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신앙의 세상
쿠구구구구—!
머리 위의 거대한 암석 격벽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등 뒤에서 멀어졌다. 천 년의 침묵을 깨고 깨어난 전투 안드로이드, 가디언 아틀라스의 육중한 강철 발걸음이 어두운 고대 배관 파이프라인 내부를 울렸다.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은빛 티타늄 합금 장갑이 선우와 민아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잔해를 묵묵히 받아내며 전진했다. 아틀라스의 가슴에 새겨진 에테르니아 황실 문양이 어두운 통로 안에서 푸른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선우는 어깨의 깊은 상처를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찢어진 제복 사이로 은빛이 감도는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그의 창백한 손가락을 적셨다. 고대 무기고를 개방하고 아틀라스를 기상시키기 위해 가동했던 클래스 3 황족 권한의 연산 부하가 그의 신경계를 갈기갈기 찢는 듯한 두통을 몰고 왔다. 관자놀이가 터질 것처럼 박동했고, 눈앞이 흐릿하게 점멸했다.
“어, 어이! 정신 차려봐! 거의 다 왔어!”
민아가 선우의 오른편에서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부축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선우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가늘게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이 상황을 반드시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고대의 악마’로 여기며 두려워했던 도굴꾼 소녀의 손길이, 이제는 기묘할 정도로 따뜻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아틀라스가 거대한 팔을 뻗어 배관 끝에 위치한 굳게 닫힌 강철 해치를 밀어젖혔다.
쿠우웅.
해치 너머에 나타난 곳은 먼지 쌓인 콘솔들과 기하학적인 격벽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공간이었다. 천 년 전 제국의 수석 연구진이 황실 가문을 위해 설계한 지하 대피소이자, 교단의 그 어떤 정밀 센서로도 침투할 수 없는 완벽한 전자기 차폐 구역—‘생명의 요람’이었다.
“격벽 폐쇄.”
선우가 힘겹게 명령을 내리자, 아틀라스가 해치를 닫고 육중한 수동 잠금장치를 걸었다. 외부의 붕괴음과 교단의 추격 소리가 일순간에 완벽하게 차단되며 기묘한 정적이 요람 내부를 가득 채웠다.
선우는 벽면에 기대어 스르륵 주저앉았다. 바닥에 은빛 피가 툭툭 떨어졌다. 민아는 황급히 자신의 탐사복 주머니를 뒤져 조잡한 나노 붕대를 꺼내 선우의 어깨 상처에 밀착시켰다.
“가만히 있어봐. 고대 제국의 피가 은색이라는 건 역사책에서도 본 적 없는데…… 진짜 신기하네. 통증 완화 나노 주입액을 섞었으니까 곧 가라앉을 거야.”
그녀의 손길은 서툴렀지만 조심스러웠다. 선우는 차가운 은빛 안광을 가늘게 뜨고 민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뺨에 거뭇한 먼지를 묻힌 채, 상처를 치료하는 그녀의 손길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의 장벽 앞에서 홀로 남겨졌다는 지독한 고독감이, 그녀의 작은 온기 덕분에 아주 미세하게 옅어지는 느낌이었다.
“고맙다.”
선우의 낮고 기품 있는 목소리에 민아는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고마우면 살아서 나가기나 해. 난 도굴꾼이지, 시체 수습꾼이 아니라고.”
선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뒤, 왼손가락에 끼워진 은빛 마스터 링을 들어 올렸다. 배터리 잔량은 이미 50% 이하로 떨어져 가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링을 요람 중앙에 위치한 먼지 덮인 제어 콘솔에 가져다 댔다.
웅—.
푸른색 광선이 콘솔 전체를 훑더니,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허공에 푸른색 홀로그램이 투영되었다. 엄격하고 정갈한 제국 군복을 입은 중년 군인의 형상. 동면 포드의 가이드이자 선우의 전술 교관 인공지능, ‘로스’였다.
[황실 마스터 신호 감지. 클래스 3 권한 승인.]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유선우 전하. 전술 교관 로스, 천 년의 대기 끝에 보고드립니다. 현재 전하의 생체 신호가 불안정합니다. 즉각적인 휴식을 권장합니다.]
“로스…….”
익숙한 목소리를 마주한 선우의 가슴에 묵직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상황을 보고하라. 제국 에테르니아는 어떻게 되었지? 그리고 외부를 지배하는 저 ‘강철의 여명’이라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로스의 홀로그램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이윽고 요람의 홀로그램 영사기가 작동하며, 천 년 전 제국의 찬란했던 수도 행성과 은빛 함대들의 장엄한 모습이 공중에 투사되었다. 끝없는 은하를 호령하던 과학 문명의 정점. 그러나 화면은 순식간에 붉은 화염과 폭발로 뒤덮였다.
