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혜민원
비가 그친 강남성(江南城)의 오후는 음습한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성내 서쪽 외곽, 슬럼가의 무너져가는 기와지붕들 사이로 가난한 병자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거대한 목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혜민원(惠民院).
가난하고 병든 민초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준다는 청낭방(靑囊房)의 본거지이자, 강남 무림인들이 인술(仁術)의 성지라 우러러보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명성 아래 도사린 실체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 도살장이었다.
스사사삭.
혜민원 뒤편, 오수와 쓰레기가 뿜어져 나오는 더러운 배수관로의 어둠 속에서 푸른 도포를 눌러쓴 그림자가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진소하였다. 소란이 지어준 청낭포(靑囊袍)는 하수도의 진흙과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으나, 도포 내부에 스며든 약재 향은 지하 감옥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약물 냄새를 간신히 차단해 주고 있었다.
“콜록, 쿨럭…….”
소하가 소매로 입을 틀어막으며 낮게 기침을 토해냈다. 열독 기화공을 무리하게 시전한 여파로 목덜미와 손목의 피부가 화끈거리며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게다가 남궁태의 검강 파편에 스친 왼쪽 허벅지의 가시독 마비 증상과 왼쪽 뺨의 미세한 자상은 그의 기동력을 평소보다 무겁게 옭아매고 있었다.
심장 깊은 곳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개의 삼도은침(三道銀針)이 찌르르한 진동을 울리며 경고를 보냈다. 단전 내부의 구양진액(九陽津液)이 요동치고 있었다. 수명은 이제 겨우 구십 일 남짓.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자신을 도우려다 청낭방 놈들에게 납치당한 조수 허팽(허팽)을 구하지 못한다면, 스스로가 가문을 멸망시킨 태의원의 괴물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는 자책감이 소하의 이성을 차갑게 조율했다.
‘허팽의 탕약 주머니에서 나던 냄새…… 백혈청안단(白血靑眼丹)이 틀림없어.’
소하는 어두운 지하 배수관의 벽면에 몸을 밀착시켰다. 지하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흘러나오는 비릿하고도 음습한 약물 냄새는 허팽의 주머니에 묻어 있던 독소의 흔적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민초들의 경맥을 강제로 굳혀 생체 실험체로 부리는 청낭방의 추악한 도살장이 바로 이 아래에 있었다.
소하는 허리춤에서 녹슨 청동 침통(녹슨 청동 침통)을 가만히 매만졌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그의 살기를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잔여 은침 97개.
축축하고 어두운 석조 계단을 딛고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자, 횃불 그림자 사이로 쇠창살이 촘촘히 박힌 감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창살 너머에 갇힌 민초들은 하나같이 눈동자가 푸르게 변한 채, 전신의 관절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 신음하고 있었다. 청낭방주 독수 뇌진(毒手 雷震)이 자행한 잔혹한 인체 실험의 피해자들이었다.
소하는 신형을 숨기며 가장 깊숙한 독실(獨室) 앞으로 다가갔다. 두꺼운 무쇠 자물쇠로 잠긴 감옥 철창 너머, 쇠사슬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허팽이었다.
“팽아…….”
소하가 창살 틈새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허팽은 간신히 눈을 뜨며 소하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백혈청안단의 독기에 노출되어 미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스, 스승님……?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어찌 이런 지옥까지…… 어서 도망치십시오. 저들은 스승님의 구양역맥을 노리고…….”
“시끄럽다. 숨이나 똑바로 쉬어라.”
소하는 차갑게 쏘아붙이며 청동 침통에서 은침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자물쇠의 정밀한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귀를 열었다.
청맥심술(聽脈心術).
자물쇠 내부의 미세한 기공 핀들이 맞물려 있는 소리가 고막을 타고 삼차원으로 그려졌다. 소하는 은침 끝에 미세한 진기를 실어 자물쇠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툭, 투웅. 침 끝으로 기공 핀을 정밀하게 튕겨내자, 둔탁한 철컥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쇠 자물쇠가 허무하게 풀려나갔다.
철창 문을 열고 들어가 허팽의 쇠사슬을 부수려던 찰나였다. 소하가 철창 창살에 손을 대려 하자, 미세한 공기의 진동이 그의 손끝을 스쳤다.
‘기공 경보선……!’
소하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창살 틈새마다 머리카락보다 얇은 미세한 진기 실들이 얽혀 있었다. 무력으로 철창을 파괴하려 했다면 진기가 마찰하여 분타 전체에 비상 경보가 울렸을 터였다. 소하는 침착하게 은침 한 자루를 꺼내 경보선이 시작되는 벽면의 기공 요처를 찔러 진기의 흐름을 소리 없이 무력화시켰다.
