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지나간 자리
매캐한 불길이 청낭방 강남분타의 대들보를 집어삼키며 울부짖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기와 장포 사이로 붉은 화염이 독사처럼 혀를 낼름거렸다.
독수 뇌진의 시신은 단중혈이 꿰뚫린 채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진소하의 심장 한가운데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아란이가…… 살아있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실 태의령 조충헌의 손에 의해 뇌 신경을 지배당하는 붉은 살수로 개조되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중원 낙양성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비극적인 진실.
소하는 피로 물든 바닥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의 모세혈관이 파열되어 검붉은 멍이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뇌진의 독침을 강제로 받아내 개방한 오른쪽 발가락 끝 은백혈(隱白穴)에서는 뒤틀린 한독과 순양의 열독이 소용돌이치며 역천의 평형(逆天平衡)을 이루고 있었다. 단전의 폭주 수명은 삼백 일로 연장되었으나, 억지로 혈맥을 찢어발긴 대가는 참혹했다. 발목의 힘줄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파열되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끔찍한 고통이 다리를 타고 치솟았다.
“소하야! 정신 차려라! 불길이 서고 전체로 번지고 있다!”
유원이 청영검을 칼집에 쑤셔 넣으며 소하의 오른쪽 어깨를 부축했다. 그의 오른손목 역시 남궁태와의 비무와 살수들과의 난전으로 인해 인대가 파열되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벽연 역시 비취 은침통을 품에 안은 채, 창백해진 안색으로 소하의 왼쪽 다리를 지탱했다.
“은백혈을 강제로 열어 경맥이 뒤틀렸어. 지금 당장 운기조식을 하지 않으면 평생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몰라!”
벽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화재의 굉음 사이로 흩어졌다. 하지만 소하는 그녀의 경고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동생을 향한 절박함과 황실을 향한 파괴적인 살기만이 푸르게 일렁이고 있었다.
“낙양성으로 가야 한다…… 아란이가 그곳에 있어.”
“가더라도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지! 관군들이 몰려오고 있다!”
유원의 말대로였다. 분타 외곽 너머에서 수백 명의 철갑병들이 들이닥치는 둔탁한 발소리와 쇠사슬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남성 판관 팽무도가 지휘하는 관군 무리였다. 그들은 청낭방의 뇌물을 받고 소하에게 전염병 유포죄라는 대역죄 누명을 씌운 부패한 권력자들이었다. 분타를 겹겹이 포위한 관군들은 탈출로를 원천 봉쇄한 채, 화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역죄인 진소하와 사파의 무리들은 들어라! 분타를 통째로 불태워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 얌전히 기어 나와 목을 바쳐라!”
팽무도의 거만한 호령이 불길을 뚫고 날아들었다. 슈우우욱! 이윽고 수백 발의 화염 화살과 쇠뇌 볼트가 반파된 분타의 창문과 지붕을 뚫고 쏟아졌다.
“크윽! 내가 정면을 뚫어보겠다!”
유원이 이빨을 악물며 검포를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오른손목의 파열상 때문에 검강의 기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팅! 팅! 몇 발의 화살을 쳐내는가 싶더니, 이내 쏟아지는 쇠뇌의 풍압에 밀려 그의 가슴 방패 역할을 하던 검막이 쩌적 소리를 내며 찢겨 나갔다.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였다.
“여기서 고슴도치가 되어 죽을 수는 없어…….”
벽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불길은 이미 서고 입구까지 들이닥쳐 그들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소하는 청맥심술을 전개했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관군들의 심장 박동 소리와 팽무도의 탐욕스러운 숨소리가 삼차원으로 그려졌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분타 외곽의 동쪽 담장이 거대한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다. 관군들의 비명과 경악에 찬 노성이 불길을 뚫고 전해졌다.
