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탑 지하의 결의
산성비가 섞인 제13구역의 차가운 밤바람은 녹슨 철골 사이를 지날 때마다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신채준은 가죽 코트 ‘데스 딜레이’의 깃을 턱끝까지 끌어올렸다. 정태수를 단죄하고 회수한 은빛 데이터 칩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왼손 끝에 딱딱한 금속의 감각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가죽 장갑 안쪽에서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검지와 중지 끝마디는 촉각을 완전히 잃은 채, 죽은 나뭇가지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독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적막의 장막’을 무리하게 유지한 대가로 코밑에서 흘러내린 피는 이미 검붉게 굳어 가죽 코트 깃에 얼룩을 남겼다. 채준은 오른손목을 들어 올려 오 영감의 수제 수명 보존 시계를 바라보았다.
쩍 갈라진 유리막 사이로 푸른색 스파크가 지직거리며 불규칙한 노이즈를 뿜어내고 있었다. 균열된 액정 너머로 명멸하는 숫자는 가혹했다.
[12:38:04]
열두 시간 삼십팔 분. 그것이 채준에게 허락된 남은 생의 전부였다. 심장이 한 번 고동칠 때마다 가슴뼈 안쪽의 ‘딜레이 포켓’이 삐걱거리며 기계적인 마찰열을 뿜어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발로 변해버린 머리칼 끝부분이 밤바람에 흩날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골절 부위가 찌르는 듯이 아파왔지만, 채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도달한 곳은 제13구역 동쪽 경계에 버려진 구형 시계탑 앞이었다. 제국의 폭격으로 톱니바퀴가 멈춰 선 채 기괴한 해골처럼 솟아 있는 탑. 채준은 주변의 눈치를 살핀 뒤, 시계탑 배면에 숨겨진 거대 기어 장치로 다가갔다.
그는 감각이 없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녹슨 기어 뭉치 안쪽의 비밀 레버를 순서대로 당겼다. 세 번째 기어가 묵직한 쇠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순간,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의 철판이 덜컹거리며 아래로 열렸다.
지하로 이어지는 어두운 계단 너머로, 슬럼가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정교한 기계 기름 냄새와 화약 향이 뿜어져 나왔다. 저항군 ‘아워 글래스’ 제13지부의 심장, 시계탑 지하 비밀 기지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사방을 가득 채운 증기 파이프와 거대한 수동식 기어들이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청각을 압도했다. 벽면에는 제13구역 전체의 전력망과 순찰 동선이 그려진 빛바랜 지도가 빼곡히 붙어 있었고, 구형 홀로그램 테이블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왔군, 해결사.”
홀로그램 테이블 옆에서 낡은 작업용 멜빵바지를 입은 넉살 좋은 체구의 사내가 이쑤시개를 물고 채준을 맞이했다. 저항군의 살림꾼이자 보급을 담당하는 배동수였다. 그의 눈빛에는 채준이 정태수를 단죄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듯, 묘한 경외감과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정태수 놈의 시체는 확인했다. 배신자의 최후치고는 너무 깔끔하더군. 그나저나 가슴 상태는 어때?”
배동수가 다가오며 묻자, 채준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회수한 은빛 데이터 칩을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비밀 루트는 안전하다. 정태수가 제국에 넘기려던 정보는 모두 회수했어.”
“오, 진짜로 해냈군! 이 칩이 넘어갔다면 우리 지부원 전체가 강태석의 전기 채찍 아래에서 가죽이 벗겨졌을 거다. 고맙네, 정말로.”
배동수가 감격하며 칩을 가로채 홀로그램 리더기에 삽입하려던 찰나, 구석의 작업대에서 날카로운 용접 불꽃이 튀었다.
치이이익!
코끝에 용접용 보안경을 걸치고 전신에 기름때를 묻힌 청년이 도구를 내려놓으며 걸어 나왔다. 오 영감의 유일한 수제자이자, 이제는 채준의 심장 시계를 정비해 주는 기술 동료인 박형식이었다. 형식의 눈은 오 영감의 죽음 이후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까칠해져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해, 동수 형. 이 인간 상태를 보고도 그 소리가 나와?”
형식은 채준의 가죽 코트를 거칠게 젖히고 그의 오른손목을 낚아챘다. 쩍 갈라진 수명 보존 시계의 유리막을 본 형식의 미간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이 미친 영감이 대체 뭘 이식해 놓은 거야…… 기어가 완전히 뒤틀렸잖아! 유리막만 깨진 게 아니야. 내부의 초미세 나노 기어들이 마찰열 때문에 서로 뭉개지고 있다고! 오차율이 벌써 20%를 넘었어. 이 상태로 ‘임팩트 딜레이’를 한 번만 더 썼다간, 지연된 충격이 방출되지 못하고 가슴속에서 역류해서 네 심장이 통째로 터져 나갈 거야!”
형식의 목소리에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떨렸다. 스승인 오 영감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스승이 목숨 바쳐 살려낸 채준의 망가진 육체를 향한 집착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고칠 수 있나?”
