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돌려주마
스며나오는 녹색의 안개가 터널의 철골을 스치자, 쇠가 녹아내리는 기괴한 소리가 어둠 속을 채웠다.
치익, 치이익.
지하 폐광의 낡은 격벽 표면이 녹색 안개에 닿는 순간, 거품을 일으키며 하얗게 끓어올랐다. 천장에서는 산성에 용해된 합금 액체가 독액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바닥의 고철 더미에 떨어질 때마다 매캐한 염화수소 가스가 피어올라 생존자들의 목을 조여왔다.
"콜록! 쿨럭! 으아악! 내, 내 의수가……!"
뒤를 따르던 게토-9 자치위원회 피난민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 그의 오른쪽 어깨에 이식되어 있던 투박한 철제 의수(개조 등급 1단계)의 접합부에서 치직거리는 불꽃이 튀었다. 고농축 나노 부식 독가스가 기계 의수의 납땜과 구리 전선망을 실시간으로 녹여버리고 있었다. 기계의 관절이 부식되어 툭툭 끊어질 때마다 주민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밀폐된 지하 폐광 터널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했다. 이단 추적 특수기동대 '아이언 이글'의 대장 킬러가 폐광의 모든 비상 환기구를 차단하고 살포한 가스였다.
유선우는 입가에 묻은 은빛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방금 전 정비창 도크에서 목격한 늙은 정비사 바스의 장렬한 자폭의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가슴 품속에 들어 있는 바스의 수제 정밀 렌치가 그의 살결을 차갑게 누르고 있었다.
'바스 아저씨의 희생을 허사로 만들 수는 없다.'
선우는 차가운 분노를 억누르며 굳어가는 이성을 다잡았다. 귓가에는 머릿속 나노 머신들이 보내는 경고음이 이명처럼 울리고 있었다.
[경고: 착용자의 뇌 신경망 나노 침식률 15.3% 돌파. 왼쪽 손목 신경 완전 마비 가동. 과도한 연산 시 자아 붕괴 위험 존재.]
이미 그의 왼쪽 손가락 전체는 촉각을 상실한 채 차가운 은빛 금속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스터 링은 배터리가 0%로 완전히 방전되어 손가락에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무선으로 주변 기계를 해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우 씨…… 콜록! 공기가……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민아가 선우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그녀의 영리하던 눈동자는 눈물과 독가스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가스를 들이마실 때마다 가냘픈 몸이 발작하듯 떨렸다.
선우는 주저 없이 오른팔을 뻗어 민아를 제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혈액 속에 상주하는 황실 전용 메디컬 나노 군집의 제어 프로토콜을 뇌파로 강제 활성화했다.
'나노 독소 자가 정화(Nano-toxin Self-Purification), 가동.'
선우가 숨을 내쉬는 순간, 그의 입술과 콧구멍 주위로 미세한 은빛 나노 입자들이 안개처럼 분사되었다. 은빛 입자들은 공기 중에 퍼져 있던 녹색의 부식 가스 분자들과 접촉하자마자 격렬한 화학적 중화 반응을 일으키며 가스를 무해한 회색 재로 변환시켰.
스으으읍.
선우의 전자기 차폐 망토가 민아를 감싸 안으며, 선우를 중심으로 반경 1미터 내에 얇고 투명한 은빛 전자기 정화막이 형성되었다. 정화막 내부로 깨끗한 산소가 유입되자 민아는 선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하아, 하아…… 선우 씨……."
"내 품에서 떨어지지 마라. 정화 장치가 가동할 수 있는 범위는 1미터가 한계다."
선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차가웠다. 그의 혈액 속 메디컬 나노 머신들이 가스를 정화하느라 미친 듯이 연산하며 스스로를 태워버리고 있었다. 이 치료법은 그의 수명을 실시간으로 갉아먹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때, 폐광 터널 앞쪽의 어둠 속에서 기괴한 붉은색 외눈 렌즈 불빛들이 번뜩였다.
아이언 이글 특수기동대의 정예 보병들이었다. 그들은 가스 면역 방독 마스크와 야간 투시경을 착용한 채, 소리 없이 어둠을 틈타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이단자들을 발견했다. 황태자는 생포하고, 나머지는 즉각 처형하라."
치직거리는 무전기 소음`과 함께 플라즈마 소총의 충전음이 어둠을 찢었다.
"아틀라스! 플라즈마 캐논으로 벽을—!" 민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뒤를 지키던 3미터 거구의 가디언 아틀라스가 캐논을 조준하려 하자, 선우가 차갑게 제지했다.
