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무덤에서 마주한 사냥개
제13구역의 동쪽 장벽 너머, 버려진 기계들의 거대한 공동묘지인 ‘철의 무덤’은 밤이 되면 살아있는 지옥으로 변했다.
하늘을 가린 강철 톱니바퀴 장막 틈새로 미세하게 떨어지는 녹슨 철가루 비가 사정없이 뺨을 때렸다.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와 타들어 가는 오존 냄새가 자욱했다. 이곳은 과거 제국이 전쟁과 진압에 사용하다 폐기한 거대 병기들과 자율 전투 드로이드들을 무질서하게 쌓아둔 금지 구역이었다. 수만 볼트의 초고압 잔류 전기가 불규칙하게 흐르는 철제 고철 산들은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스파크를 튕기며 기괴한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었다.
바스락.
신채준은 납과 콘크리트 잔해로 이루어진 장벽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죽 코트 ‘데스 딜레이’의 칼라를 바짝 올렸지만, 뼈를 저미는 듯한 차가운 밤바람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는 오른손목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남은 수명: 18시간 11분 05초]
[충격 축적 게이지: 0%]
오 영감이 구형 수명 측정기를 개조해 만들어 준 수제 수명 보존 시계였다. 아라의 산소호흡기 배터리가 방전되기까지 남은 시간과 정확히 일치하는 잔여 수치였다. 가슴팍 깊은 곳에 박힌 ‘딜레이 포켓’의 고동 소리가 째깍거리는 아날로그 기어 소리와 겹쳐 차갑게 울렸다. 시간이 없었다. 오늘 밤 안에 이 사지에서 1세대 전투 드로이드의 기어 코어를 확보해 암시장 브로커에게 넘겨야만 아라를 살릴 수명 칩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채준은 고철 산의 좁은 틈새를 타고 안쪽으로 잠입했다. 쓰러진 전차의 궤도와 찌그러진 드로이드의 장갑판들이 거대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가끔 발밑에서 잔류 전하가 튀어 올라 가죽 부츠의 밑창을 그을렸지만, 채준은 감각을 곤두세우며 전진했다.
그때였다.
킁킁.
공기 중을 기이하게 울리는 기계적인 흡입음이 고요한 폐기장을 찢었다. 채준은 즉시 거대한 드로이드의 흉갑 뒤로 몸을 숨겼다.
"여기서 아주 신선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군. 슬럼가 쥐새끼의 피 냄새 말이야."
음산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너진 철제 더미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채준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고철 하역장에서 수거한 단분자 대검의 찌그러진 손잡이를 꽉 쥐었다. 고글도 없는 맨눈으로 조심스럽게 모퉁이 너머를 살폈다.
그곳에는 기괴할 정도로 코가 비대하게 발달한 사내가 서 있었다.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기계식 후각 센서가 끊임없이 킁킁거리며 공기 중의 분자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제국 집행관의 제식 규격 표식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특수 추적관, 이길수였다.
그의 등 뒤로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두 마리의 사냥개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몸의 절반이 강철 장갑과 회전하는 톱니 기어로 개조된 사이보그 사냥개들이었다.
채준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난번 격투로 인해 가슴팍의 상처가 미세하게 터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길수의 후각 센서는 그 극미량의 혈액 분자를 포착한 것이 분명했다.
‘들켰군.’
채준은 뒤로 조용히 물러서려 했다. 고철 산의 좁은 틈새를 이용해 흔적을 지우려 했지만, 이길수의 초감각 스캔은 그보다 빨랐다.
"찾았다, 쥐새끼."
이길수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붉은 안광을 뿜어내던 사냥개 두 마리가 전자기 잔상을 남기며 채준을 향해 사납게 도약했다. 사냥개들의 강철 턱이 채준의 양 어깨를 물어뜯기 위해 허공을 갈랐다.
피할 공간은 없었다. 퇴로는 무너진 철제 산벽으로 가로막힌 상태였다.
채준은 도망치는 대신 주먹을 꽉 쥐고 버텨섰다. 그의 심장 속 태엽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체내의 시간 왜곡 영역을 가동했다.
‘임팩트 딜레이(Impact Delay).’
콰아아앙!
두 마리 사냥개의 거대한 강철 이빨이 채준의 양 어깨를 정확히 물어뜯었다. 하지만 살점이 찢어지는 비명도, 뼈가 부서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냥개들의 fangs가 채준의 어깨 피부에 닿는 순간, 그 접촉면에 은빛의 반투명한 시계 기어 문양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이빨이 가해온 무시무시한 물리적 운동에너지와 압력이 찰나의 순간 시간의 주머니 속으로 강제로 빨려 들어갔다. 타격의 인과가 미래의 어느 시간으로 미루어진 것이다.