자칫하면 수백 명의 사설 칼잡이들이 몰려와 가사 상태에 빠지기도 전에 고사당할 뻔한 위기였다. 소하는 무기를 사용한 전투를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정밀한 침술로만 상황을 제어해야 함을 다시 한번 뇌리에 새겼다.
그때였다.
터벅, 터벅, 터벅.
지하 복도 저편에서 묵직한 가죽 장화 소리와 함께 횃불의 불빛이 일렁였다. 무거운 무쇠 철퇴를 어깨에 멘 청낭방의 정예 간수 세 명이 순찰을 돌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방금 지하 3호실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나?”
“기분 탓이겠지. 그 약골 의원 녀석은 이미 백혈청안단을 주입받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텐데.”
간수들이 쇠창살을 철퇴로 거칠게 두드리며 소하가 있는 독실 앞으로 빠르게 좁혀왔다. 기척을 숨길 엄폐물이 없는 일촉즉발의 사지(死地)였다. 간수들이 독실 내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소하의 창백한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누구……!”
가장 앞장서던 간수가 철퇴를 치켜들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소하의 손끝이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무형침 격발(無形針 擊發).
물리적인 침을 튕기기도 전에, 고도로 응축된 기공의 보이지 않는 침격이 첫 번째 간수의 성대 기혈(聲帶 氣穴)을 관통했다. 컥, 하는 둔탁한 바람 소리와 함께 간수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지워졌다.
동시에 소하는 청동 침통에서 만독초(萬毒草) 액을 바른 자성 은침 두 자루를 양손 끝으로 튕겨냈다.
독침 마비술(毒針 麻痹術)!
스윽, 쇽!
정교하게 날아간 두 자루의 독침이 남은 두 간수의 목덜미 아문혈(啞門穴)에 오차 없이 박혔다.
“아……!”
간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침이 박힌 피부 주변이 순식간에 푸른빛으로 변하며 온몸의 근육이 돌처럼 굳어 쓰러졌다. 철퇴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소하가 신형을 날려 철퇴를 발끝으로 받아내며 소리 없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파샤샤샷!
찰나의 순간에 고도의 정밀 침술을 연사하느라 소하의 양손 끝 모세혈관이 일시적으로 파열되었다. 손톱 밑으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오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검붉은 멍으로 물들었다. 뼛속을 찌르는 통증이 밀려왔으나 소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쓰러진 간수의 품을 뒤져 감옥 열쇠를 탈취했다.
“스승님…… 손이…….”
허팽이 눈물을 흘리며 소하의 피 묻은 손을 바라보았다. 대역죄인으로 쫓기는 처지임에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이 터져나가는 통증을 감수하는 스승의 처절한 모습에, 소년의 가슴속에는 평생 물리적으로 갚지 못할 거대한 의리와 충심이 새겨졌다.
“닥치고 가만히 있거늘.”
소하는 허팽의 발목을 묶고 있던 무쇠 쇠사슬의 연결 고리를 은침으로 정밀하게 타격해 박살 냈다. 그리고 감옥 구석에 쌓여 있던 백혈청안단 상자들을 발길질로 깨부수어 끔찍한 독약들을 오수 바닥에 쏟아버렸다.
“장부를 찾아야 해. 청낭방의 인체 실험 기록(靑囊房의 人體 實驗 記錄)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
소하의 청맥심술이 독실 안쪽의 벽면에서 미세한 빈 공간의 울림을 포착했다. 벽돌 하나를 밀어젖히자, 피에 젖은 가죽 장부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낭방이 강남성 민초들을 실험체로 삼아 백혈청안단의 치명률을 기록해 둔 결정적 범죄의 증거물이었다.
소하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장들을 넘길 때마다 민초들의 비참한 사망 기록과 가문의 원수 독수 뇌진의 잔혹한 필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장부의 가장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였다.
소하의 안광이 서리발처럼 얼어붙었다.
그곳에는 가문의 멸문 당일 쓰였던 붉은 밀서의 낙인과 동일한, 황실 태의원(太醫院)의 공식 수인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황실 태의령 조충헌(趙充憲)의 이름과 함께, 가문 진가(秦家)를 참살하고 소하의 구양역맥 체질을 생포하라는 극비 지령서 사본이 완벽하게 철해져 있었다.
‘가문의 멸문은…… 태상황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우리 가문의 피를 수확하려던 황실 태의원의 철저한 기획이었어.’
장부의 마지막 장, 붉은 인장 너머로 드러난 가문의 참혹한 진실을 움켜쥔 소하의 눈동자에, 단전을 통틀어 가장 서늘하고 잔혹한 광기가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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