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암시장의 룰
하늘을 가로막은 거대한 강철 톱니바퀴 장막이 불협화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톱니의 이음새마다 맺힌 시커먼 녹물과 산성비가 슬럼가 제13구역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흩뿌려졌다. 차가운 빗방울이 목덜미를 적실 때마다 신채준은 가죽 코트 ‘데스 딜레이’의 깃을 바짝 끌어올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죽 장갑으로 단단히 감싼 손가락 중 검지와 중지의 끝마디를 왼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오 영감의 진료소에서 행해진 거친 수술의 대가로 손가락 두 개의 촉각이 영구적으로 죽어 버린 탓이었다. 쇳덩이처럼 굳어 버린 손가락을 억지로 까닥이자 가슴팍 안쪽에서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듯한 불쾌한 진동이 미세하게 전해졌다.
채준은 오른손목을 들어 올렸다. 낡은 가죽 스트랩에 고정된 ‘오 영감의 수제 수명 보존 시계’의 디지털 화면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은 수명: 14시간 52분 03초]
15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타이머가 영(0)을 가리키는 순간, 채준의 심장은 멈추고 제13구역 지하 연명 치료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잠들어 있는 여동생 아라의 산소호흡기 전원 역시 차갑게 꺼질 것이다. 아라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극약인 ‘저순도 에테르 정제액’을 구하지 못한다면, 남매의 시간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영원히 정지할 터였다.
채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고철 단분자 대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촉각이 사라진 두 손가락 대신 엄지와 약지, 새끼손가락에 힘을 집중하는 변칙적인 파지법을 의식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장갑 속의 약점을 들키는 순간, 하이에나 같은 슬럼가의 해결사들이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들 것이다.
그는 어둠을 뚫고 네온사인이 일렁이는 ‘지하 암시장 거리’의 입구로 향했다.
지하 암시장 거리는 제국의 눈을 피해 온갖 불법 물자와 수명이 거래되는 무법천지였다. 녹슨 파이프라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압 증기와 보라색, 초록색의 조잡한 네온 불빛이 뒤엉켜 기괴한 안개를 형성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목덜미에 붉은색 ‘필터(Filter)’ 등급 바코드가 희미하게 점멸하는 극빈층 주민들이 수명 칩 몇 개를 구걸하며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빵 한 조각이 3시간의 수명으로 거래되는 잔혹한 시장의 룰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채준은 입구의 수문장들에게 낡은 해결사 휘장을 툭 던져 보인 뒤, 익숙하게 골목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암시장의 가장 거대한 정보 통로이자 장물아비인 ‘최 장물’의 은신처였다.
“오, 이게 누구신가. 13구역의 시한부 해결사 신채준 아니신가?”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양손가락마다 번쩍이는 금반지를 주렁주렁 끼고 있는 통통한 체구의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환영했다. 최 장물이었다. 그의 테이블 위에는 지상 주민들에게서 긁어모은 표준 수명 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하자, 최 장물.”
채준은 코트 안쪽에서 24시간 표준 수명 칩 5개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현재 그가 가진 전 재산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최 장물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뜩이며 즉각 칩을 가로챘다.
“역시 화끈해서 좋다니까. 뭘 알고 싶으신가? 강태석의 수거부대가 널 이 잡듯 뒤지고 있다는 정보라면 이미 공짜로 알려줄 수도 있는데.”
“중층 구역 ‘크로노스 시티’에서 밀수된 에테르 정제액. 어디로 들어왔지?”
최 장물은 금이빨을 드러내며 큭큭 웃었다. 그는 테이블 아래에서 구형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정보가 빠르군, 채준이. 제국 원로원의 수명 정제소에서 유출된 진짜 ‘저순도 에테르 정제액’ 한 상자가 오늘 밤 암시장에 출하된다네. 슬럼가의 희석액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순도 약물이지. 오늘 자정, 제3창고 뒷골목의 비밀 경매에서 풀릴 예정이야. 하지만...”
최 장물이 말을 흐리며 채준의 백발이 성성해진 머리카락 끝부분을 힐끗 보았다.
