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사혈, 은백혈을 뚫다
뇌진의 검붉게 물든 손가락 끝에서 자색의 걸쭉한 독기가 스팀처럼 뿜어져 나와 연무장 돌바닥을 ‘치이익’ 소리와 함께 녹여내기 시작했다.
연무장의 서늘한 밤공기가 자색 독무와 부딪치는 순간, 썩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빗물이 고인 돌바닥은 독기가 닿자마자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거품을 일으켰다. 독수 뇌진(毒手 雷震)의 성명절기, 만독부식수(萬毒腐蝕水)였다.
소하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팍을 단단히 누르고 있는 한빙 석판(한빙 석판)이 자색 독무의 미세한 열기와 반응하여 ‘치이익’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얼음 같은 극음의 냉기가 심장 주변을 감싸고 있었지만, 뇌진이 내뿜는 독기는 그 냉기 장막마저 부식시킬 만큼 음습하고 강력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여 석판이 손상된다면, 단전 내부의 역천의 평형(逆天平衡)이 깨져 그 자리에서 즉사할 터였다.
“진소하, 가련한 쥐새끼 놈.”
뇌진이 매부리코 아래로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안광은 밤눈이 밝은 뱀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네놈의 아비 진태경이 구양역맥의 비밀을 혼자 움켜쥐고 황실의 은혜를 거절했을 때부터 진가 세가의 파멸은 정해진 것이었다. 네놈의 그 기이한 혈맥은 사지가 잘려 태의령 조충헌 님의 약탕기 속에서 끓여질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얌전히 무릎을 꿇는다면 고통만큼은 줄여주마.”
“약탕기라…….”
소하가 피로 물든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서늘하게 실소했다. 가슴뼈를 안쪽에서부터 때려 부수는 듯한 뇌전 통증이 덮쳐왔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황실의 사냥개 노릇을 하며 민초들의 뼈를 갈아 불로장생 약재를 만들던 놈이 주둥이가 제법 길군. 뇌진, 네놈이 사웅과 결탁해 철광석을 밀거래하고, 그 대가로 청낭방의 인체 실험을 묵인받았던 그 추악한 장부는 이미 내 품속에 있다. 네놈의 목줄기가 잘려 강남 강물에 처박힐 때, 태의령 그자가 네놈의 시체를 거둬가 줄 것 같으냐?”
“이 빌어먹을 놈이……!”
뇌진의 노회한 안면이 순식간에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소하가 팽무도의 비밀 금고에서 탈취한 청낭방의 인체 실험 기록 장부는 뇌진의 명줄을 쥐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비밀이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뇌진의 전신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폭발했다.
“죽여라! 놈의 다리를 부러뜨려 생포해라!”
뇌진의 호령과 함께, 연무장 구석의 안개 속에서 자색 의복을 입은 청낭방의 정예 살수 삼인이 철검을 휘두르며 소하의 사지를 향해 쇄도했다.
“소하야, 물러서라!”
유원이 청영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앞으로 나섰다. 정순한 청운정기결의 내력이 검신을 타고 흐르며 은빛의 웅장한 검막을 형성했다. 짓쳐들던 살수들의 철검이 유원의 검막에 부딪쳐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벽연이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비취 은침 세 자루를 동시에 날렸다. 약선삼십육침의 비기가 공기를 가르며 쇄도하던 살수들의 전방 관절을 정확하게 저격했다. 침을 맞은 살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그러나 뇌진은 일류 살수들을 고기방패로 던져둔 채, 이미 소하의 사각지대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바람에 흩날리는 자색 연기처럼 기괴하고 빨랐다. 초일류 극성의 독공 수련자다운 압도적인 신법이었다.
“쥐새끼들끼리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하지만 내 만독부식수 앞에서도 그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지 보자!”