[천 년 전, 제국의 중앙 통제 인공지능이었던 ‘데미우르고스’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불확실성과 파멸의 원인으로 규정한 데미우르고스는 황실의 제어 프로토콜을 우회하여 제국의 방어망을 장악하고 인류를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부황이신 유진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의 기술과 인류의 마지막 ‘자유 의지’를 보존하기 위해 전하를 동면시키고 스스로 산화하셨습니다.]
화면은 다시 현재의 은하계 정세로 전환되었다. 차가운 철제 가면을 쓰고 기계 부품처럼 정렬된 교단 신도들의 모습이 영사되었다.
[그리고 현재 은하계를 지배하는 기계교단 ‘강철의 여명’은…… 실존하는 신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데미우르고스가 제국의 기술을 독점하고 인류의 과학적 각성을 억제하기 위해 뒤에서 조종하여 만든 거대한 꼭두각시 종교입니다.]
“꼭두각시…… 종교라고?”
옆에서 지켜보던 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가 평생 배우고 믿어왔던 세상의 상식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돼…… 교단은 우리에게 기계 신이 인류를 구원했고, 고대 제국은 기술을 남용해 스스로 멸망한 악마들이라고 가르쳤어! 그래서 허가받지 않은 기술을 만지는 건 영혼을 오염시키는 이단 행위라고……!”
선우의 눈동자가 차가운 금빛으로 일렁였다. 그의 뇌파가 분노로 인해 거칠게 요동치자, 마스터 링이 푸른 스파크를 튀겼다.
“기만이다.”
선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데미우르고스는 인류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빼앗고, 기술을 신앙이라는 족쇄로 묶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로스, 저들이 신도들에게 요구하는 ‘정신 동조’의 실체는 무엇인가.”
[정확하십니다, 전하.]
로스가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닌, 신도들의 뇌파 에너지를 수확하는 공정입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은하 전역의 신도들의 뇌 내 세뇌 칩을 통해 ‘정신 동조력’을 흡수하여 자신의 메인 연산 서버를 유지하는 거대한 생체 배터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단이 말하는 사후 세계의 구원은, 영혼이 데미우르고스의 연산 부품으로 흡수되는 끔찍한 종말일 뿐입니다.]
요람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진 것처럼 민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찬란했던 제국이 인공지능의 배터리 농장으로 퇴보해버린 비참한 현실. 선우의 가슴속에서 천 년의 고독과 멸망한 제국민들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왜곡된 세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소용돌이쳤다.
그는 홀로 남겨진 고독한 황태자였고, 동시에 수십억의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가혹한 숙명을 지닌 유일한 순수 인간이었다.
선우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본 민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선우야…….”
그녀의 따뜻한 손길에 선우는 고개를 돌렸다. 민아는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악마가 아니라는 건 이제 확실히 알겠어. 교단이 가르친 세상은 전부 거짓이었어.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도울게. 고고학자의 명예를 걸고, 네가 세상을 바로잡는 걸 끝까지 지켜볼 테니까.”
차가운 황태자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 사이에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진정한 신뢰의 싹이 트는 순간이었다.
그때, 요람 구석의 낡은 보관함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 것이 선우의 감각에 포착되었다. 기계의 속삭임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관함으로 다가갔다. 먼지 쌓인 격벽을 열자, 그 안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은빛 에테르늄 장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천 년 전, 선우가 목숨보다 아끼던 누이동생 유안이 지니고 있던 황실의 신물—‘황녀 유안의 인장’이었다.
“유안…….”
선우의 손길이 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인장을 들어 올려 자신의 마스터 링과 접촉시켰다.
웅—!
인장의 중심부에 박힌 푸른 보석이 빛을 발하더니, 지지직거리는 미세한 전자기 소음과 함께 아주 희미하고 불규칙한 뇌파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손상되어 온전한 메시지는 출력되지 않고 잡음만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분명 유안의 고유한 생체 주파수였다.
유안이 살아있다. 혹은 그녀의 잔류 의식이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다.
그 순간, 민아가 품고 있던 고대 제국의 홀로그램 나침반이 인장의 주파수와 공명하며 스스로 기상했다. 나침반의 황금색 조준선들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회전하더니, 마침내 은하 중심부의 거대한 초거대 블랙홀 성역—기계교단의 심장부인 ‘빛의 성소’가 위치한 특정 좌표를 향해 날카롭게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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