"사격을 중지해라, 아틀라스. 이 폐광의 천장은 수백 년 동안 방치되어 극도로 불안정하다. 플라즈마 포격의 충격파가 전달되는 순간, 천장 전체가 무너져 내려 피난민들이 매몰될 것이다."
물리적인 화력 전투는 불가능했다. 가스를 마시는 시간만 늘릴 뿐이었다. 적들의 야간 조준선이 선우의 가슴팍을 겨누는 찰나, 선우는 뇌파를 미세하게 조율했다.
'전자기 공명 해독술(Whisper Decode), 기동.'
선우의 눈동자가 차가운 금빛으로 점멸했다. 그의 귓가에 정적을 깨고 적들의 무선 통신 주파수가 미세한 전자기 소음의 형태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적 사제들의 뇌 내 세뇌 칩과 헬멧 무전기 사이를 흐르는 암호화 주파수가 이진법 데이터로 해독되어 선우의 망막에 적들의 3D 위치 좌표로 실시간 투사되었다.
'우측 모퉁이에 둘, 좌측 잔해 뒤에 셋.'
선우는 민아를 품에 안은 채 차폐 망토의 은폐 주파수를 순간적으로 최대치로 과부하 폭주했다.
지이이잉—!
망토에서 방출된 고밀도 전자기 노이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야간 투시경`과 열화상 스캐너를 켜고 선우를 조준하던 적 보병들의 바이저 화면이 일제히 적색 노이즈로 덮이며 먹통이 되었다.
"으악! 센서가 다운됐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
적들이 당황해 허공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사이, 선우는 소년 길잡이 타일러를 향해 나직하게 명령했다.
"타일러, 지리를 안내해라. 이 가스를 배출할 고대 환기 장치로 가야 한다."
"이, 이쪽이에요! 제 수제 지도에 따르면 고대 제국의 배관망이 터널 중앙부 하부에 묻혀 있어요!" 크고 헐렁한 재킷을 입은 주근깨 투성이 소년 타일러가 가스를 마셔 기침을 하면서도 날렵하게 벽면의 좁은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선우는 차폐 망토로 피난민들을 덮으며 어둠 속을 기동했다. 적들의 포위망을 우회하여 중앙 통제소로 향하는 침투 전술이었다. 그러나 가스를 정화하느라 메디컬 나노가 급격히 고갈되면서, 선우의 몸속에 심각한 역류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두통이 뇌를 쪼개는 듯했고, 입안에서는 끊임없이 비릿한 은빛 피가 배어 나왔다. 무엇보다 그의 왼손 끝에서 시작된 차가운 마비 감각이 손등을 타고 손목 방향으로 무섭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피부가 은빛의 금속 질감으로 변하며 딱딱하게 굳어가는 부작용이었다.
"선우 씨, 손이…… 손이 차가워지고 있어요!" 민아가 선우의 손을 잡으며 비명을 지르듯 속삭였다.
선우는 대답할 힘조차 아끼며 오직 앞을 향해 걸었다. 마침내 그들은 폐광 중앙의 거대한 강철 격벽 앞에 도달했다.
"여기예요! 이 배관 틈새 안쪽에 희미하게 빛나는 고대 제국의 문양이 있어요!" 타일러가 먼지를 닦아내며 소리쳤.
과연 낡은 철골 배관 틈새에서 천 년 전 제국의 에테르 비상 조명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산하며 숨겨진 제어 터널 입구를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입구를 여는 제어 콘솔에 도달한 순간, 선우의 나노 침식률 경고등이 망막 위에서 파멸적으로 깜빡였다.
[나노 침식률 15.3% 돌파. 왼쪽 손목 신경 완전 마비 가동.]
선우는 격벽을 열기 위해 마스터 링을 낀 왼손을 콘솔에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나 그의 왼손은 이미 손가락 끝부터 손목까지 완전한 은빛 금속 상태로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강철 손가락은 콘솔의 미세 생체 주파수를 인식할 수도, 코드를 수동 입력할 수도 없었다.
치이익—!
그 사이, 뒤편의 터널 모퉁이 너머에서 녹색의 독가스가 소용돌이치며 그들의 마지막 안전지대까지 무섭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남은 산소는 기껏해야 3분 분량이었다.
"비켜라, 민아."
선우는 굳어가는 은빛 손목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감각이 죽어버린 왼손 대신, 그는 살아있는 오른손을 뻗어 자신의 품속 깊은 곳을 뒤졌다. 손끝에 닿은 것은 투박하고 묵직한 강철의 촉감이었다.
