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성운 속으로
추락하는 선체 내부로 경보음이 비명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브루노 사령관의 궤도 포탑이 두 번째 핏빛 섬광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엔진 출력 복구 안 돼! 제어 계통이 완전히 타버렸어!”
조종간을 움켜쥔 제이콥이 거칠게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의 시각 보조 신경 칩이 쉴 새 없이 붉은색 경고 신호를 연산해 내고 있었다. 좌측 장갑이 용융되면서 흘러든 초고열의 열기가 조종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실바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하고 있었고, 함선 인공지능 ‘윈드’의 경고음은 점점 더 낮고 절망적인 주파수로 변해갔다.
선우는 콘솔을 움켜쥔 왼손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은빛 피가 제어 회로의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뇌 신경이 타버릴 것 같은 전자기적 과부하가 그의 척추를 타고 뇌하수체를 사정없이 난사했다. 피를 각혈할 때마다 입안에서 느껴지던 비릿한 쇠 맛조차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경보. 궤도 요새의 광역 중력 차단막이 행성 탈출 궤도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하이퍼드라이브 기동 불가능.]
브루노 사령관은 고대의 수송선이 이대로 대기권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르카디아-0의 얼어붙은 대지 위로 추락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선우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두운 조종실 내부에서 찬란하게 일렁였다.
“제이콥, 조종간을 우측 45도로 꺾어라. 대기권 하강 기류를 타고 낙하 속도를 가속으로 전환한다.”
“예? 미쳤습니까! 이 속도에서 더 가속하면 선체가 대기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분해됩니다!”
“제국의 장갑판은 그 정도 마찰에 무너지지 않는다. 나를 믿고 꺾어라!”
선우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황태자로서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제이콥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종간을 우측으로 거칠게 꺾었다. 동시에 선우는 자신의 마스터 링을 제어 콘솔 깊숙이 밀착시켰다.
‘하이퍼드라이브 정밀 궤도 연산식, 기동.’
그의 뇌리 속에서 천재 함선 설계사 노아가 제시했던 고대 제국의 천체 물리학 공식들이 은빛 수식의 폭포가 되어 쏟아졌다. 수억 개의 소행성 파편과 성운의 밀도 분포도가 가상 3D 그래프로 그의 망막 위에 투사되었다. 뇌의 연산력을 99% 이상 함선 컴퓨터 보조에 사용하는 순간, 선우의 청각과 시각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오직 전자기적 데이터의 흐름만이 그의 우주를 채웠다.
선우는 자신의 뇌 신경을 우주선의 엔진 코어에 직접 링크했다. 보조 엔진 하나가 영구 반파되었지만, 잔여 엔진의 출력을 비대칭으로 정렬하면 중력 차단막의 왜곡된 경계면을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보였다. 그는 소행성 파편들이 밀집한 기류의 틈새로 함선을 유도했다.
그때, 조종실 메인 스크린에 지지직거리는 강력한 전자기 노이즈와 함께 통신 피드가 강제로 연결되었다. 스크린 너머로 나타난 얼굴은 선우의 가슴속 분노를 끓어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3등 심문관 바르토였다. 아틀라스의 레일건 포격에 철제 가면이 반파되어, 가면에 가려져 있던 오른쪽 얼굴의 흉측한 상처와 광기에 찬 붉은 의안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부서진 가면 틈새로 피를 흘리면서도, 바르토는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선우를 노려보았다.
“거기서 죽어라, 이단자놈! 대교황 성하의 영광을 더럽힌 대가는 너희 모두의 완전한 포맷뿐이다!”
바르토의 독설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는 차갑게 읊조렸다.
“시끄럽다, 꼭두각시여.”
선우는 마스터 링의 주파수를 가동하여 통신 주파수 고스트 노이즈 위장 기술을 펼쳤다. 에테르-플라이어의 전자기 방출 신호가 순식간에 불규칙한 우주 배경 소음 파형으로 변환되었다. 바르토의 광기 어린 얼굴이 노이즈 속으로 일그러지더니, 이내 통신 피드가 완전히 끊겨 나갔.
동시에 브루노 사령관의 요새에서 발사된 두 번째 붉은 레이저 광선이 함선이 방금 전까지 추락하던 허공을 관통했다. 제이콥의 변칙 기동과 선우의 전자기 위장이 빚어낸 완벽한 기만이었다. 적들의 광학 센서 조준선들이 갈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매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제이콥! 하이퍼드라이브 점화!”
