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침의 대결
벽연의 비취 은침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취빛 내공 기류가 소하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서늘한 비취색 광채가 밀폐된 서고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진동했다. 일류 초입의 경지에 오른 정통 의가의 후계자답게, 그녀가 내뿜는 약선조화경(藥仙調和勁)의 기세는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진소하는 피가 고인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청동 침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왼쪽 허벅지에서 가시 덩굴 기관에 스쳐 스며든 가시독의 마비 통증이 족궐음간경을 타고 무섭게 치솟고 있었지만, 그의 안색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도둑이라…….”
소하가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생존을 향한 광기와 냉소적인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가문의 의서가 그렇게 고결하다면, 왜 너희 약선가는 청낭방의 썩은 피를 품고 있느냐? 사마귀의 시체에서 거둔 벽혈령이 이 서고의 문을 열었다. 너희 약선가가 황실 태의원의 하부 조직인 청낭방과 유착하여 민초들을 독약 실험체로 바쳐왔다는 증거다.”
벽연의 맑고 예리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가문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던 그녀에게 소하의 독설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무슨 망발을! 우리 약선가는 대대로 인술을 베풀어온 명문가다! 네놈이 아무리 감언이설로 누명을 씌우려 해도 내 침 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겨뤄보면 되겠군.”
소하가 품속에서 탈취한 신농의경 사본(神農醫經 寫本)을 툭툭 치며 제안했다.
“강남성 대광장(江南城 大廣場)으로 가자. 그곳에 청낭방의 백혈청안단(百血靑眼丹)에 중독되어 뼈와 경맥이 굳어가는 난치병 환자들이 대령해 있다. 정통을 자처하는 네 침술과, 도둑이라 불리는 내 침술 중 어느 것이 진짜 사람을 살리는지 만인 앞에서 겨뤄보는 거다. 내가 지면 이 의서를 돌려주고 내 목을 내놓겠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너희 가문은 내 누명을 벗겨주고 나를 이곳에서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벽연은 오만한 턱선을 치켜세우며 소하를 노려보았다. 가문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녀로서는 사파의 마공을 부린다고 의심받는 소년의 도발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좋다. 만인 앞에서 네놈의 위선과 사악한 침술을 천하에 폭로해 주마.”
***
강남성 대광장에는 수만 명의 민초들과 무림인들, 그리고 관부의 포교들까지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광장 중앙의 석조 단상 위에는 청낭방의 잔혹한 인체 실험으로 인해 온몸의 경맥이 뒤틀리고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죽어가는 난치병 환자 두 명이 뉘어져 있었다. 그들의 피부는 이미 백혈청안단의 독기로 인해 시퍼렇게 죽어가고 있었고, 숨소리는 끊어질 듯 가냘펐다.
“저 소년이 약선가의 비기를 훔친 도둑놈이란 말인가?”
“병약한 해골 바가지처럼 생겼는데, 감히 약선가의 천재 소저와 침술을 겨루다니 미쳤군!”
관중들의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소하는 개의치 않고 낡은 삼베 무복 자락을 정리하며 단상 위에 섰다. 허벅지의 가시독 통증으로 인해 걸음걸이가 미세하게 절뚝거렸지만, 그의 안광만큼은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먼저 나선 것은 벽연이었다. 그녀는 에메랄드빛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가문 비전의 비취 은침(翡翠 銀針)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정순한 약선조화경의 진기가 비취 은침을 타고 흐르며 은은한 청색 광채를 뿜어냈다.
스슥! 스스슥!
벽연의 손놀림은 마치 한 편의 우아한 춤과 같았다. 그녀는 정통 의학의 극의인 약선삼십육침(藥仙三十六針)을 전개하여 환자의 경맥을 순방향으로 정화하기 시작했다. 인당, 신회, 기해 등 주요 기혈에 침이 꽂힐 때마다 환자의 거친 호흡이 가라앉고 안색에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관중들과 관부의 판관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러나 소하는 청맥심술(聽脈心術)을 가동해 환자의 체내 기혈 흐름을 정밀하게 청취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피이이-
소하의 귀에 미세한 막힘과 독소의 뒤틀린 마찰음이 들려왔다. 벽연의 침술은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순방향의 진기로 독소를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백혈청안단의 변이 독소가 환자의 심장맥을 향해 더 빠르게 역류하려 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계집. 정통 침술로는 그 변이 독소를 다스릴 수 없다. 순방향으로 기를 정화할수록 독기는 심장으로 몰려 즉사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벽연이 마지막 침을 꽂으려던 순간 환자의 눈동자가 급격히 뒤집어지며 입에서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기혈의 역류로 인해 독소가 심장을 침범하기 직전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벽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럴 수가……! 내력이 왜 역류하는 것이냐!”