“그 물건을 노리는 게 자네 혼자만은 아니라네. 이미 슬럼가의 거물급 의뢰인이 그 상자를 통째로 가로채기 위해 암시장 최고의 칼잡이를 고용했거든. 판돈이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세.”
채준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판돈이 얼마든 상관없었다. 빼앗아서라도 아라에게 주입해야 했다.
최 장물의 가게를 나온 채준은 어두운 골목 모퉁이 그늘에 기대어 서 있는 사내와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끼고 이마에 독사 문신이 새겨진 사내, 암시장 무기상 ‘독사’였다. 독사는 채준이 다가오자 가죽 재킷 안쪽에서 작은 납 상자를 슬며시 꺼내 보였다.
“채준이, 강태석의 녀석들이 네 목에 건 현상금을 보고 눈이 뒤집혔더군. 이거라도 가져가라.”
독사가 건넨 것은 제국군 제식 권총용 철갑탄과 수제 특수 탄환들이었다.
“제식 권총 ‘크로노-9’에 장전해라. 유성진의 경비병들이 입은 슈트도 뚫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제3창고 주변을 조심해. 그곳에 이미 ‘속도광’이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독사의 경고를 뒤로한 채, 채준은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촉각이 없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가슴속 딜레이 포켓의 엔진이 차갑게 박동하며 그의 신경을 강제로 동조시키고 있었다.
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강철 장막 사이로 쏟아지는 산성비가 네온 불빛을 흐트러뜨리는 자정 무렵, 채준은 마침내 제3창고의 어두운 뒷골목에 도달했다. 사방은 유독가스와 증기로 가득 차 있어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스으으윽!
귀를 찢는 듯한 예리한 파열음이 대기를 갈랐다. 채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퍽!
그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 은빛 단검 한 자루가 등 뒤의 낡은 목재 벽면에 깊숙이 박혔다. 단검의 칼날 주변으로 미세한 푸른색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고속 진동하고 있었다. 운동에너지가 강제로 주입된 단검이었다. 칼날이 스쳐 지나간 가죽 코트 ‘데스 딜레이’의 깃이 미세하게 찢겨 나갔다.
채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골목 안쪽을 응시했다.
자욱한 증기 안개 너머에서 세련된 검은색 가죽 코트를 걸친 날렵한 체구의 청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예리한 단검 여러 자루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유연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13구역 암시장에서 채준과 쌍벽을 이루는 실력파 해결사이자, 속도계 이능력자인 ‘이재현’이었다.
“여전히 살기를 읽는 감각은 쓸 만하군, 신채준.”
이재현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가볍게 위로 던졌다가 받아냈다. 그의 눈빛은 차가우면서도 지독하게 계산적이었다.
“하지만 반응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어. 오른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지? 오 영감의 진료소에서 무슨 짓을 당한 건가?”
이재현의 날카로운 안목이 채준의 가죽 장갑을 낀 오른손 파지법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채준은 내색하지 않고 벽에 박힌 단검을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뽑아냈다. 촉각이 느껴지지 않아 손가락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며 쥐어야 했지만,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비켜라, 이재현. 내 앞길을 막는 자는 누구든 베어 넘긴다.”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겠는데.”
이재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단검들을 가슴팍의 가죽 벨트에 정렬시켰다.
“내 의뢰인이 저 정제액 상자에 이미 최 장물이 제시한 액수의 두 배를 지불했거든. 암시장의 룰대로라면 이 물건은 이미 내 의뢰인의 것이다. 그리고 룰을 지키는 것이 내 비즈니스의 철칙이지.”
이재현의 손끝에서 푸른색 가속 에너지가 흘러나와 단검의 칼날을 감싸기 시작했다. 대기 중의 공기가 그의 주변에서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정면 속도 대결로는 채준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대였다.
이재현은 단검 한 자루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채준을 향해 겨누며 가늘게 눈을 떴다.
“내 칼날보다 빠른 속도로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봐라. 시한부 해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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