바스가 마지막 순간 해치를 닫으며 던져주었던 기름때 묻은 수제 정밀 렌치였다.
선우는 오른손으로 렌치를 꽉 쥐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고대 제국의 푸른 광채가 흐르는 환기 제어 장치의 전면 장갑판 틈새에 렌치의 날카로운 끝을 밀어 넣었다.
끼이이이익—!
녹슨 쇠와 고밀도 합금이 마찰하며 귀를 찢는 비명이 터널 내부에 울려 퍼졌다. 감각이 마비된 왼팔을 지렛대 삼아 렌치 위로 온 체중을 실었다. 그의 창백한 이마에 핏대가 솟구쳤고, 입술 틈새로 은빛이 감도는 붉은 피가 다시 한번 울컥 배어 나왔다.
콰아앙!
수백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제어 장치의 전면 장갑판이 렌치의 무자비한 물리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그 내부에는 천 년의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복잡한 광섬유 케이블과 고대 나노 회로망이 미세한 에테르 전류를 흘리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타일러, 이 기계의 비상 전도 노드를 찾아라. 붉은색 구리선이 아닌, 투명한 나노 도선이어야 한다."
"이, 이쪽이에요! 콘솔 하부에 은색 빛이 흐르는 얇은 전선이 있어요!"
타일러가 가리킨 곳에는 제국의 고유 주파수가 미세하게 흐르는 은빛 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선우는 주저 없이 렌치 끝으로 제어 콘솔의 메인 퓨즈 박스를 강제로 파괴했다. 파지직! 청색 스파크가 그의 오른손을 태우며 튀었지만, 선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방전되어 싸늘하게 식어 있는 왼손가락의 마스터 링을 뜯어낸 제어선 뭉치에 직접 밀착시켰다.
무선 해킹이 불가능하다면, 물리적인 회로 합선과 생체 전도뿐이었다.
"민아, 내 오른손을 잡아라. 내가 연산을 시작하면 전자기 역류가 일어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놓지 마라."
민아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선우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선우의 차가운 오른손을 타고 들어오는 순간, 선우는 뇌 신경망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헤쳤다.
'다중 기계 동시 제어 프로토콜(Multi-Machine Simultaneous Control Protocol), 가동.'
'다중 타깃 체인 오버라이드(Multi-Target Chain Override), 연계.'
선우는 자신의 뇌파를 수십 개의 가닥으로 분할하여, 제어 콘솔 내부의 고대 에테르 전송망으로 직접 투사했다. 마스터 링의 배터리가 0%였기에, 연산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는 그의 생체 나노 머신과 뇌 신경 세포를 직접 연소시켜 수급해야 했다.
쿠구구구구—!
선우의 온몸에 푸른색 에테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의 눈동자가 찬란한 금빛으로 폭발하듯 일렁였고, 그의 창백한 피부 아래로 흐르는 혈관들이 은빛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병렬 연산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만 개의 바늘이 동시에 뇌를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고, 그의 코와 입에서 비릿한 은빛 피가 쏟아져 내려 콘솔 바닥을 적셨다.
"선우 씨! 피가……!"
"방해하지 마라!"
선우가 호령했다. 그의 의식은 이미 물리적 육체를 벗어나 폐광 지하 전체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환기 배관망 내부로 침투해 있었다.
그의 은빛 피가 닿은 콘솔에서 시작된 황금색 나노 전류가 뜯겨 나간 전선을 타고 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배관 내부의 녹슨 회로망을 타고 흐르며, 잠들어 있던 수십 개의 고대 환기 팬 모터에 도달했다.
[황족 생체 데이터 감지. 클래스 3 권한 임시 승인.]
[폐광 구역 비상 환기 팬 36기, 오버라이드 제어권 획득.]
그 순간, 저 어둠 너머에서 무전기를 들고 있던 특수기동대장 킬러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자기 공명 해독술을 통해 선우의 뇌리로 흘러들어왔.
- 대장! 환기 제어 장치에서 이상 고주파가 감지됩니다! 누군가 시스템을 강제 오버라이드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놈들. 늦었다."
선우가 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뇌파로 최종 명령을 내리눌렀.
"역회전(Reverse Rotation), 격발."
우우우웅—!
지하 폐광 전체가 무겁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정지해 있던 거대한 고대 강철 환기 팬 36기가 동시에 굉음을 지르며 회전을 멈췄다. 금속이 마찰하는 거대한 불꽃이 배관 내부를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1초 뒤.