“물러서라.”
소하가 차갑게 속삭이며 벽연을 밀쳐내고 환자의 앞으로 나아섰다. 그는 허리춤에서 녹슨 청동 침통을 열었다. 침경 초입(針境初入)의 경지에 이른 그의 미세한 기공 공명이 청동 침통 내부의 은침들을 미세하게 진동시켰다. 웽 하는 가느다란 공명음이 광장에 퍼졌다.
그가 첫 번째 은침을 뽑아 들려던 순간, 단전 깊은 곳에서 구양진액(九陽津液)의 폭발적인 열독이 심장을 찌르듯 솟구쳤다. 수명이 약 90일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육체의 한계였다. 허벅지의 가시독 마비 통증까지 겹치며 소하의 손가락 끝이 제어할 수 없이 격렬하게 떨렸다.
‘크윽……!’
소하는 이를 악물었으나, 떨리는 손끝 때문에 첫 번째 은침이 환자의 무릎 뼈를 미세하게 스치며 어긋나고 말았다.
드드득!
환자가 고통에 겨워 전신을 뒤틀며 끔찍한 발작을 일으켰다. 비명이 광장을 강타했다.
“저놈이 사람을 죽인다! 마공의 침술이다!”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었고, 벽연 역시 주화입마(走化入魔)라며 비명을 질렀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이대로 실패하면 누명을 벗기는커녕 광장에서 즉사할 판이었다.
소하는 눈을 감았다. 그는 체내의 살인적인 고통과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불가 비전의 청심결(靑心決)을 극한으로 시전했다. 머릿속에서 혜우 스님이 각인해 준 범어 구절들이 황금빛 만자 문양처럼 번뜩였다.
삐이이이-
귀가 찢어질 듯한 극심한 이명이 고막을 때렸고, 왼쪽 고막에서 얇은 선혈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붉게 흘러내렸다. 과도한 청심결 시전의 대가였다. 하지만 그 대가 덕분에 소하의 손끝은 마침내 바위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동인 혈도 인형(銅人 穴道 人形)으로 수천 번을 연습했다. 오차는 없다.’
소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손끝에서 무형의 기공이 실려 은침들이 번개처럼 출수되었다.
타타타탁!
소하는 먼저 환자의 심장 주변 기혈 네 곳을 정밀하게 찔러 심맥 봉쇄(心脈 封鎖)를 시전했다. 독소가 심장으로 유입되는 경로를 완벽하게 차단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스승 갈홍이 남긴 천맥 역침 구결(天脈 逆針 口訣)의 운기법을 전개했다. 진기를 순행시키지 않고 역방향으로 꺾어 흐르게 만드는 기괴한 침격이었다.
환자의 족소음신경과 족궐음간경을 거꾸로 타고 올라간 소하의 은침들이 변이 독소의 꼬리를 낚아채 사지로 강제 몰아붙였다.
“크아아악!”
환자의 입이 쩍 벌어지며,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진 피 한 바가지가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악취가 진동하는 검은 피가 단상 바닥을 더럽혔다.
“주, 주화입마가 아니다……!”
벽연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기적 그 자체였다.
검은 피가 멈추자마자, 환자의 붉게 뒤집어졌던 눈동자가 맑게 돌아왔다. 굳어 가던 관절들이 부드럽게 풀렸고 뒤틀렸던 경맥들이 기적적으로 완벽하게 정렬되었다. 환자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살았다…… 내가 살았어!”
광장은 쥐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정통 의학의 최고 천재라 불리던 벽연이 고쳐내지 못한 청낭방의 변이 독을, 창백한 안색의 도둑 소년이 거꾸로 침을 꽂는 변칙 역침으로 완벽하게 해독해 낸 것이다.
벽연은 바닥에 흩어진 검은 피와 환자의 정순해진 맥박을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패배감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비취 은침을 거두었다.
“내가…… 완패했다. 너의 침술은 사파의 마공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진짜 의술이 맞구나.”
벽연이 소하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소하의 누명을 벗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관중들이 들을 수 없도록 소하의 귀에 아주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밀어를 속삭였다.
“조심해라. 우리 가문 내부 깊숙한 곳에…… 독수 뇌진의 첩자인 당철(당철)이 숨어들어 암약하고 있다. 그가 너를 암살하기 위해 무색무취의 맹독 침을 준비하고 있다.”
소하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광장 모퉁이의 음침한 그늘 속에서 소하의 심장을 정 조준하는 차가운 살기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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