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독불침 주황색 옷의 기적
혈랑의 검 끝에서 피어오른 검붉은 독안개가 대남의 주황색 유니폼을 향해 폭풍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붕 위에서 급강하하며 독공을 전개한 일류 자객 혈랑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전개한 흑월독공(黑月毒功)의 정수, 혈련독(血蓮毒)은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문드러지고 뼈가 녹아내리는 극독 중의 극독이었다. 아무리 내공을 숨긴 절세 고수라 할지라도, 이 자욱한 독안개를 정면으로 뒤집어쓰고 멀쩡할 인간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았다.
“흐흐흐, 녹아내려라! 네놈이 자랑하는 천상의 법의(法衣)와 함께 시궁창의 썩은 물로 변하거늘!”
혈랑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착지해 단검을 거두었다. 그의 눈앞은 이미 검붉은 독무로 가득 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잠시 후면 안개가 걷히고, 뼈만 남은 주황색 괴물의 잔해가 바닥에 뒹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독안개 한가운데에서 들려온 것은 고통에 찬 비명도, 살이 녹아내리는 기괴한 파열음도 아니었다.
“아, 진짜! 이 미친놈이 길바닥에서 뭘 터뜨린 거야?! 냄새 존나 구리네 진짜!!!”
독안개 속에서 울려 퍼진 것은 너무나도 카랑카랑하고 정정한, 그리고 지독하게 짜증이 섞인 현대 한국어의 비명이었다.
“쿨럭! 퉤! 야! 너 미쳤어?! 이 썩은 달걀 탄 냄새는 대체 뭐야? 길바닥에 정화조 터졌냐고! 아, 내 눈! 존나 매워!”
“……으, 으응?”
혈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분명히 ‘혈련독’을 직격으로 퍼부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폐부가 녹아 즉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저 주황색 괴물은 그저 매운 연기를 마신 동네 아저씨처럼 콜록거리며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불어 검붉은 독무가 서서히 걷히자, 혈랑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김대남은 자전거 번개호 위에 꼿꼿이 앉아, 빨간색 3M 특제 미끄럼 방지 장갑을 낀 손으로 코를 꽉 쥔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주황색 유니폼 표면에는 검붉은 독액 방울들이 어지럽게 튀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살점이 녹아내리기는커녕, 독액이 닿은 주황색 옷감은 구멍 하나 뚫리지 않고 멀쩡했다. 오히려 독액 방울들이 옷감 표면에 스며들지 못하고, 마치 연잎 위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동글동글하게 뭉치더니 땅바닥으로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대남이 장마철 폭우 속 배달을 대비해 거금을 주고 장만했던 현대 과학의 정수, ‘초강력 나노 발수 방수 코팅’ 기술 덕분이었다. 수선자들의 마법 같은 독물 액체라 할지라도, 분자 수준에서 수분을 밀어내는 현대식 불소계 나노 코팅막 앞에서는 그저 더러운 오염 물질에 불과했다. 화학적 반응 자체가 일어나지 않으니 독성이 섬유를 침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마, 만독불침(萬毒不侵)……!”
혈랑의 입술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사천당가의 가공할 부식독마저 무력화하는 전설의 신물 가죽, 만독불침 천의(天衣)가 실존했단 말이냐! 어찌 내 혈련독이 실 한 가닥조차 태우지 못하는가!”
혈랑은 공포에 질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대남의 공포와 분노는 혈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야! 너 이거 어쩔 거야! 이거 회사에서 지급한 공식 유니폼이란 말이야! 분실하거나 훼손하면 보증금에서 세탁비랑 재발급 비용으로 삼만 원이나 깎인다고! 삼만 원이 누구 개 이름인 줄 알아?! 오늘 일당 삼만 원 벌려고 이 고생을 하는데, 네가 내 일당을 날려?!”
대남은 유니폼 가슴팍에 묻은 검은 얼룩을 바라보며 눈이 뒤집혔다. 짠돌이 생계형 라이더에게 있어, 회사 보증금에서 돈이 깎이는 것은 무림맹주의 선전포고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었다. 대남은 분노로 허벅지 근육을 바르르 떨며 자전거 핸들을 꽉 쥐었다.
“이 날강도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오늘 배송 완료 시간 10분밖에 안 남았는데 길을 막는 것도 모자라 옷까지 버려?!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대남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돌진하려 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혈랑이 단검을 치켜들고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으아악! 죽어라, 사파의 괴물 놈아!”
혈랑이 독기를 뿜어내며 대남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찔러왔다. 일류 자객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매섭게 쇄도했다.
“엄마야!”
막상 칼날이 정면으로 날아오자 대남은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자전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움크리는 동시에, 등 뒤에 메고 있던 주황색 방수 배달 가방을 방패막이 삼아 몸을 비틀었다.
*콰아앙-!*
혈랑의 단검이 대남의 주황색 가방 표면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쇠가 부딪히는 둔탁한 파열음이 골목길을 흔들었다. 혈랑은 이번에야말로 가방을 찢고 대남의 심장을 꿰뚫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단검 끝에서 느껴진 것은 푹신하면서도 질긴, 기묘한 탄성이었다.
가방 내부에는 철수가 보강해 둔 알루미늄 프레임과 함께, 대남이 물건 파손 방지를 위해 꽉꽉 채워두었던 현대식 충격 흡수재인 에어캡, 일명 ‘뽁뽁이’ 수백 장이 들어있었다. 수만 개의 미세한 공기 주머니들이 압력을 사방으로 분산시키며 단검의 운동 에너지를 완벽하게 흡수해 버린 것이다.
*뽁! 뽁! 뽁-!*
가방 안쪽에서 경쾌한 공기 터지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혈랑의 단검은 가방 표면을 뚫지 못하고 무력하게 미끄러져 튕겨 나갔다.
