“아니, 아가씨. 저는 대종사 같은 거 아니고요, 그냥 평범한 택배 기사 김대남입니다. 지금 배달 가야 하니까 길 좀 비켜주세요. 바빠 죽겠는데 웬 코스프레야 진짜.”
대남은 자전거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으려 했다. 하지만 임소라는 대남의 무심한 태도를 ‘고수의 오만함’으로 해석했다.
“과연 소문대로군. 기운을 완전히 무(無)로 돌린 반박귀진의 극의에 달해 있으니, 내 살기 어린 질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강자의 위선은 거기까지다! 내 오늘 제천검법(祭天劍法)의 극의로 그대의 신비로운 축지법을 꺾고 천하제일의 명성을 증명하겠다!”
*스르릉-!*
임소라가 등에 멘 제천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이 붉은색 검강(劍罡)으로 불타오르며 사방의 대기를 찢어발길 듯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일류 최정상의 고수가 뿜어내는 붉은 검강이 대남의 자전거 앞길을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엄마야! 저거 진짜 칼이잖아! 왜 대낮부터 칼을 휘두르고 난리야!”
대남은 기겁하며 자전거 뒷바퀴를 미끄러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임소라는 이미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붉은 검강의 폭풍이 대남의 목덜미를 향해 사납게 쏟아져 내렸다.
내공이 전혀 없는 대남이 그 무시무시한 검풍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극도의 생존 본능과 감봉에 대한 공포가 대남의 뇌 세포를 초고속으로 회전시켰다.
‘뒤로 돌아서 피해야 돼!’
대남은 본능적으로 자전거 핸들을 급격하게 꺾으며 몸을 뒤로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 매달린 주황색 방수 배달 가방 뒤편의 빨간색 ‘야간 배달용 반사판 플레이트’가 붉은 아침 햇살과 임소라의 검강 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깡-!!!*
기묘한 물리적 타격음과 함께, 임소라가 뿜어낸 붉은 검강의 기운이 자전거 반사판 표면의 미세 유리구슬 프리즘 공법에 부딪혔다. 현대 과학의 정밀한 광학 설계는 들어온 빛의 각도를 백 배의 강도로 원래 주인에게 그대로 되돌려보내는 ‘반사판 되돌리기’ 기술을 물리적으로 완성해 냈다.
임소라가 쏘아 보낸 제천검법의 붉은 검 기운이 반사판의 정밀한 입사각과 반사각 계산에 의해 굴절되어, 정확히 그녀의 눈앞을 향해 거대한 섬광 폭풍으로 역류해 날아갔다.
*번쩍-!!!*
“앗……! 이, 이것은……!”
임소라는 눈이 멀 듯한 강력한 섬광과 함께 자신의 검강 기운이 그대로 자신에게 꺾여 돌아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검을 거두고 신법을 전개해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반사된 검 기운의 여파로 그녀의 붉은 머리끈이 끊어져 바람에 날려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제천검을 쥔 채 대남을 바라보았다. 자전거 반사판 표면에는 미세한 열화 흠집 자국이 생겼을 뿐, 대남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인과율을 왜곡하여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되돌려보내는 인과반사(因果反射)의 법보……! 내 제천검법의 붉은 검강을 단 한 번의 몸짓도 없이, 오직 등 뒤의 붉은 보패(반사판)만으로 정밀하게 튕겨내다니! 과연 공간을 다스리는 대종사답도다!’
임소라의 오만한 눈빛이 경악과 깊은 경외심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대남은 반사판에 스크래치가 난 것을 보고 속이 쓰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야! 너 미쳤어?! 이거 다이소에서 어렵게 구한 반사판인데 기스 내면 어떡해! 너 때문에 배송 시간 다 늦었잖아! 나 오늘 이거 제시간에 완료 못 하면 일당 깎이고 평점 테러당해서 원래 세계로 못 돌아간다고!”
대남은 다급하게 자전거 핸들에 장착된 스마트폰을 켜고 배달 앱의 서명란 화면을 활성화했다. 액정의 붉은색 터치 서명 박스가 아침 안개 속에서 은은한 금빛 백라이트를 내뿜으며 번쩍였다. 대남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임소라의 코앞에 거칠게 들이밀었다.
“싸우기 싫으면 여기 서명이나 하라고요! 오늘 아침 배달 완료 서명 안 해주면 나 진짜 잘린단 말이야! 평점 깎이기 싫으니까 빨리 손가락 대!”
임소라는 대남이 내민 스마트폰 액정의 붉은색 서명란을 바라보았다. 그 화면은 그녀의 눈에 고대 전설로만 내려오던 ‘천도의 비석 조각’이자, 영혼을 구속하는 절대적인 ‘천도의 인과 서약 서판’으로 보였다.
‘대종사께서 나에게 천도의 서약을 제안하시는구나. 내 검을 가볍게 튕겨내어 굴복시키고, 평생의 인과를 묶을 서약서에 지장을 찍으라 하심이다. 이것이 바로 강호의 숨은 절대자가 제자를 거두는 방식인가!’
임소라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녀는 제천검을 검집에 꽂고, 엄지손가락에 내력을 실어 스마트폰의 붉은색 터치 서명란에 꾹 눌러 지장을 찍었다.
*띠링-!*
“배달 완료! 평점 5점 만점 감사합니다!!!”
경쾌한 스마트폰의 알림음이 고요한 마구간 마당에 울려 퍼졌다. 대남은 화면에 뜬 평점 5점 별표를 보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안도감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살았다. 오늘도 내 일당과 신용도를 지켰어.”
대남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전거를 출발시키려 할 때, 임소라가 대남의 앞바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천검의 임소라, 천도의 서약을 완료하였소. 서약이 성사되었으니, 오늘부터 이 임소라의 제천검은 대종사님의 자전거 뒤편을 지키는 그림자가 되겠나이다. 그대의 배달 길을 가로막는 그 어떤 정파와 사파의 무리도 내 제천검법으로 베어 넘기겠소.”
“네? 아니, 그냥 배달 완료 사인만 해주면 되는데…… 왜 제 자전거 뒤를 쫓아다닌다는 거예요? 저기요, 아가씨? 저 사생활 침해는 사절인데요?”
대남은 황당하여 턱을 빠뜨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임소라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단단했다. 그녀의 등 뒤로 정파 맹주가 보낸 밀정들의 차가운 기운이 숲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임소라의 손이 즉시 제천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대남은 이 해괴한 여검객이 자신을 평생 스토킹할 기세를 보이자 등 뒤로 식은땀이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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