“무, 무슨 짓이냐! 철도방의 무리들이 어찌 관군의 포위망을 타격하는가!”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거대한 무쇠 대도를 치켜든 거구의 사내가 포효하며 난입했다. 호랑이 가죽을 어깨에 걸친 사내, 철도방주 사웅(沙雄)이었다. 그의 등 뒤로 수백 명의 도끼 무사들이 관군의 동쪽 방어선을 사정없이 찍어 누르며 아수라장을 만들고 있었다.
사웅의 우람한 턱선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그의 시선이 불타는 건물 잔해 속에서 절뚝거리며 서 있는 소하에게 닿았다.
“진소하! 내 오늘 관군과 대적하여 무림의 대죄인이 될지언정, 네놈에게 진 목숨값은 반드시 갚겠다!”
과거 소하가 첫 번째 사혈을 개방하는 비무에서 사웅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그의 고질적인 기혈 막힘과 도법의 약점을 치료해 주었던 자비. 사웅은 그 뼈에 새겨진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관군과의 전면전이라는 파멸의 길을 선택하면서까지 소하를 구하기 위해 철도방 전체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사웅 방주…….”
소하의 입가에 미세한 실소가 흘렀다. 위선으로 가득 찬 정파 놈들보다, 도리를 아는 사파의 흑도가 더 쓸모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도록 통쾌했다.
“닥치고 이쪽으로 와라! 관군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사웅이 거대한 대도를 휘둘러 들이닥치던 관군 쇠뇌수 삼인의 목을 단숨에 베어 넘기며 퇴로를 열었다. 소하는 유원과 벽연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사웅의 뒤를 쫓았다.
사웅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분타 지하 깊숙한 곳의 비밀 약실 바닥이었다. 사웅이 바닥의 무거운 철제 석판을 들어 올리자, 음습하고 차가운 물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지하 수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수로는 과거 철도방과 청낭방이 관부의 눈을 피해 철광석과 금지된 약재를 밀거래하던 극비 수로다. 강남성 외곽의 양쯔강 지류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사웅이 소하의 어깨를 묵직하게 쥐었다.
“안으로 들어가라. 수로 끝에 대황상단의 마차 선박으로 통하는 쪽배를 준비해 두었다.”
“방주는 어찌하려는가?”
유원이 묻자, 사웅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도를 어깨에 걸쳤.
“내 걱정은 마라. 수로 입구를 무너뜨려 관군 놈들의 추격을 완전히 차단할 것이다. 강남 무림의 도리는 오늘 이것으로 다했다, 미치광이 의원 소년!”
쿠구구궁!
관군들이 지하 약실 입구까지 밀려들자, 사웅은 단호하게 화약을 장착한 벽면의 기둥을 도끼로 내리쳤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약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관군의 시야와 지하 수로의 입구를 완벽하게 매몰시켰다.
소하 일행은 어두컴컴하고 습한 지하 수로의 물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파열된 발목의 고통이 차가운 오수와 닿자 뼛속까지 시려왔지만, 소하는 이빨을 악물고 전진했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수로의 출구에 도달했을 때, 은은한 달빛이 안개 낀 양쯔강 지류를 비추고 있었다. 사웅의 말대로 그곳에는 작은 쪽배 한 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쪽배 내부에는 칠복이나 상단의 인부 대신, 온몸이 피칠갑이 된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대황상단의 말단 전령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
소란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전령의 맥을 짚었다. 그의 가슴에는 이빨로 뜯어발긴 듯한 기괴한 참격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전령은 흐려지는 눈동자로 소하의 푸른 도포 자락을 붙잡으며 마지막 숨을 쥐어짜냈다.
“진…… 진 소협…… 도망치십시오…… 팽무도가…… 관군으로 안 되자…… 황실 금고의 현상금을 걸고…… 혈랑대(血狼隊)의 대장…… 늑태(늑태)를 고용했습니다…… 그 늑대 놈들이…… 이미 이 강줄기를 포위하고…….”
전령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바람을 타고 피비린내와 함께 기괴한 야수의 울음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나직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더 잔혹하고 비열한 사냥개들이 소하의 목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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