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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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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칼날이 대기를 가르며 소리 없이 짓쳐오는 순간, 선우는 굳어버린 은빛 왼손을 들어 올렸다.


찰나의 초침이 멈춘 듯한 극도의 침묵 속에서, 침묵의 기사단장 그레이엄의 붉은 외눈 렌즈가 살의로 번뜩였다. 그가 쥔 나노 절연 하이퍼 소드는 우주의 모든 소음과 주파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기괴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선우는 본능적으로 마스터 링의 오버라이드 신호를 방출하려 했으나, 그의 망막 UI에는 가혹한 시스템 경고만이 붉은색 노이즈로 흩어질 뿐이었다.


[경고: 무선 제어 신호 송출 불능. 적 무기의 완전 절연 장막으로 인해 모든 해킹 주파수가 강제 굴절됩니다.]


무선 해킹이 통하지 않는다. 교단이 선우의 전자기 해킹 패턴을 완벽히 분석하여 보낸 최종 병기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침식률 15.3%를 돌파하여 왼쪽 손가락부터 손목까지 은빛 금속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선우의 왼손은, 방전되어 차갑게 식어버린 마스터 링과 함께 허공에 무력하게 묶여 있었다.


검은 칼날이 선우의 목덜미를 베어 가르기 직전, 육중한 은빛 거구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3미터 거구의 수호 안드로이드, 아틀라스였다. 아틀라스는 자신의 거대한 티타늄 합금 소드를 비스듬히 치켜세워 그레이엄의 절연 소드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초고밀도 티타늄과 나노 절연 합금이 충돌하는 순간, 귀를 찢는 듯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사방으로 청색 스파크가 폭풍처럼 비산했다.


"황태자 전하를 해할 수 없다."


아틀라스의 인공지능 코어에서 무겁고 기계적인 경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단 한 마디의 대꾸도 없이, 전신 개조율 80%의 초인적인 반사 신경으로 신체를 회전시켰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끊어지는 프레임처럼 기괴하고 빨랐다. 기계교단 최정예 암살자 특유의 '고스트 스텝'이었다.


스으윽.


검은 칼날이 아틀라스의 대검 표면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왔다. 칼날이 스치는 곳마다 아틀라스의 은빛 장갑이 종이처럼 찢겨 나가며 붉은 유압유와 불꽃이 튀었다.


"아틀라스! 동기화 포격을 가해라!"


뒤로 밀려난 선우가 각혈을 참아내며 뇌파로 사격 명령을 송출했다. 선우의 금빛 눈동자가 조준경 형상으로 변하며 그레이엄의 흉부를 정조준했다. 아틀라스의 오른쪽 어깨에 장착된 대형 레일건이 자동으로 회전하며 선우의 시선 끝을 록온하려 했다.


위이이잉—!


하지만 레일건의 조준선이 그레이엄의 신체에 닿는 순간, 그레이엄의 슈트 표면에서 강력한 주파수 난반사 장막이 가동되었다.


[경고: 목표물의 전자기 차단막으로 인해 동조 조준선 록온 실패. 오차율 85% 초과.]


쿠웅!


아틀라스의 레일건 포격이 격발되었으나, 록온이 빗나간 포탄은 그레이엄의 잔상만을 관통한 채 도크 천장의 거대한 빙하 격벽을 직격했다. 무너져 내린 얼음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며 시야를 가리는 혼란 속에서, 그레이엄의 검은 칼날이 아틀라스의 무방비한 왼쪽 관절을 향해 사선으로 그어졌다.


스콰아아악—!


"……아아앗!"


민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레이엄의 하이퍼 소드가 아틀라스의 왼쪽 어깨 관절을 완벽하게 절단해 냈다. 육중한 티타늄 합금 왼팔이 붉은 유압유를 폭포처럼 뿜어내며 빙하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반파된 아틀라스의 거구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고, 그레이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 끝을 돌려 선우의 심장을 향해 짓쳐왔다.


피할 수 없다. 아틀라스의 방패는 무너졌고, 선우의 육체는 마비와 누적된 피로로 한 걸음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바스 아저씨의 희생을, 제국의 마지막 불씨를 여기서 꺼뜨릴 수는 없다.'


선우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부황 유진 황제의 마지막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마라.'


선우는 자신의 척추 포트에 이식된 고대 나노 커넥터를 강제로 폭주시키며, 뇌 신경망의 모든 빗장을 완전히 풀어헤쳤다.


'신경 가속 연산(Bullet Time), 가동.'


지이이이잉—!


선우의 마스터 링과 척추를 연결하는 나노 회로망이 백색의 고열을 내뿜으며 그의 뇌에 강렬한 미세 전류 자극을 가했다. 시냅스의 전달 속도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기계적인 연산 속도와 동조하는 순간, 우주 전체가 기묘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뚝. 뚝.


천장에서 떨어지던 빙하 녹은 물방울들이 허공에서 투명한 보석처럼 멈춰 섰다. 아틀라스의 잘려 나간 어깨에서 튀어 오르던 불꽃들이 주황색 불씨가 되어 허공에 정지했다. 그레이엄의 검은 칼날 역시 선우의 가슴팍 10센티미터 앞에서 고체처럼 멈춰 서 있었다.


시간이 100배로 느려진 세계였다.


