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고독, 깨어난 마지막 불씨
치익—!
밀폐되어 있던 가압 밸브가 열리며 차가운 백색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서리가 낀 유리창 너머로 천 년 동안 굳어 있던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선우는 눈을 떴다.
허파 깊숙한 곳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자,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 쿨럭!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이 얼어붙은 대기 속에서 하얗게 흩어졌다. 온몸의 근육은 동결 수면의 여파로 마치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억겁의 무게를 드는 것처럼 버거웠다.
“동면…… 해제 프로토콜 완료. 생체 신호 안정화 단계 진입.”
머릿속에서 기계적이고 차가운 전자 음성이 울렸다. 천 년 전, 그가 잠들기 직전까지 황실 교관으로서 자신을 지도했던 인공지능 ‘로스’의 잔류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끊어졌다. 동면실을 유지하던 비상 발전기의 수명이 다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선우는 창백하게 질린 손으로 포드 가장자리를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은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로 쓸려 내려왔다. 낡은 황실 제복 위로 덮인 먼지와 녹슨 나노 합금의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주변을 둘러본 그의 눈동자에 깊은 고독과 상실감이 스쳐 지나갔다.
사방이 녹슨 이끼와 부식된 금속 격벽으로 뒤덮인 이곳은 고대 제국 에테르니아의 황실 묘지 행성, ‘아르카디아-0’의 지하 깊은 곳에 숨겨진 동면실이었다. 찬란했던 제국의 문양은 바래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를 보좌하던 수많은 시종과 호위병들의 포드는 차갑게 식어 파손되어 있었다.
혼자였다. 제국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때, 부황인 유진 황제가 자신을 강제로 이 포드에 밀어 넣었던 마지막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
‘선우야, 살아남아라. 인간의 자유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마라.’
그 무거운 유언을 되새기며 입술을 깨물 때였다.
바스락.
고요한 무덤 속에서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이질적인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기계의 구동음이 아니었다. 거친 숨소리와 먼지 더미를 밟는 인간의 발소리였다.
선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아직 동면 부작용으로 신경계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뇌파는 주변의 미세한 전류 흐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제국의 황족들이 지녔던 선천적 감각 특이점, ‘기계의 속삭임 청취’ 능력이었다. 저 어둠 너머에서 불안정하게 진동하는 소형 배터리의 주파수가 느껴졌다.
“세상에…… 진짜로 고대 유적이 작동하고 있잖아? 신호 발신지가 이 안쪽이라고?”
앳된 목소리였다.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한 손에 조잡하게 개조된 주파수 스캐너를 든 젊은 여성이었다. 먼지가 가득 묻은 탐사복을 입고 갈색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아르카디아 도굴꾼 길드 소속의 고고학 학도, 민아였다.
민아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다, 마침내 열려 있는 동면 포드와 그 안에 앉아 있는 선우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를 뻔하며 뒤로 자빠졌다.
“억……! 사, 사람?! 고대 유적에서 산 사람이 나온 거야?!”
그녀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구형 탐사 도구를 치켜세우며 선우를 향해 조준했다. 스캐너에서 푸른색 스캔 광선이 뿜어져 나와 선우의 신체를 훑으려 했다.
그 순간, 선우의 몸속에 흐르는 황실 유전자가 반응했다.
“무례하도다.”
선우의 낮고 기품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의 뇌파가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공기 중의 나노 입자들을 자극했다. 민아의 스캐너에서 뿜어져 나오던 스캔 광선이 선우의 생체 전자기 장막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지지직—!
“앗, 뜨거워!”
민아는 스캐너 손잡이에서 발생한 강력한 역전류 스파크에 깜짝 놀라 도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스캐너는 연기를 내뿜으며 완전히 마비되어 먹통이 되어 버렸다. 선우가 그녀의 장비를 순간적으로 역해킹하여 무력화한 것이었다. 민아는 겁에 질린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너, 너 정체가 뭐야?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교단의 사제도 아니면서 어떻게 기계를 조종해?”
“마법이 아니다. 그저 조잡한 주파수를 교정했을 뿐.”