채준이 미동도 없이 물었다. 남은 수명이 반나절뿐인 사람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덤덤한 어조였다.
“슬럼가의 고철 쓰레기로는 절대 안 돼!”
형식이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으며 윽박질렀다.
“오차가 밀리초 단위로 발생하고 있어. 이걸 완벽하게 보정하려면 중층 구역 ‘크로노스 시티’의 최고급 기술이 들어간 ‘크로노 미터 보정 태엽’이 필요해. 제국의 엘리트들이나 쓰는 그 특수 합금 태엽이 없으면, 난 네 심장을 열지도 못해. 열었다간 그 자리에서 누전돼서 즉사할 테니까!”
정적이 기지를 감쌌다. 째깍거리는 시계탑의 기어 소리만이 채준의 남은 수명을 재촉하듯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때, 배동수가 침통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홀로그램 지도를 확대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형식아. 마침 우리가 준비하던 작전 노선과 정확히 겹치거든.”
배동수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제13구역 동쪽 검문소 가기 직전, 거대한 강철 장벽 아래 요새처럼 지어진 ‘시간 배터리 충전 기지’였다.
“강태석의 수거부대 녀석들이 슬럼가 주민들에게서 강탈한 표준 수명 배터리들을 중층으로 수송하기 전에 임시로 보관하는 곳이지. 제국 군부의 물류 기지인 만큼, 그 내부 정밀 기계실에는 네 심장 시계를 보정할 최고급 부품들과 정제액이 가득 차 있다.”
배동수가 채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여동생 아라의 수명 정제액 주입 주기도 한계에 달했지? 강태석 그 개자식이 아라가 잠들어 있는 연명 치료실의 경비를 삼중으로 강화했다는 사실을 정태수의 칩에서 확인했다. 지금 상태로 치료실을 정면 돌파하는 건 자살행위야. 하지만 우리가 이 충전 기지를 습격해 대량의 수명 배터리를 탈환하고 기지를 마비시킨다면, 치료실의 경비 병력도 분산될 수밖에 없어. 아라를 구출할 유일한 틈새가 열리는 거지.”
아라의 이름이 나오자, 채준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가죽 장갑 속의 굳어버린 손가락 끝이 시리도록 차가워졌다. 여동생을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망가진 심장을 어떻게든 이어 붙여야 했고, 제국의 심장부를 타격해야만 했다.
“습격 작전의 호위 병력은?”
채준의 나직한 질문에 기지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금속성 마찰음이 울렸다.
철컥.
어둠을 가르고 걸어 나온 여성은 한쪽 눈을 가린 비대칭 단발머리에 검은색 가죽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레일 부품을 조합해 만든 거대한 전자기 가속 저격총이 정밀한 둔탁함을 뽐내고 있었다. 저항군 최고의 스나이퍼, 정은하였다.
“단순한 경비병 수준이 아니야, 해결사.”
정은하가 차가운 눈빛으로 채준의 백발을 응시하며 저격총의 볼트를 당겼다.
“기지의 수송선 선봉에는 군부 특화계 이능력자인 중장갑 척탄병 백산이 버티고 있어. 두께 20cm의 전신 장갑을 두르고 다연장 고폭 유탄 발사기를 난사하는 괴물이지. 엄폐물이 없는 강철 다리 위에서 그놈의 포격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면, 우리 대원들은 진입하기도 전에 가루가 될 거야.”
은하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국의 중화력 앞에 저항군의 열악한 무장은 종잇장과 다름없었다.
채준은 손목의 깨진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경고등이 그의 창백한 뺨을 비추고 있었다. 적의 물리적 타격이 강할수록, 열량이 뜨거울수록, 그것은 자신의 ‘지연 주머니’에 담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연료가 된다.
“그 폭발의 충격과 열량…… 내가 전부 받아내지.”
채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내가 전방에서 백산의 포격을 지연 흡수해 방패가 되겠다. 그 사이 대원들을 진입시켜라. 대신, 기지 내부 정밀 기계실의 보정 태엽은 내가 직접 회수한다.”
박형식이 경악하며 채준의 멱살을 잡으려 다가왔다.
“미쳤어? 오차율이 20%가 넘는다고 했잖아! 그 무식한 유탄 충격을 그대로 흡수했다간 방출하기도 전에 네 가슴이 먼저 녹아내릴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라를 구할 방법이 없다.”
채준이 형식의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악력으로 밀어냈다. 마비되지 않은 왼손의 힘만으로도 형식은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채준의 은빛 눈동자에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지 외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기지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배동수는 이쑤시개를 씹으며 채준의 비장한 결의를 묵묵히 인정했다. 마침내 정은하가 저격총의 조준경을 닦아내며 채준의 앞으로 걸어왔다.
은하는 사제 저격총의 탄창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철컥하는 기계음이 시계탑 지하의 톱니바퀴 소리와 공명하며 기지를 서늘하게 울렸다.
“좋아.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리지 않겠어.”
정은하가 탄창을 완전히 재장전하며, 채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작전에서 네 지연 능력이 우리 전방의 방패가 되어줘야 한다. 0.1초라도 늦으면, 우린 전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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