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들의 문턱을 넘다
백골총의 음습한 흙먼지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진소하는 검은 청낭포 자락을 휘날리며 강남성 서쪽 외곽으로 신형을 날렸다. 허리춤에 매달린 녹슨 청동 침통이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냈다. 왼쪽 허벅지 경맥에 잔존한 가시독의 마비 통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뼛속을 쑤셔댔고, 가슴팍을 짓누르는 차가운 한빙 석판은 심장 주변의 온기를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소하의 안광은 그 어느 때보다 서슬 퍼렇게 빛났다. 여동생 아란이 살아있다는 당철의 유언, 그리고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간 황실 태의원의 추악한 인체 실험 기록 장부.
모든 진실의 실타래가 청낭방 강남분타의 철문 너머에 있었다.
“정말 이대로 정문을 부수고 들어갈 셈이냐?”
소하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청운검파의 후기지수, 유원이었다. 그의 손은 이미 등 뒤에 메어 둔 명검 청영검의 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유원의 맑은 눈빛에는 명문정파의 협객다운 강직함과 동시에, 눈앞의 시한부 소년이 보여주는 광기 어린 투지에 대한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에메랄드빛 장포를 걸친 약선 가문의 천재 소저, 벽연이 비취 은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서 있었다. 벽연의 차가운 안색에는 가문 내부의 배신자 당철에 대한 분노와, 소하의 변칙적인 역침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의원으로서의 복잡한 심경이 교차하고 있었다.
“도망칠 퇴로는 없다. 저들이 먼저 혜민원이라는 위선의 탈을 쓰고 민초들의 피를 빨았으니, 이제 그 문턱을 피로 물들여줄 차례다.”
소하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쿠웅-!
유원이 청운정기결의 정순한 내력을 실어 발끝으로 청낭방 강남분타의 거대한 묵철문을 걷어찼다.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 안개 사이로, 자색 의복을 입은 청낭방의 사설 칼잡이 수십 명이 철검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분타 내부의 경보 종소리가 요란하게 밤하늘을 찢었다.
“대역죄인 진소하가 나타났다! 놈의 사지를 끊어 생포해라!”
“죽여라!”
사방에서 짓쳐드는 검날들이 뿜어내는 서슬 퍼런 검기가 소하의 전신을 옥죄었다.
스으윽- 팟!
유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청운십삼검(靑雲十三劍)의 초식을 전개했다. 정순한 도가 진기가 청영검의 검신을 타고 흐르며 은빛의 거대한 검막을 형성했다. 짓쳐들던 청낭방 칼잡이들의 철검들이 유원의 검막에 부딪쳐 쇠비름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유원의 검초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여, 소하의 양옆과 등 뒤에서 날아오는 모든 살인적인 궤적을 완벽하게 격파해 냈다.
“벽연, 기혈을 묶어라!”
소하가 낮게 호령하며 허리춤의 침통을 열었다.
벽연의 비취 은침이 허공을 갈랐다. 그녀가 전개한 약선삼십육침의 비기가 적들의 전방 관절을 정확히 저격했다. 침이 박힌 칼잡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는 찰나, 소하가 청동 침통에서 대장장이 임철수가 특별히 단조해 준 자성 은침(자성 은침) 수십 개를 꺼내 들었다.
소하의 손끝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자성 모래와 고순도 묵철을 합금하여 만든 특수 은침들. 소하가 미세한 진기를 주입해 은침들을 허공으로 뿌렸다.
백혈 침우(百血 針雨)!
수십 개의 은침이 허공으로 방출되는 순간, 기이한 물리적 현상이 발생했다. 은침들 고유의 자성(자기장)이 서로를 밀쳐내며 허공에서 거대한 부채꼴 모양의 장막을 형성했다. 날아오는 적들의 암기와 칼날들이 은침 장막이 내뿜는 강력한 인력과 척력에 반응하여 궤적이 뒤틀려 바닥에 처박혔다. 적들의 인해전술이 은침의 장막 앞에서 일시적으로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저, 저게 무슨 괴이한 침술이냐!”
청낭방 무사들이 경악하며 주춤거리는 사이, 저택 지붕 위 어둠 속에서 쇠뇌를 장전하는 둔탁한 소리가 소하의 귀에 걸렸다.
청맥심술(聽脈心術).
시각을 차단하듯 눈을 가늘게 뜬 소하의 뇌리에, 지붕 위 매복한 궁수 삼인의 거친 심장 박동과 쇠뇌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삼차원 지도로 정밀하게 그려졌다.
소하는 손을 대지 않았다. 실제 침을 쥐지도 않았다. 오직 손가락 끝을 허공을 향해 가볍게 튕겼을 뿐이었다.
침경 초입의 내력이 그의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었다.
무형침 격발(無形針 擊發)!
물리적인 형태도, 파공음도 없었다. 고도로 응축된 기공의 침이 허공의 아지랑이처럼 번뜩이며 지붕 위로 날아갔다.
퍽! 퍽! 퍽!
지붕 위에 숨어 있던 궁수 삼인의 백회혈(百會穴)과 대추혈(大椎穴)이 정확하게 관통당했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쇠뇌를 떨어뜨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보이지 않는 침격에 청낭방 무사들의 진형이 단숨에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무형의 기공 침을 연사한 대가는 즉각적으로 찾아왔다.
쿵!
소하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요동쳤다. 단전 내부에서 대치하고 있던 구양 열독과 한빙 석판의 차가운 냉기의 균형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역천의 평형이 흔들리는 극심한 뇌전 통증이 가슴뼈를 안쪽에서부터 사정없이 때려 부쉈다.
“으윽……!”
소하가 각혈을 하며 한쪽 무릎을 꿇을 뻔했다.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루 시전 제한 한계에 도달한 단전이 붕괴하려는 전조였다.
“소하야!”
벽연이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부축하려 했으나, 소하는 손을 저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는 턱에 흐르는 피를 청낭포 소맷자락으로 훔쳐내며, 다시 한번 이빨을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동생을 구하겠다는 광기 어린 집착이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멈출 수 없다. 원수의 목줄기를 따기 전까지는.”
소하가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분타의 마지막 회랑을 지나 중앙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유원과 벽연이 그의 좌우를 삼엄하게 호위하며 지켰다. 연무장 바닥은 이미 짙은 자색 안개와 음산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무장 중앙, 횃불 그림자 사이로 한 사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색 태의관복을 걸치고, 매부리코 아래로 독사 같은 음산한 미소를 띤 노회한 중년인. 소하의 가문을 참살하고 그의 특이 혈맥을 포획하려 했던 만악의 근원이자 청낭방주, 독수 뇌진(毒手 雷震)이었다.
뇌진의 검붉게 물든 손가락 끝에서 자색의 걸쭉한 독기가 스팀처럼 뿜어져 나와 연무장 돌바닥을 ‘치이익’ 소리와 함께 녹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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