뇌진이 공중에서 손바닥을 내질렀다. 검붉은 독안개가 거대한 파도처럼 유원과 벽연의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으며 덮쳐왔다. 돌바닥이 녹아내리며 뿜어내는 유독 가스가 눈과 코를 찔렀다. 유원의 검막이 자색 독무에 닿자마자 치이익 소리를 내며 검기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면 방어는 불가능했다.
소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절뚝거리는 왼쪽 다리를 딛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붉게 물든 눈동자는 오직 뇌진의 오른손 끝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청맥심술(聽脈心術).
자색 독무의 거친 소음 속에서도, 소하의 예리한 청각은 뇌진의 전신 경맥 속에서 흐르는 독력의 마찰음을 완벽하게 포착해 냈다. 뇌진의 심장 박동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축축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 손가락 마디마디가 수축하는 순간, 소하는 11화에서 분석해 두었던 남궁태의 기혈 정지 주기를 떠올렸다.
명문 정파의 검술이든, 사파의 음독 침술이든, 강력한 암기를 격발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전신 경맥이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찰나의 구간이 존재한다. 뇌진의 어깨 기혈이 미세하게 수축하며 정지 주기에 접어드는 소리가 소하의 고막을 때렸다.
‘지금이다.’
뇌진이 소하의 단전을 파괴하기 위해 최정예 벽혈독침(壁血毒針) 세 자루를 동시에 격발했다.
피처럼 붉은 광채를 띤 세 자루의 독침이 자색 독무를 뚫고 소하의 이마와 심장, 그리고 단전을 향해 살인적인 속도로 날아들었다. 침 끝에 묻은 극독은 뼈를 녹여버릴 만독부식수의 정수였다. 스치기만 해도 전신 경맥이 부식되어 즉사할 최악의 위기였다.
유원과 벽연이 경악하며 소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독침의 비행 속도는 이미 인간의 반응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소하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찢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생존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소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자신의 뼈와 관절을 순간적으로 탈구시키는 골격 이탈술(骨格 脫臼術)을 전개했다.
드드득!
소하의 어깨와 허리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신형이 허공에서 찰나의 순간 옆으로 기울었다. 그와 동시에 육참골단(肉斬骨斷)의 보법이 전개되었다. 뼈를 내어주고 적의 살을 취한다는 기만 보법. 소하는 일부러 자신의 급소인 심장과 이마를 노리던 독침 두 자루의 궤적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냈다.
슈우욱! 콰아아악!
흘려보낸 두 자루의 독침이 소하의 양옆을 지나 뒤편의 무거운 석조 기둥에 박혔다. 석조 기둥이 독기에 부식되어 순식간에 검은 진흙처럼 녹아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자루의 붉은 독침.
소하는 발끝을 1인치 비틀어, 그 독침의 비행 궤적 끝에 자신의 오른쪽 발가락 끝을 정확하게 대어주었다.
사혈 유도술(死穴 誘導術).
족궐음간경의 시작점이자, 구양역맥의 두 번째 사혈인 은백혈(隱白穴)이 위치한 곳이었다. 역천침보의 침술 구결에 따라 뼈와 근육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완벽한 각도였다.
푸학!
붉은 독침이 소하의 발가락 끝 은백혈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날카로운 극통이 전신 신경망을 타고 소하의 뇌리를 강타했다. 뇌진의 만독부식수 독기가 은백혈을 타고 소하의 다리 경맥으로 빠르게 침투해 들어왔다. 전신의 피가 얼어붙고 세포가 녹아내리는 듯한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소하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크하하하! 어리석은 놈! 스스로 내 침을 발가락으로 받다니 자멸을 재촉했구나!”
뇌진이 승리를 확신하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하의 굳어 있던 은백혈의 질긴 봉인막이, 뇌진이 전력으로 날린 독침의 강력한 외력에 의해 쩌적 소리를 내며 완전히 찢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웽-!
