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촌의 자색 안개
소란의 뜨거운 눈물이 소하의 창백한 가슴팍에 떨어져 얼어붙은 서리꽃을 적셨다. 심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삼도은침의 미세한 균열 소리는 소하의 귓전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수명은 이제 고작 구십 일 남짓. 그러나 운명을 한탄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파릉현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뚫고, 멀리서 추적 사냥개들의 축축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벽혈위의 정예 살수들이 마침내 이 외딴 어촌 마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소하가 각혈한 피를 거칠게 훔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심맥 봉쇄의 여파로 전신의 기력이 바닥나 있었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생존을 향한 서늘한 광기로 번뜩였다. 자신들을 따뜻하게 대접해 준 가난한 어부들에게 화를 미치게 할 수는 없었다. 적들을 유인해야 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단단한 풍채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과거 소하에게 다리 통증을 치료받았던 퇴역 군인, 맹한이었다.
“소협, 은혜를 갚을 때가 왔군. 자네의 수배령을 듣고 내 퇴역 군인 동료들을 은밀히 소집했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역병으로 버려진 무인 가옥 지대인 고가촌(古家村)이 있네. 그곳에 군사적 지연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으니, 그리로 적들을 유인하세.”
소하는 맹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란과 허팽을 백발어옹의 배에 숨겨 안전한 수로로 대피시킨 뒤, 소하는 맹한과 함께 고가촌의 음산한 폐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역병으로 버려진 고가촌은 죽음의 침묵만이 흐르는 땅이었다. 무너져 내린 목조 가옥들 사이로 자욱한 밤안개가 장막처럼 깔려 있었고, 썩은 기와지붕들은 괴괴한 귀신들의 형상처럼 서 있었다.
스스스스.
안개 너머로 기척을 완전히 지운 그림자들이 고가촌을 겹겹이 포위해 왔다. 은색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벽혈위의 총대장, 은사조가 손짓하자 그의 양옆에서 두 명의 일류 조장이 살기를 뿜어냈다.
붉은 가죽 안대를 쓴 혈침(血針)과 부식 독공을 구사하는 독혈(毒血)이었다. 벽혈위 최정예 조장들이 소하의 목을 베기 위해 좁은 골목길을 옥죄어 왔다.
“진소하,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은사조의 차가운 쇳소리가 안개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혈침과 독혈이 양방향에서 동시에 침격을 날렸다. 혈침의 손끝에서 붉은 흡혈은침이 기괴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왔고, 독혈은 강철도 녹여버릴 만독부식침을 쏘아 보냈다.
소하는 급히 신형을 비틀어 피하려 했으나, 전날 밤 누적된 한독의 오한 때문에 왼쪽 무릎이 미세하게 지체되었다.
퇘액!
혈침이 날린 흡혈은침 한 자루가 소하의 우측 어깨 경맥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는 미세했으나, 침에 묻은 폭혈공의 기운이 혈관을 직접 타격했다. 순간 전신의 피가 일시적으로 머리를 향해 역류하며 극심한 현기증이 소하의 뇌리를 강타했다. 눈앞이 핑 돌며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지금이다! 맹한!”
소하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수풀 속을 향해 소리쳤다.
지붕 위에 매복해 있던 맹한이 단호하게 신호줄을 끊었다.
쿠구구궁!
도적들이 딛고 서 있던 낡은 가옥의 기와지붕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수십 개의 무거운 낙석과 썩은 목조 대들보들이 굉음을 내며 살수들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자욱한 돌가루와 흙먼지가 안개와 뒤섞이며 벽혈위의 정예 대형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크아악!”
낙석에 깔린 하급 살수들의 비명이 고가촌의 침묵을 찢었다. 혈침과 독혈 역시 갑작스러운 군사 함정에 당황해 뒤로 물러서며 진형을 잃었다.
소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단전 깊은 곳에 가둬두었던 구양진액의 뜨거운 순양 열기를 전신의 피부로 뿜어냈다.
열독 기화공(熱毒 氣化功)!
체내에 축적되어 있던 만독초의 치명적인 마비 독소들이 단전의 고열에 연소되며 전신의 땀구멍을 통해 기화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자색의 짙은 독무가 소하의 신형을 중심으로 분출되어 반경 십 보 안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소하의 비기, 약무무(藥霧霧)였다.
“독무다! 호흡을 멈춰라!”
독혈이 소리치며 자신의 품속에서 부식성 산성 독액이 담긴 녹옥 병을 꺼내 들었다. 독무를 독무로 상쇄하여 소하의 위치를 강제로 드러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소하는 이미 눈을 감고 귀를 열어둔 상태였다.
심안 청각술(心眼 聽聽術).
자색 안개로 인해 시야가 완벽히 차단된 어둠 속에서, 소하의 귀에는 독혈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 소리와 녹옥 병의 마개 가죽이 마찰하는 미세한 소리가 삼차원 공간의 좌표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두근. 두근. 두근.
‘바로 저기다.’
소하는 허리춤의 청동 침통에서 자성 은침 한 자루를 뽑아 손가락 끝으로 강하게 튕겼다.
탄지기침(彈指氣針)!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뚫고 날아간 은침은 독혈이 녹옥 병을 치켜든 순간, 그의 목덜미 정중앙에 위치한 천돌혈(天突穴)을 정확히 관통했다.
퍽!
“……컥!”
독혈의 목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 경맥이 완벽하게 마비되었다. 침 끝에 묻어 있던 만독초의 마비독과 소하의 진기가 그의 폐맥을 관통하며 흐름을 완전히 차단했다. 독혈이 통제력을 잃자, 그의 체내에 흐르던 만독화골공의 독기가 역류하여 스스로의 장기를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콰아아악!
독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이 시커넓게 녹아내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자폭에 가까운 비참한 최후였다.
“독혈!”
은사조가 경악 어린 외침과 함께 뒤로 신형을 날렸다. 동료의 처참한 죽음과 소하의 기괴한 심안 침술에 겁을 먹은 벽혈위의 남은 살수들은 서둘러 안개 속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고가촌의 자색 안개 속에는 오직 부식된 시체들과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가혹했다.
“……하아, 으극!”
소하가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짚었다. 전신의 땀구멍을 통해 독소를 강제로 기화시키느라 단전의 모든 내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경맥 벽 곳곳에는 극심한 고열로 인한 화상 균열이 누적되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단전 내부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구양의 열독과 한빙 석판의 만년 한기의 균열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치이이익!
소하의 전신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체온이 40도 이상으로 급격히 치솟기 시작했다.
“커헉……!”
소하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피 속에는 하얀 서리 조각들이 섞여 있었다. 단전이 스스로 팽창하며 대폭발을 일으키려는 무서운 파동이 전신을 덮쳐왔다. 소하는 가슴을 움켜쥔 채 자색 안개 속으로 쓸쓸히 쓰러졌다.
제1차 단전 대폭주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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