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느린 칼, 가장 빠른 궤적
이재현의 손가락 사이에서 회전하던 단검이 푸른색 잔상을 남기며 채준의 미간을 향해 사출되었다.
빗줄기를 찢고 날아오는 궤적은 인간의 동체시력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매끄럽고 신속했다. 하지만 채준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가늘어지는 순간, 그의 시야는 완전히 다른 색으로 재구성되었다. 어둡고 축축한 골목길의 풍경이 채도를 잃고 흑백으로 바래가는 가운데, 단검의 끝날에서부터 채준의 미간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붉은색 실선이 선명하게 투시되었다.
‘사선 예측(Death Line Prediction)’의 권능이었다.
채준은 아주 미세한 동작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칼날이 일으킨 푸른색 기류가 왼쪽 뺨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산성비와 함께 붉은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지만, 채준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빗방울이 가슴팍에 닿는 소리조차 지연되어 느리게 들리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채준은 이재현의 손목 근육이 보이는 주파수를 스캔했다.
이재현이 단검을 파지할 때 손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 그것은 다음 투척의 궤도와 가속도를 결정하는 가장 확실한 물리적 지표였다. 오 영감의 정비소에서 보았던 구형 크로노미터의 톱니바퀴처럼, 이재현의 몸 역시 철저한 물리학적 인과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속도가 아무리 빠를지언정, 그 원인을 읽어낼 수 있다면 피하지 못할 공격은 없었다.
“과연, 시한부 해결사라는 별명이 허명은 아니군.”
이재현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잔상을 남겼다. 그의 발끝에서 푸른색 운동에너지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신체가 허공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속도계 이능력이 극대화된 초고속 이동이었다.
쉭! 쉭!
좌우 대각선, 그리고 머리 위. 사방에서 동시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대기를 갈랐다. 이재현이 고속 이동을 유지하며 던진 세 자루의 단검이 채준의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며 짓눌러 왔다. 채준은 대검을 휘둘러 쳐내려 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는 감각이 죽어 있었다. 억지로 무거운 대검을 휘둘렀다간 파지법의 균형이 깨져 단 한 번의 합 만에 무기를 놓치게 될 터였다.
채준은 대신 ‘데스 딜레이’ 가죽 코트의 자락을 넓게 펼치며 몸을 웅크렸다.
깡! 깡! 쾅!
코트 안감에 덧대어진 전자기 차폐 내피와 단단한 가죽 표면이 단검의 충격을 받아냈다. 칼날에 실려 있던 막강한 운동에너지가 가죽을 찢고 채준의 신체 표면에 닿는 순간, 채준은 마음속으로 지연 공식을 전개했다.
‘물리 충격 지연 제어법(Physical Impact Delay Control).’
몸에 가해진 둔탁한 타격과 열량이 피부 너머로 관통하지 않고, 가슴팍 안쪽의 ‘딜레이 포켓’으로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가슴뼈 깊은 곳에서 태엽이 어긋나며 끼이익거리는 기계적 마찰음이 채준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오른손목에 채워진 수명 보존 시계의 게이지가 순식간에 30%까지 차올랐다. 심장에 걸리는 과부하로 인해 체온이 가파르게 상승하며 코끝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역류했다.
[경고: 충격 축적량 32% 돌파]
[남은 수명: 14시간 49분 12초]
시간이 없었다. 매초가 아라의 생명줄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무거운 가죽 코트 뒤에 숨어 있는 게 고작인가?”
어느새 채준의 등 뒤로 소리 없이 파고든 이재현이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의 손에 쥔 단검이 채준의 무방비한 목덜미 경동맥을 향해 대각선으로 그어졌다.
채준은 몸을 돌리며 고철 단분자 대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마비된 두 손가락이 미끄러지며 대검의 자루를 제대로 받쳐주지 못했다.
칭!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대검이 채준의 손에서 허무하게 빠져나가 빗물이 고인 진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보 같은 녀석. 손가락이 완전히 죽어버렸군!”
이재현의 안구에 승리의 확신이 서렸다. 해결사로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 무기를 놓친 적의 목을 베는 것은 이재현에게 단 0.01초도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의 단검 끝날이 채준의 목덜미 피부에 닿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채준이 설계한 정밀한 feint였다. 촉각이 사라진 손가락을 핑계로 무기를 일부러 떨어뜨려, 속도를 과신하는 이재현의 방심을 유도한 계산적인 덫.
채준은 칼을 잡으려던 오른손을 그대로 거두어 이재현의 가슴팍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재현의 단검이 채준의 가죽 코트 깃을 깊숙이 찢어발겼지만, 채준의 왼손 주먹은 이미 이재현의 방어가 허술해진 흉판 정중앙에 닿아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주먹질이라니, 발악이 비참하...”
이재현이 비웃음을 완성하기도 전, 채준의 가슴속 딜레이 포켓이 차갑게 박동했다.
‘딜레이드 카운터(Delayed Counter).’
그동안 코트와 피부로 흡수하여 가슴 시계에 쌓아두었던 세 자루의 고속 단검의 운동에너지, 그리고 이재현이 휘둘렀던 참격의 질량이 단 0.1초의 찰나에 채준의 주먹 끝으로 한꺼번에 해방되었다.
콰아아아앙!
골목길 전체를 뒤흔드는 폭발적인 충격파가 이재현의 가슴을 관통했다. 충격파는 대기 중의 빗방울을 증발시키며 은빛 시계 문자판 형상의 압력 폭풍을 만들어 냈다.
“크헉...!”
이재현의 신체가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가 부딪친 제3창고의 두꺼운 콘크리트 벽면이 거미줄 같은 균열을 일으키더니, 이내 지연되었던 물리력이 시간차로 폭발하며 완전히 산산조각 나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와 증기 너머로 이재현이 무릎을 꿇은 채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의 가슴팍 슈트는 완전히 걸레짝처럼 찢겨 있었고, 손가락 사이의 단검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바닥에 흩어졌다.
“일부러... 검을 놓친 건가... 미친 시한부 자식...”
이재현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채준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오만함 대신 깊은 경외와 패배의 굴욕이 서려 있었다. 채준은 진흙 묻은 대검을 묵묵히 주워 올려 어깨에 메었다.
“약속은 지켜라, 이재현.”
이재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편 무너진 잔해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빗물에 젖은 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제국 원로원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저순도 에테르 정제액 상자였다.
“가져가라... 내 패배다.”
이재현이 신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채준은 상자로 다가가 가죽 끈으로 코트 등에 단단히 묶었다. 드디어 아라를 살릴 열쇠를 손에 넣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안도할 틈도 없이, 골목길 입구 너머 어둠 속에서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수십 발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빗줄기를 뚫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겁고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바닥의 물웅덩이를 짓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제국 집행부대의 순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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