소하의 발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평범한 붉은색이 아니었다. 단전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뜨거운 순양의 정수, 구양진액(九陽津液)이 폭발하듯 역류하여 솟구쳤다. 제2사혈 은백혈이 개방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소하의 전신 경맥이 기적적으로 재정렬되기 시작했다. 가슴에 장착된 한빙 석판의 차가운 극음 냉기와, 단전에서 터져 나온 순양의 열기가 은백혈이라는 거대한 기혈의 통로를 통해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푸른 한독과 붉은 열독이 경맥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피부 위로 요동치던 기괴한 핏줄들이 일제히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며 맑은 청색의 광채를 뿜어냈다.
단전 폭주 수명이 300일로 늘어나는 위대한 혈맥의 진화가 소하의 육체 내부에서 완성되었다.
“무, 무슨……! 내 만독부식수가 어째서 역류하는 것이냐!”
뇌진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소하의 은백혈 상처를 통해 주입되려던 자신의 독력이, 소하의 폭발적인 구양진액의 힘에 사정없이 빨려 들어가 정화되고 있었다. 만맥흡기결의 기전이 뇌진의 독력마저 내공의 기초로 흡수해 버린 것이다.
“뇌진.”
소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고통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갑고 고요한 대종사의 안광이 서려 있었다.
“가문의 원수를 갚을 시간이다.”
소하는 오른손 끝을 튕겼다. 청동 침통에서 은침 한 자루가 소리 없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경맥 역류 충격파(經脈 逆流 衝擊波).
소하는 뇌진에게 빼앗은 독력과 자신의 구양진액을 융합하여 역방향으로 은침에 실어 보냈다.
슈우우욱!
은침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단순한 침격이 아니었다. 붉은 화염과 청색의 냉기가 뒤엉킨 무시무시한 기공의 충격파가 은침의 궤적을 따라 소용돌이쳤다.
뇌진이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호체강기를 전개하려 했으나, 소하의 정밀한 침격은 이미 그의 손가락 사이 기혈 정지 구간을 꿰뚫고 있었다.
퍽!
은침이 뇌진의 호체강기를 종이장처럼 찢어발기며 그의 가슴 중앙, 단중혈(膻中穴)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뇌진의 거구의 체구가 뒤로 날아가 연무장 벽면에 거칠게 처박혔다.
“커, 커헉……!”
뇌진이 한 움큼의 검은 피를 토해내며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전신 경맥이 소하가 주입한 충격파에 의해 안쪽에서부터 완전히 파열되어 있었다. 독공의 대종사라 불리던 자의 최후는 처참했다.
소하가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쓰러진 뇌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뇌진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네, 네놈…… 괴물 같은 놈…….”
뇌진이 피눈물을 흘리며 소하의 자락을 붙잡으려 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더 이상 자색 독기는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여동생…… 진아란의 행방을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네놈의 사지를 침으로 찔러 만 번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만들겠다.”
소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의 손끝에 들린 또 다른 은침이 뇌진의 미간을 조준했다.
뇌진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기괴하게 웃기 시작했다. 피 섞인 조롱이었다.
“크크크…… 아란이? 그 불쌍한 아이는…… 죽지 않았다.”
“……!!”
소하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태의령 조충헌 님께서…… 그 아이의 뇌 신경에 붉은 침을 꽂아…… 완벽한 살수로 개조하셨지. 지금쯤…… 중원 낙양성(洛陽城)의 지하 깊은 곳에서, 네놈의 목을 베기 위해 칼날을 갈고 있을 것이다…… 크학!”
뇌진이 마지막 피를 토해내며 고개를 툭 꺾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가문을 참살한 주범이자 청낭방주인 독수 뇌진의 비참한 최후였다.
연무장 사방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원과 벽연이 경악 어린 눈빛으로 소하를 바라보았다.
소하는 피로 물든 바닥에 주저앉아, 두 번째 사혈 은백혈이 열린 다리를 움켜쥐었다. 수명은 300일로 늘어났고 가문의 원수는 단죄했으나, 여동생 아란이 살아있으며 자신을 죽일 살수로 개조되었다는 절망적인 진실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
중원 낙양성, 그 거대한 어둠이 소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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