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도진 스님의 경고가 귓가를 맴도는 가운데, 채준은 굳어버린 오른손 손가락을 가죽 장갑 속으로 굳게 밀어 넣으며 네온사인이 일렁이는 어두운 암시장 거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지하 암시장 거리는 제13구역의 가장 깊은 치부이자 오염된 심장부였다. 하늘을 가린 거대한 강철 톱니바퀴 장막의 틈새로 미세한 산성비가 흩뿌려지고 있었고, 녹슨 파이프라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압 증기가 보라색과 초록색의 조잡한 네온 불빛과 뒤엉켜 기괴한 안개를 형성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목덜미에 붉은색 ‘필터(Filter)’ 등급 바코드가 희미하게 점멸하는 극빈층 주민들이 수명 칩 몇 개를 구걸하며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빵 한 조각이 3시간의 수명으로 거래되는 잔혹한 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 이곳이 바로 지상의 유일한 무법천지였다.
채준은 낡은 가죽 코트 ‘데스 딜레이’의 깃을 높이 올린 채, 안개 속을 유령처럼 걸었다.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는 가죽 장갑 안쪽에서 차갑게 굳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 영감의 죽음 이후 찾아온 신체적 퇴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하지만 채준은 왼손으로 고철 하역장 출신 단분자 대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며 심장 박동을 의식적으로 조율했다.
쿵…… 쿵…… 쿵…….
도진 스님에게 전수받은 ‘심장 박동 동기화 호흡법’이었다. 들숨은 짧게, 날숨은 길고 부드럽게 내쉬는 ‘흡-호-호-호’의 호흡 주기가 이어지자, 가슴뼈 안쪽에서 날뛰던 ‘딜레이 포켓’의 발열이 거짓말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손목에 채워진 오 영감의 수제 수명 보존 시계의 유리막에는 여전히 쩍 갈라진 균열이 선명했고 전자기 스파크 노이즈가 튀고 있었지만, 남은 수명 ‘12시간 48분’이라는 숫자는 차분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한 시간.’
정태수. 그 비겁한 배신자가 저항군 제13지부의 최종 대피소 좌표와 오 영감의 은신처 정보를 넘긴 대가로 강태석의 수거대로부터 수명 연장 카드를 받기로 한 거래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서민우가 해킹으로 도청해 낸 정보에 따르면, 거래 장소는 암시장 거리 배후의 폐기물 적재창고 뒷골목이었다.
골목 모퉁이의 네온사인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저 멀리, 증기가 자욱한 골목 끝에 낡은 저항군 코트를 걸친 마른 체구의 사내가 서성이고 있었다. 정태수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제국의 검은색 하프 슈트와 붉은색 고글을 착용한 강태석의 수거대 소속 일반 대원 세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품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카드 형태의 재화를 꺼내 정태수의 눈앞에 흔들었다. 강태석이 배신의 대가로 약속한 불법 수명 연장 카드였다.
“자, 약속한 수명이다. 저항군의 임시 대피소 좌표가 담긴 데이터 칩은 가져왔겠지?”
수거대원이 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태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소형 데이터 칩을 꺼내 들었다. 그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수명 카드를 향해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다.
“여, 여기 있습니다. 제13지부의 새로운 대피소 좌표와 비밀 이동 경로가 전부 들어있습니다. 약속대로 내 목덜미의 필터 바코드를 지워주고 중층 구역의 ‘시티즌’ 등급 수명 칩을 발급해 주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걱정 마라. 강태석 대장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수거대원이 비열하게 웃으며 수명 카드를 내밀었다. 정태수가 칩을 건네려는 찰나였다.
스윽.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백발로 변해버린 머리칼을 휘날리며 채준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가죽 코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고, 왼손에 들린 단분자 대검의 초진동 날이 푸르스름한 안광을 발했다.
“정태수.”
낮게 가라앉은 채준의 목소리가 골목의 소음을 찢었다.
정태수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채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의 동공이 공포로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신, 신채준……! 네놈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분명 마철두 부대장님이 하수구 속에 묻어버렸다고 했는데!”
