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장막
붉은색 수색 레이더 불빛이 투기장의 모래밭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채준의 안면을 똑바로 비추었다.
“지이이잉— 치익!”
오른손목에서 터져 나오는 기분 나쁜 전자기 마찰음이 채준의 고막을 찔렀다. 오 영감이 온갖 고철을 기워 만든 수제 수명 보존 시계의 전면 유리는 이미 거미줄처럼 쩍 갈라진 상태였다. 균열의 틈새로 푸른색 스파크 노이즈가 튀며 가죽 장갑을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경고: 작동 오차율 42.1% 초과]
[경고: 지연 리미터 계측 불가]
[남은 수명: 13시간 26분 04초]
백건우를 쓰러뜨린 대가는 가혹했다. 금기의 호흡인 오버클록의 여파로 가슴뼈 안쪽의 ‘딜레이 포켓’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장기를 구워대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부분은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세어버렸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는 촉각이 완전히 사멸해 힘없이 덜덜 떨렸다. 숟가락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오른손의 감각 마비는 대검을 쥐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쿨럭!”
채준이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왼손으로 훔쳐냈다. 갈비뼈의 미세 골절 부위가 숨을 쉴 때마다 찌르는 듯한 극통을 유발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무너진 원형 철창 사방을 포위한 제국 집행부대의 서치라이트가 먼지 구름을 가르며 어지럽게 교차했다.
“반역자 신채준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저항하는 쥐새끼들은 현장에서 즉시 수명을 적출한다!”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집행관들의 차가운 기계 음성이었다. 사방에서 으르렁거리는 사이보그 사냥개들의 톱니 기어 돌아가는 소리가 지옥의 서곡처럼 울렸다. 관람석에 있던 ‘하루살이’ 주민들은 이미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다 집행관들의 고압 전류 채찍에 가로막혀 짐짝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채준은 무너진 투기장 고철 더미 뒤로 몸을 깊숙이 숨겼다.
지금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였다. 수명 보존 시계의 전면 유리가 깨져 지연 한계치를 정확히 계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능력을 과도하게 썼다간, 가슴속에 갇힌 물리적 타격들이 한 번에 역류해 전신 세포가 파열되어 즉사할 터였다.
그때, 쇠비린내 나는 바람을 타고 가녀린 신음소리가 채준의 고막에 걸려들었다.
“으윽... 흑...”
채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3시 방향, 무너진 철골 대들보 잔해 틈새였다. 낡은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다리가 깔린 채 겁에 질려 울부짖고 있었다.
진우였다.
13구역의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며 채준의 뒤를 쫓아다니던 꼬마 정보원. 소년의 뺨은 눈물과 흙먼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뼈만 앙상한 다리는 무거운 강철 빔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수거대 일반 대원 세 명이 전자기 소총을 겨눈 채 진우가 숨은 잔해 방향으로 천천히 수색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제국의 검은색 하프 슈트와 붉은색 고글을 착용한 그들의 군화 소리가 규칙적으로 모래를 밟았다.
“이쪽에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는 것 같은데.”
말단 대원 하나가 전자기 소총의 조준경을 진우의 머리 방향으로 가져갔다. 붉은색 레이더 조준선이 진우의 야구모자 위를 스쳤다. 진우가 공포에 질려 입을 틀어막았지만, 덜덜 떨리는 호흡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오른손의 마비된 손가락으로는 대검을 휘두를 수 없다. 하지만 왼손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 영감이 남긴 마지막 유산, 소리와 진동을 지연시키는 금기의 유틸리티 기술이 있었다.
채준은 왼손을 뻗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적막의 장막(Shroud of Silence). 기동.’
공간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채준을 중심으로 반경 3미터 이내의 공기가 푸른빛 물결처럼 출렁이더니, 이내 기괴한 돔 형상의 장막이 그 주변을 덮었다.
순식간에 소리가 사라졌다.
수로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멀리서 포효하는 사냥개들의 엔진음, 집행부대의 확성기 소리까지. 장막 내부로 들어오는 모든 공기의 진동과 주파수가 시간의 주머니 속에 갇혀 완벽하게 무화되었다. 침묵조차 무겁게 짓누르는 절대적인 무음의 영역.
채준은 그림자처럼 무음의 장막을 이끌고 진우를 향해 접근하는 대원들의 배후로 파고들었다.
바스락.
군화가 고철 파편을 밟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맨 뒤에서 걷던 수거대 대원 하나가 기이한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에 은빛 눈동자를 번뜩이는 백발의 사신이 서 있었다. 대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전자기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동시에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으, 으아...!”
하지만 그의 목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음파 주파수는 공기 중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채준이 전개한 장막의 경계선에 걸려 멈춰 섰다. 대원은 입만 벙긋거리는 기괴한 인형처럼 소리 없이 허우적거렸다. 탕! 하고 터져야 할 소총의 발사음 역시 묵음 처리되었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은 선명했으나, 격발의 파괴적인 음파 자체가 시간 속에 지연되어 묶여버린 것이다.
“윽!”