선우가 수동으로 연산해 낸 완벽한 도약 좌표가 제이콥의 조종간으로 다이렉트 전송되었다.
“성운 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이콥이 도약 레버를 끝까지 당겼다.
에테르-플라이어의 후방 엔진이 푸른색 에테르 불꽃을 뿜어내며 공간을 찢었다. 함선은 장엄한 은빛 섬광과 함께 대기권을 돌파하여, 아르카디아-0의 궤도를 벗어나 붉은빛의 거대한 가스 지대인 사이렌 성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
스으으윽—.
붉은 가스 장막이 함선을 감싸 안는 순간, 추격해 오던 교단 순양함들의 레이더와 통신 신호가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극심한 전자기 간섭을 일으키는 사이렌 성운은 함선들의 무덤이자, 교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함선 내부에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붉은 경고등이 꺼지고 은은한 푸른색 비상 조명이 켜졌다.
“탈출…… 성공한 겁니까?”
실바가 바닥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밖의 붉은 가스 구름을 바라보았다. 제이콥 역시 조종간에서 손을 떼며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선우는 조종석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전신을 덮쳐오는 극심한 오한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툭.
그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은빛 피가 다시 한번 흘러내렸다. 왼손 손가락 끝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고, 미세한 은빛 회로 패턴이 그의 손목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치명적 경보. 마스터 링의 과도한 연산 피드백으로 인해 신경 세포 기계화 진행율 급증.]
[현재 나노 침식률 (Nano Corrosion Limit) 15% 돌파. 1단계 신경계 마비 증상 발현.]
선우는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콘솔 옆에 놓인 수동 급수 장치에서 물을 한 컵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은 그저 차가운 액체로 흘러내릴 뿐, 혀끝을 자극하던 생명의 감각은 완벽하게 거세되어 있었다. 뇌 세포 기계화의 시한부 한계가 마침내 그의 육체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각을 잃었군…….’
선우는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며 깊은 고독감을 느꼈다. 천 년 전 제국인들은 모두 소멸했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왜곡된 후손들만이 가득한 이 차가운 우주에서, 자신은 기계가 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허무주의와 두려움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 따뜻한 손길이 그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전하……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제 손을 잡으세요.”
민아였다. 그녀는 뺨에 묻은 먼지도 닦지 못한 채,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선우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선우의 굳어가던 손가락 끝으로 미세하게 스며들었다.
“레나 의사 선생님이 가르쳐 준 호흡법을 기억하세요. 뇌파를 낮춰야 해요. 제 전자기 스캐너 주파수를 전하의 호흡에 맞출 테니, 깊게 숨을 들이쉬세요.”
민아는 선우의 척추 포트에 손을 대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가 신경 수복 명상법을 가이드하기 시작했다. 선우는 그녀의 따뜻한 체온에 의지하며 눈을 감았다. 심장 박동을 인위적으로 늦추고, 뇌파 진동수를 델타파 대역으로 하강시켰다. 폭주하던 혈관 속 나노 머신들이 그녀의 가이드에 따라 서서히 휴면 상태로 가라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우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의 손끝에 서서히 옅은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비록 미각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자아의 붕괴는 간신히 저지한 상태였다. 민아는 안도한 듯 그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살아남았네요, 우리.”
선우는 그녀의 손을 조용히 맞잡으며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고독한 시한부 영웅의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인간성의 끈이었다.
그때, 제이콥이 전방 유리창 너머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소리쳤.
“어이, 다들 저 앞을 좀 봐! 붉은 가스 장막이 걷히고 있어!”
선우와 민아가 고개를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사이렌 성운의 붉은 가스 장막 너머로, 수억 개의 폐기된 우주선 잔해들과 소행성 파편들이 거대한 고리 모양으로 뒤엉켜 있는 기괴하고 장엄한 무법지대의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도피처이자, 지하 저항군이 숨어 있는 네뷸라 정크야드의 경계선이었다.
하지만 그 장관을 바라보던 선우의 망막 UI 상에 갑작스러운 노이즈가 폭발했다. 시야가 일시적으로 붉은색 노이즈로 덮이며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우흑……!”
선우는 바닥에 손을 짚으며 다시 한번 차가운 은빛 피를 각혈했다. 눈앞의 무법지대 전경이 붉은 핏빛 너머로 기괴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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