선우는 포드 밖으로 천천히 발을 디뎠다. 몸이 휘청였지만, 황태자로서의 오만한 기품은 잃지 않았다.
“질문은 내가 한다. 지금이 몇 년도인가? 제국 에테르니아는 어떻게 되었지?”
선우의 질문에 민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선우의 가슴을 무겁게 내려앉혔다.
“에테르니아? 그건 천 년 전에 멸망한 신화 속의 악마 제국이잖아……! 지금은 위대한 기계 신을 모시는 기계교단 ‘강철의 여명’이 은하계를 지배하는 시대라고!”
천 년.
선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시간의 장벽은 너무나도 차갑고 거대했다. 제국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기계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광신도 교단이 차지하고 있었다. 문명은 퇴보했고, 기술은 신앙이라는 이름 하에 독점되어 민중을 지배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제국의 유산을 확보해야 했다.
선우는 동면 포드 하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비밀 홈이 존재했다. 오직 황실의 마스터 유전자만이 열 수 있는 생체 잠금장치였다. 선우가 홈에 손을 대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바늘이 돋아나 피 한 방울을 채취했다.
[황실 유전자 인증 성공. 클래스 4 - 황태자 마스터 권한 승인.]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홈이 열리며,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제국의 정수이자, 주변의 모든 기계를 해킹하고 강제 제어할 수 있는 열쇠인 ‘황실 마스터 링’이었다.
선우가 반지를 왼손가락에 끼우는 순간, 반지가 그의 신경망과 직접 연결되며 착용자의 혈액 속 나노 입자들과 무섭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웅—!
링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푸른 광채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어두웠던 지하 묘지의 벽면을 따라 고대 제국의 나노 회로들이 살아난 실핏줄처럼 푸른빛으로 요동치며 불을 밝혔다. 잠들어 있던 수백 마리의 아르카디아 청소 드론들이 대기 모드에서 깨어나 미세한 기계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이롭고 장엄한 광경이었지만, 동시에 파멸의 서막이었다.
“아…… 안 돼.”
선우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링의 가동과 함께 발생한 강력한 고주파 에너지 파동이 동면실의 격벽을 뚫고, 아르카디아-0 행성의 대기권을 넘어 우주 허공으로 거침없이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천 년 동안 닫혀 있던 황실의 마스터 신호가 전 은하계에 송출되는 ‘각성의 신호’가 발동된 것이었다.
“제발, 멈춰라……!”
선우는 급히 링의 출력을 제어하여 신호 방출을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천 년의 동면 여파로 뇌파가 극도로 불안정했다. 뇌 신경망에 가해지는 과부하로 인해 그의 손끝이 일시적으로 차갑게 얼어붙으며 제어 명령이 튕겨 나갔다.
지직, 지지직!
신호는 이미 우주 너머로 퍼져 나간 뒤였다.
그 순간, 아르카디아-0 행성의 정적을 감시하며 궤도 상공을 돌고 있던 기계교단의 초거대 감시 위성 AI, ‘사우론-X’의 거대한 붉은색 외눈 렌즈가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경보. 아르카디아-0 구역에서 승인되지 않은 고대 황실 프로토콜 감지. 클래스 4 마스터 신호 확인. 이단 심문소에 실시간 좌표 전송 개시.]
우주 전체의 포식자가 도망자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지하 동면실의 비상 조명들이 일제히 붉은색 경고등으로 전환되며 격렬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묘지의 무거운 침묵을 산산조각 냈다. 민아는 사방에서 울리는 경보음에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기계교단의 위성이 우리를 찾아낸 거야?!”
선우는 입술을 깨물며 붉게 타오르는 동면실의 콘솔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기계 제어 모드로 전환되며 차가운 금빛으로 일렁였다.
그때, 묘지 깊은 곳의 어두운 통로 너머에서 기분 나쁜 전자기 노이즈와 함께, 강철 발톱이 바닥을 긁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계교단 이단심문소가 자랑하는 무자비한 사냥개, ‘켈베로스-04’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며 좁은 지하 묘지를 피비린내 나게 뒤흔들었다.
추격자들이 문턱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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