“이, 이럴 수가! 내 강철 단검이 어찌 가죽 가방 하나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간단 말이냐! 가방 전체가 호신강기로 둘러싸여 있단 말인가!”
혈랑이 경악하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찰나, 대남은 살기 위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빨간색 3M 특제 미끄럼 방지 장갑을 낀 손을 뻗어, 눈앞에서 허둥대는 혈랑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꽉-!*
합성고무 NBR 코팅이 선사하는 극한의 마찰력이 혈랑의 손목 가죽에 완벽하게 밀착되었다. 기름이나 이슬이 묻어도 절대 미끄러지지 않는 작업용 장갑의 사기적인 그립력 앞에, 일류 자객의 날렵한 탈출 신법은 무용지물이었다. 손목을 빼내려던 혈랑은 마치 자신의 손목이 거대한 강철 집게에 물리듯 고정되자 비명을 질렀다.
“크헉?! 손목이…… 손목 경맥이 막혔다! 내공이 흐르지 않아!”
사실 내공이 막힌 게 아니라, 단지 고무 장갑의 무식한 마찰력 때문에 살가죽이 밀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혈랑의 뇌리는 이미 대남을 ‘역천의 고수’로 규정하고 있었기에 모든 현상이 무공의 극의로만 해석되었다.
“이 더러운 날강도 새끼야! 저리 가라고!!!”
대남은 매일같이 20kg짜리 생수 묶음을 계단으로 나르며 단련된 무식한 팔뚝 힘을 다해, 잡고 있던 혈랑의 손목을 앞으로 세차게 밀쳐냈다.
*파아앙-!*
내공은 단 한 톨도 실리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완력이었지만, 무게 중심을 잃고 당황한 자객을 날려버리기에는 충분했다. 혈랑의 신형은 대남의 밀치기 한 방에 낙엽처럼 붕괴되며 허공을 날아 골목길 구석의 진흙탕 속으로 처참하게 처박혔다.
“꺼흑!”
진흙을 한 움큼 들이마신 혈랑은 헐떡거리며 대남을 바라보았다.
대남은 자전거 번개호 위에 고고하게 앉아, 주황색 유니폼에 묻은 독액 얼룩을 장갑 낀 손으로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검붉은 독액은 발수 코팅 덕분에 흔적도 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려, 옷감은 처음처럼 깨끗하고 선명한 주황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온갖 마공과 독물이 판치는 강호에서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절대자의 풍모와 같았다.
‘만독불침의 법의…… 만타불침의 배달 가방…… 그리고 무공의 기운을 완전히 감춘 채 맨손으로 칼날을 잡는 무형의 장갑까지…….’
혈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상대하려 했던 존재는 일류 자객 따위가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 자는 이미 화경을 넘어 신선의 반열에 오른 은거 대종사였다.
“괴, 괴물이다……! 천계의 신선이 강림했다!”
혈랑은 더 이상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부러진 손목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며 골목길 구석의 담벼락을 넘어 정신없이 도망쳤다. 자객으로서의 자존심과 기개는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야! 거기 안 서?! 내 세탁비 물어내고 가, 이 미친놈아!!!”
대남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혈랑의 검은 그림자는 이미 골목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아, 진짜 짜증 나네! 냄새는 또 왜 이 모양이야. 이거 오늘 퇴근하고 빨래방 가서 뜨거운 물로 삶아야겠네. 삶으면 주황색 물 빠져서 점장 영감탱이한테 혼나는데…….”
대남은 코를 훌쩍이며 스마트폰 화면을 주시했다.
[알림: 배송 완료 예정 시간까지 남은 시간 8분]
“악! 8분밖에 안 남았잖아! 이럴 때가 아니야!”
대남은 세탁비 걱정을 뒤로한 채, 자전거 번개호의 페달을 미친 듯이 밟기 시작했다. 세 바퀴 자전거는 골목길 바닥에 평평하게 으스러진 철질려 파편들을 다시 한번 밟으며, 청아 소저가 기다리는 목적지를 향해 광속으로 질주해 나갔다.
같은 시각, 낙안현 중심가의 대형 기와집.
흑풍상단주 팽무적은 초조하게 주판을 튕기며 혈랑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손목이 부러진 혈랑이 방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상, 상단주님……!”
“혈랑! 어찌 된 일이냐?! 그 주황색 괴물의 목은 가져왔는가? 수레는 부수었어?”
혈랑은 바닥에 대가리를 박으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불, 불가능합니다! 그 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제 혈련독을 정면으로 맞고도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는 만독불침의 괴물입니다! 게다가 맨손으로 제 단검을 움켜쥐고 제 손목 경맥을 단숨에 비틀어 버렸습니다! 그 자는…… 천계에서 내려온 기계종사임이 틀림없습니다!”
“뭐, 뭐라고……?!”
팽무적의 손에서 황금 주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일류 자객 혈랑마저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패배했다면, 무력으로 그 주황색 괴물을 막아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팽무적은 부러진 주판알을 바라보며 이빨을 부르르 떨었다.
“만독불침에 외가기공의 대종사라…… 그렇다면 무력으로는 그놈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군. 하지만 내 이대로 낙안현의 상권을 통째로 빼앗길 수는 없다!”
팽무적의 눈빛이 음흉하고 잔인하게 번뜩였다.
“무공으로 이길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할지라도 관청의 법률과 세금 폭탄 앞에서는 꼼짝 못 할 터! 최포교를 불러오너라. 그 주황색 괴물의 수레를 불법 무허가 상행위로 압수하고, 가설 창고를 통째로 폐쇄해 버리겠다!”
팽무적은 팔도익스프레스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릴 새로운 음모를 구상하며 비열하게 웃기 시작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