지연율 10% 단계.
비록 미숙한 초기 단계였지만, 사냥개들의 치명적인 기습 물리력을 일시적으로 가두기에는 충분했다. 사냥개들은 자신들의 이빨이 닿았음에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허공에 대고 이빨을 찌푸리는 채준의 모습에 당황한 듯 붉은 안광을 깜빡였다.
"뭐지?"
철제 더미 위에서 지켜보던 이길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채준은 적들의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오른손에 쥔 단분자 대검의 잔해를 번개처럼 휘둘렀다. 은빛 참격이 허공을 가르며 도약해 있던 두 마리 사냥개의 목덜미를 정확히 베어 넘겼다.
스파크와 검은 기름이 사방으로 튀며, 기계 사냥개들의 몸체가 고철 바닥으로 볼품없이 굴러떨어졌다.
[충격 축적 게이지: 12%]
손목시계의 게이지가 미세하게 차올랐다. 동시에 가슴뼈 안쪽에서 욱신거리는 부정맥과 함께 뜨거운 발열이 시작되었다. 지연된 타격은 체내에 축적되는 동안 끊임없이 장기를 압박했다.
이길수는 자신의 사냥개들이 단 한 번의 공방에 고철로 변하자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단순한 부랑민 쓰레기인 줄 알았더니, 기이한 이능력을 쓰는 반역자였군. 하지만 그 굼뜬 몸짓으로 내 전자기 유탄을 피할 수 있을까?"
이길수가 허리춤에서 검은색 원통형 유탄 발사기를 꺼내 들었다. 찰칵하는 기계음과 함께 총구가 채준을 겨냥했다.
채준은 좁은 철제 고철 틈새로 몸을 던졌다. 일대일 상황을 강제하기 위해 사방이 가로막힌 폐전차의 잔해 속으로 파고들 생각이었다.
피융!
이길수가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된 전자기 유탄이 채준이 숨은 고철 벽에 부딪치며 눈을 멀게 하는 푸른색 플라즈마 폭풍을 일으켰다.
쾅!
엄청난 가스 압력과 초고온의 열량이 채준의 등 뒤를 덮쳤다. 채준은 가슴의 시계를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지연율 10% 단계, 흡수!’
폭풍의 압력과 열량의 일부가 그의 심장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한계치가 낮은 초기 단계의 딜레이 포켓은 폭발의 모든 열량을 완벽히 상쇄하지 못했다. 뜨거운 열기가 가죽 코트 너머로 전해지며 등 가죽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충격 축적 게이지: 45%]
삐- 삐- 삐-.
손목시계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 무리한 이능력 사용으로 인한 생체 수명 차감]
[남은 수명: 18시간 08분 05초]
수명이 일시에 3시간이나 깎여 나갔다. 귓가에는 삐 소리와 함께 지독한 이명이 시작되었고,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이 엄습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큭..."
채준은 벽을 짚고 간신히 버턔섰다.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는 이길수가 이 좁은 틈새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터벅, 터벅.
이길수가 연무를 헤치며 폐전차 잔해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전류가 흐르는 진압봉이 들려 있었다.
"끝났다, 쥐새끼야. 네가 아무리 충격을 미루는 이능을 가졌어도, 내 고압 전류가 네 심장을 태워버리면 그만..."
이길수가 진압봉을 내지르는 순간, 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채준은 도진 스님에게 배웠던 충격 흘리기의 감각을 떠올리며 몸을 비틀었다. 진압봉이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찰나, 채준은 도망치는 대신 이길수의 턱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날카로운 철제 파편을 쥐고 이길수의 목덜미를 향해 사정없이 그어버렸다.
서걱!
"아아악!"
이길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목덜미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뜻밖의 날카로운 반격에 이길수는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쥔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채준을 바라보았다.
채준의 눈동자는 여전히 감정 한 점 없는 기계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길수는 비틀거리며 품속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치이익.
"본부... 제13구역 동쪽 철의 무덤에 S급 위험 도망자 발견... 즉시 증원 부대를... 이놈은 단순한 부랑민이 아니다...!"
피 묻은 무전기 너머로 다급한 제국 집행부대의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채준은 쓰러진 사냥개들의 잔해와 이길수의 흘러내리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기어 코어를 확보하기도 전에 요새 전체의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집행부대의 무거운 군화 소리가 철의 무덤을 향해 좁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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