채준이 소리 없이 몸을 날려 대원의 목덜미를 왼팔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관절의 흐름을 비틀어 그대로 꺾어버렸다.
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조차 장막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채준은 쓰러지는 대원의 품속에서 제식 권총 ‘크로노-9’을 왼손으로 낚아채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무슨 일이야? 어이, 3번!”
앞서 걷던 두 명의 대원이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동료가 소리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한 그들의 붉은 고글 너머로 경악이 서렸다. 그들은 즉각 무전기에 손을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기습이다! 기습—!”
그러나 무전기 너머로 송출되어야 할 신호 주파수 역시 적막의 장막이 가진 시간 왜곡 영역에 갇혀 노이즈조차 내지 못하고 차단되었다. 무전기 화면에는 ‘신호 도달 지연’이라는 붉은색 경고등만 깜빡일 뿐이었다.
채준은 대검을 쥘 수 없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단분자 대검의 손잡이 끝을 움켜쥐고 도진 스님에게 배웠던 이완의 흐름을 전개했다.
스윽.
대검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소리 없는 참격이 첫 번째 대원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방울이 무음의 공간 속에서 몽환적으로 흩날렸다. 마지막 남은 대원이 겁에 질려 뒤로 자빠지며 방아쇠를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타타타타탕!
총구의 섬광이 어둠을 밝혔지만, 총소리는 여전히 지연되어 들리지 않았다. 채준은 가죽 코트 ‘데스 딜레이’의 자락을 넓게 펼쳐 날아오는 탄환의 물리적 충격을 가두어 둔 채, 그대로 돌진해 대원의 가슴팍에 대검을 깊숙이 박아넣었다.
“커헉...”
대원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입술이 필사적으로 움직였으나, 끝내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장막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세 명의 대원을 소리 소문 없이 처단한 채준은 즉시 진우에게로 다가갔다.
“진우야, 괜찮나?”
채준이 나직하게 물었다. 소리 지연 영역 안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진우의 귀에만 겨우 도달했다.
“형... 형님...! 수거부대 녀석들이... 누나랑 주민들을 전부...”
진우가 울부짖으며 채준의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알고 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
채준은 왼손으로 무거운 강철 빔을 붙잡았다. 마비된 오른손은 거들 뿐, 전신의 관절을 이완시켜 힘을 한 점으로 모으는 무술적 요령을 통해 강철 빔을 들어 올렸다. 진우가 필사적으로 다리를 빼내어 기어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진우가 도망치려다 바닥에 흩어진 깨진 철판 조각을 세차게 밟았다.
깡—!
날카로운 금속성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리려 했다. 장막의 경계선 바로 바깥쪽에서 발생한 소리였다.
채준은 즉시 왼손을 뻗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려던 그 소리의 음파 주파수를 움켜쥐었다. 극도의 집중력으로 소리의 엔트로피 법칙을 시간 속에 묶어두는 수동 지연.
“크윽...!”
순간, 채준의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멀어지며 코끝으로 뜨거운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명 보존 시계가 망가진 상태에서 장막 유지와 소리 지연을 동시에 전개한 대가였다. 뇌의 혈관이 터질 듯한 압박감에 채준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잘게 떨렸다.
겨우 소리를 묶어두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비정상적인 전자기 왜곡은 멀리서 수색을 지휘하던 자의 감각을 피할 수 없었다.
저 멀리 투기장 중앙에서, 수거부대 부대장 마철두가 무전기를 귀에 댄 채 우뚝 멈춰 섰다.
“3조, 응답해라. 3조?”
무전기 너머에서는 지직거리는 노이즈조차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무음. 그것은 단순한 통신 두절이 아니었다. 주파수 자체가 시간의 주머니에 갇혀 흐르지 않고 멈춰 섰을 때 발생하는 기괴한 정적이었다.
마철두의 붉은 고글 너머로 잔혹한 안광이 번뜩였다.
“쥐새끼가 무음 장막을 켰군.”
그가 무전기를 바닥에 내던지며 빡빡 깎은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의 전신에서 뚝, 뚝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철두가 체내의 칼슘과 마그네슘을 피부 표면으로 응축시키는 이능력을 가동했다.
‘화강암 피부 경화(Granite Skin Hardening).’
그의 피부가 순식간에 회색빛의 거친 돌 질감으로 변하며, 전신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들어갔다. 양손에는 불법 개조로 이식한 단분자 가시 클로가 예리한 빛을 뿜으며 튀어나왔다.
“신채준—! 거기 숨어 있는 거 다 안다!”
마철두가 전방을 향해 흉포한 포효를 내지르며 대지를 강하게 밟았다. 대지 충격파가 투기장 모래밭을 뒤흔들며 채준이 숨은 고철 더미 방향으로 가파르게 뻗어 나갔다.
채준은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내며 진우와 살아남은 소수의 주민들을 안전한 하수구 입구 방향으로 밀어 넣었다.
“진우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그러나 하수구 입구의 철망 바로 앞, 거대한 바위 같은 실루엣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아 서며 대지를 짓밟았다. 마철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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