정태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질 듯 물러섰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강태석에게 미리 뇌물로 받았던 수명 연장 카드의 붉은 에너지를 자신의 양다리에 강제로 주입한 것이다. 그의 다리 주변으로 불안정한 붉은색 이능 스파크가 폭발하듯 튀었다.
“막아! 이 괴물 녀석을 막으란 말이다! 저놈의 심장만 적출하면 대장님이 백 년의 수명을 주신다고 했다!”
정태수가 수거대원들을 고기방패로 내세우며 골목 반대편으로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명 카드의 폭발적인 기동력을 주입받은 그의 신체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침입자다! 사살해라!”
수거대원 세 명이 동시에 전자기 소총을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탕!
푸른색 전자기 탄환들이 빗줄기를 뚫고 채준을 향해 사정없이 쏟아졌다. 채준은 즉시 몸을 날려 골목 벽면의 낡은 철제 쓰레기통 뒤로 엄폐했다. 쇠비린내 나는 불꽃이 그의 코트 깃을 스치며 사방으로 튀었다.
채준은 도망치는 정태수를 향해 단분자 대검을 투척하려 왼손을 들어 올렸으나, 이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총성에 놀란 지하 암시장 거리의 무고한 ‘하루살이’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골목 사이로 어지럽게 뒤엉켜 스크램블을 일으키고 있었다. 잘못 던졌다간 엄한 주민의 목숨을 앗아갈 터였다. 사격 각도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 사이 정태수는 모퉁이를 돌며 암시장의 미로 같은 골목길 깊숙한 곳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수명 카드의 속도 버프가 유지되는 동안 놈을 놓친다면, 저항군의 위치는 완전히 제국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채준은 차갑게 연산했다. 오른손가락은 마비되어 쓸 수 없고, 남은 수명은 단 12시간 남짓. 시간을 지체할수록 자신의 심장 또한 버티지 못한다. 가장 확실하고 은밀한 사냥법을 전개해야 했다.
채준은 엄폐물 뒤에서 벗어나며 왼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적막의 장막(Shroud of Silence). 전개.’
웅—!
공간이 기묘하게 일렁였다. 채준을 중심으로 반경 3미터 이내의 영역이 미세한 푸른빛 돔 형상으로 뒤덮였다. 그 순간, 골목을 가득 채우던 모든 소리가 단숨에 소멸했다.
산성비가 강철 파이프를 때리는 소리도, 기계 드럼통이 굴러가는 소리도, 주민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진공 상태의 정적이 찾아왔다. 수거대원들이 귀를 움켜쥐며 당황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무전기 헤드셋 역시 지독한 무음 노이즈에 막혀 먹통이 되어 있었다. 무전 신호와 전파마저 시간 속에 지연되어 차단된 것이다.
“끄으윽……!”
장막을 유지하는 대가는 가혹했다. 채준의 관자놀이 부근의 미세 혈관이 터지며 코끝으로 뜨거운 선혈이 흘러내렸다. 뇌신경 세포가 급격히 연소하며 그의 손목시계 속 수명이 초 단위로 빠르게 깎여 나갔다. 장막을 유지하는 단 몇 분 동안 무려 12시간의 미세 수명이 소모되는 극단의 페널티. 머릿속이 깨질 듯한 편두통이 엄습했지만, 채준은 은빛 안광을 번뜩이며 무음의 영역 속을 유령처럼 기동했다.
소리가 지워진 세계에서 채준의 움직임은 사신과도 같았다.
그는 첫 번째 수거대원의 등 뒤로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대원이 경보를 울리려 입을 벌렸지만, 공기의 진동 자체가 지연된 장막 내부에서는 그 어떤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채준은 대검의 손잡이 끝날로 대원의 턱관절을 강하게 가격했다.
퍽!
타격음조차 나지 않는 기괴한 정적 속에서 대원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두 번째 대원이 전자기 소총을 겨누며 총구를 돌렸지만, 채준의 왼손 대검이 더 빨랐다. 도진 스님에게 배운 관절 이완 기법을 전개하며, 대검 날의 평평한 면으로 소총의 총신을 부드럽게 쳐내 궤도를 비틀었다. 이어 대원의 가슴뼈를 향해 강력한 손바닥 발경을 꽂아 넣었다. 충격이 전신으로 접지 분산되며 대원의 심장이 즉각 정지했다. 대원은 소리 없이 벽을 타고 쓸려 내려갔다.