"크윽…… 하아……."


선우는 타들어 가는 듯한 뇌의 통증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신경 가속 연산의 대가로 그의 뇌세포 수십만 개가 실시간으로 괴사하고 있었다. 그의 코와 입에서 비릿한 은빛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차가운 빙하 바닥을 적셨다. 망막 위의 나노 침식률 수치가 미친 듯이 치솟고 있었다.


이 멈춰버린 찰나의 시간 속에서 그레이엄을 무력화해야 했다. 선우는 마비된 왼쪽 손목의 고통을 무릅쓰고, 살아있는 오른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틀라스의 잘려 나간 왼팔 전선을 움켜쥐었다.


파지직거리는 스파크 전선 끝에는 여전히 아틀라스의 메인 발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고전압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선우는 그 전선을 그레이엄의 발밑 빙하 바닥으로 강하게 내던졌다.


'전도성 전자기장 형성.'


얼음 바닥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유압유와 수분이 전선의 스파크와 접촉하자, 그레이엄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고전압 전자기 덫이 형성되었다.


그레이엄의 80% 기계화된 신체 센서가 이 급격한 전자기적 변화를 감지했는지, 멈춰진 시간 속에서도 그의 붉은 외눈 렌즈가 미세하게 떨리며 회피 기동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덫은 작동하고 있었다.


선우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레이엄의 흉부 중앙, 그의 메인 동력 코어가 위치한 강철 피갑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방전되어 차갑게 식어 있던 왼손의 마스터 링을 그의 가슴팍에 직접 밀착시켰.


무선 해킹이 불가능하다면, 직접 접촉하여 나의 생체 에너지를 폭주시키는 물리적 EMP뿐이다.


"꺼져라, 교단의 사냥개여."


선우가 마음속으로 외침과 동시에, 마스터 링의 물리적 전자기 충격을 영거리에서 격발시켰다.


콰아아아앙—!


선우의 왼손가락에서 시작된 백색의 전자기 펄스(EMP)가 그레이엄의 흉부 코어를 직격했다. 전도성 전자기 덫에 묶여 회피 기동이 차단된 그레이엄의 전신 장갑이 미친 듯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청색 불꽃을 뿜어냈다.


파지직! 파직!


그레이엄의 전신 사이보그 회로가 영거리 EMP의 무자비한 고전압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일시에 마비되었다. 그의 검은색 절연 슈트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살의로 가득했던 붉은 외눈 렌즈의 불빛이 지지직거리며 완전히 암전되었다.


[적 전신 시스템 다운. 일시 마비 시간: 3초.]


신경 가속 연산이 해제되며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선우는 극심한 연산 피드백으로 인해 시야가 완전히 핏빛으로 물든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코와 귀에서 흘러내린 은빛 피가 그의 창백한 얼굴을 더럽혔다.


"선우 씨!"


민아가 달려와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마비된 그레이엄의 전신 회로가 비상 백업 전원을 켜며 미세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단 3초가 지나면 저 괴물은 다시 움직일 터였다.


그때, 한 팔을 잃은 반파된 가디언 아틀라스가 남은 오른팔로 그레이엄의 전신을 뒤에서 강하게 껴안았다. 아틀라스의 메인 코어가 붉게 과부하를 일으키며 울렸다.


"황태자 전하, 이륙하십시오. 제국의 친위대는 영원히 전하의 길을 지킵니다."


"아틀라스…… 안 된다!"


선우가 손을 뻗으려 했으나, 아틀라스는 그레이엄을 꽉 움켜쥔 채 도크 아래로 몸을 던졌다.


쿠구구구구궁—!


반파된 가디언과 마비된 기사단장이 얽힌 채, 북극 빙하 도크의 어둡고 깊은 지하 밑바닥으로 함께 추락해 내려갔다. 얼음 절벽 아래에서 들려오는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그들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선우 씨, 서둘러야 해요! 아틀라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민아가 울부짖으며 선우를 에테르-플라이어의 열린 탑승 해치 안으로 강제로 끌고 들어갔다. 조종석에는 이미 탈영병 파일럿 제이콥이 조종간을 꽉 쥔 채 대기하고 있었다.


"엔진 예열 완료! 이륙합니다!"


제이콥이 조종 레버를 당기자, 에테르-플라이어의 고대 메인 엔진이 굉음을 지르며 점화되었다. 푸른색 에테르 섬광이 빙하 도크 전체를 밝히며, 함선은 무너져 내리는 얼음 장벽들을 뚫고 대기권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탈출의 희열은 찰나에 불과했다.


함선이 대기 상공에 도달하는 순간, 수송선 AI '윈드'의 비상 경보음이 조종실 전체를 붉은 조명으로 물들였다.


위이이이잉—!


[비상 경보: 궤도 상공의 교단 순양함 '여명의 빛'호 감지. 궤도 폭격 주포 충전율 100% 도달.]

[목표 좌표 설정: 정크야드 주 거주구 게토-9 및 에테르-플라이어 예상 궤도.]


화면 너머, 궤도 요새에서 발락 사령관의 냉혹한 명령이 흐르는 듯했다. 교단의 거대 순양함이 정크야드 행성 자체를 조준하고, 이단자들과 선우를 한꺼번에 증발시키기 위한 파멸적인 붉은 광선을 발사하기 직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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