콰콰콰콰콰—!
환기 팬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연산 출력으로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터널 내부의 공기 흐름이 물리적으로 뒤틀렸다. 피난민들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출구 방향이 아닌, 적들이 포위하고 있는 터널 입구 방향으로 무섭게 쏠리기 시작했다.
사방에 가득 차 있던 녹색의 고농축 나노 부식 가스가 역풍을 타고 배관 내부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배관의 배출구를 타고, 적 보병들이 밀집해 있는 포위 구역을 향해 엄청난 압력으로 역송출되기 시작했다.
"아, 악! 가스가…… 가스가 역류한다!"
"환기 밸브를 잠가라! 당장 수동으로 차단해!"
적들의 비명이 무전기 주파수를 타고 선우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킬러가 수동 레버를 당겨 밸브를 잠그려 하자, 선우는 냉혹하게 미소 지었다.
"자폭해라."
선우가 밸브 제어 모터에 나노 과부하 신호를 주입했다.
펑! 펑! 펑!
배관 곳곳의 수동 밸브 모터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고열의 불꽃과 함께 융합되어 고정되었다. 물리적인 차단은 이제 불가능했다.
"으아아악! 내 방독 마스크가…… 마스크가 녹아내린다!"
"살려줘! 몸이…… 몸이 녹아—!"
고농축 부식 가스의 무자비한 산성력은 적들의 표준 방독면과 티타늄 장갑복조차 견디지 못했다. 가스에 휩싸인 아이언 이글 기동대 보병들은 자신들의 살점이 기계 의체와 함께 녹아내리는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 단 발마디 비명만을 남긴 채 차례로 쓰러져 갔다. 자신들이 준비한 치명적인 덫에 스스로가 걸려 파멸한 것이다.
가스가 완전히 걷히고 깨끗한 산소가 폐광 내부를 채우자, 피난민들은 기적적인 생존에 감격하며 선우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 만세!"
"악마가 아니야…… 진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선우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콘솔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뇌 신경의 과부하로 인해 그의 시야가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가래 끓는 소리를 삼키며 차갑게 명령했다.
"서둘러라. 적들의 본대가 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선우는 민아의 부축을 받으며 열린 격벽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일러가 앞장서서 비밀 통로를 안내했다. 그들은 붕괴하는 폐광 구역을 벗어나, 한스가 알려주었던 북극 빙하 아래 비밀 탈출 도크를 향해 차가운 터널을 질주했다.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의 벽면이 흙먼지 대신 푸른빛을 발산하는 단단한 만년설과 얼음 장벽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지하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천 년 동안 완벽한 보존 상태로 대기하고 있던 고대 황실 전용 수송선, 에테르-플라이어(Ether-Flyer)가 칠흑 같은 위용을 자랑하며 도크 중앙에 안착해 있었다.
"살았다…… 진짜 탈출선이 있어!" 민아가 기쁨에 가득 차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이 에테르-플라이어의 탑승 ramp를 향해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조종실 해치 입구의 짙은 얼음 그림자 속에서 차가운 기척이 일어났다.
서늘하고, 완벽하게 거세된 살의.
그림자 속에서 한 사내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전신을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 절연 장갑 슈트로 감싸고, 얼굴을 단 하나의 붉은색 외눈 렌즈 마스크로 가린 기괴할 정도로 길고 날렵한 체구의 전사.
대교황 직속 최정예 암살 부대 '침묵의 기사단' 단장, 그레이엄이었다.
그의 전신 개조율은 80%에 달해 생체 온기도, 심장 박동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레이엄은 말없이 자신의 등 뒤에서 자루를 쥐고 검을 뽑아 들었다.
서서히 흘러나오는 검은색 에너지가 주변의 모든 미세 주파수를 빨아들이듯 진동했다. 선우의 나노 해킹과 오버라이드 신호를 원천 차단하는 특수 절연 병기, 나노 절연 하이퍼 소드(Nano-Insulated Hyper Sword)였다.
그레이엄의 붉은 외눈 렌즈가 선우의 왼손에 끼워진 방전된 반지를 향해 고정되었다. 그의 마스크 너머로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기계 합성음이 흘러나왔.
"황태자 유선우. 너의 주파수 패턴은 이미 분석 완료되었다. 해킹은 무용하다. 목을 내놓아라."
그레이엄이 선우의 나노 해킹을 완벽히 차단하는 나노 절연 하이퍼 소드를 뽑아 들고, 은빛 안광을 번쩍이며 선우를 향해 소리 없이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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