마지막 대원이 공포에 질려 뒤로 도망치려 발을 굴렀으나, 진흙바닥을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진공의 늪에서 그의 기동력은 무의미했다. 채준은 대검을 역수로 쥐고 대원의 경추를 강타해 기절시켰. 단 10초 만에 세 명의 수거대원이 완전한 무음 속에서 제압당했다.
장막의 범위를 유지하며 채준은 도망치던 정태수의 뒤를 쫓아 골목 끝으로 향했다.
한편, 붉은 수명 에너지를 다리에 주입하고 미친 듯이 도망치던 정태수는 골목 모퉁이를 돌았을 때 기괴한 위물감을 느꼈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빗물이 바닥에 닿는 소리도, 다리가 진흙을 밟는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다급하게 무전기를 켜고 비명을 질렀다.
“마철두 부대장님! 응답하십시오! 신채준이 나타났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
그러나 자신의 목구멍이 울리는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진공의 장막. 세상의 모든 인과와 소리가 멈춰버린 듯한 절대적인 공포가 정태수의 전신을 엄습했다. 그가 떨리는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안개 자욱한 무음의 골목 저편에서 백발을 휘날리는 채준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채준의 어깨에 닿는 순간 푸른색 스파크를 일으키며 지연되는 기괴한 광경.
“히, 히익……!”
정태수는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골목 끝은 거대한 철제 장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길이었다.
채준은 정태수의 눈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놈의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정태수. 너 때문에 오 영감이 죽었다.”
채준이 나직하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겨 적막의 장막을 일시 해제했다.
화아아악!
세상의 소음이 폭풍처럼 정태수의 고막을 때렸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오자 정태수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채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사, 살려줘! 채준아! 내가 잘못했어! 강태석 대장이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난 그냥 하루살이 신세를 면하고 조금 더 살고 싶었을 뿐이야! 제발 목숨만은……!”
“오 영감도 살고 싶어 했다.”
채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정태수의 멱살을 잡고 놈을 장벽 벽면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정태수의 손에 쥐여져 있던 은빛 데이터 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채준은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오른손 가죽 장갑을 굳게 쥐었다. 비록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의 왼손 주먹에는 분노의 충격 에너지가 서서히 째깍거리며 차오르고 있었다. 도진 스님에게 배운 대로, 에너지를 가슴에 가두지 않고 주먹 끝 한 점으로 흘려보냈다.
“배신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채준의 왼손 주먹이 정태수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퍼어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정태수의 신체가 장벽에 부딪히며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정태수의 눈동자에서 생명의 불씨가 급격히 꺼져내렸다.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필터 등급의 붉은 바코드가 완전히 소멸하며, 배신자의 시간은 영원히 정지했다.
채준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은빛 데이터 칩을 주워 올렸다. 머릿속을 찌르는 오버클록과 장막 유지의 후유증으로 눈앞이 핑 돌았지만, 그는 억지로 정신을 붙잡았다.
품속에서 휴대용 정밀 리더기를 꺼내 데이터 칩을 삽입했다. 화면 위로 저항군 제13지부의 비밀 루트와 대피소 좌표들이 스캔 되며 안전하게 회수되었음을 알렸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칩 내부의 숨겨진 폴더 하나가 강제로 실행되며 채준의 은빛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강태석의 친필 서명이 선명하게 박힌 제국 집행부대의 일급 비밀 경비 명령서였다.
[극비 지령: 신채준의 여동생 신아라가 잠들어 있는 연명 치료실의 경비를 삼중으로 강화한다. 신채준이 접촉할 시, 즉각 인질로 삼아 그의 심장 장치를 강제 회수하라.]
화면의 붉은 글씨가 채준의 안면을 잔혹하게 비추었다. 강태석은 이미 아라를 미끼로 채준의 숨통을 죌 덫을 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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