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보에 그려진 얼굴
두두두두둥―!
강남성(江南城)의 정적을 깨뜨리는 거대한 경보 종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태가 대로변에 쓰러져 비명을 지른 지 반 각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흐린 하늘 아래로 찌푸린 먹구름이 내려앉은 강남성의 대로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대역죄인이다! 전염병을 퍼뜨리고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습격한 마두가 도주했다! 성문을 봉쇄하라!”
갑옷을 갑갑하게 차려입은 관군들의 거친 호령이 사방에서 빗발쳤다. 창을 꼬나쥔 병사들이 대로변을 메우기 시작했고, 민초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골목 어둠 속으로 몸을 피한 진소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콜록! 쿨럭……!”
청낭포(靑囊袍) 자락을 쥔 손 끝으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는 차가운 바람에 금세 식어갔지만, 단전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구양진액(九陽津液)의 열기는 전신 경맥을 태워버릴 듯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가슴팍에 밀착된 한빙 석판(寒冰 石板)의 극음 한기가 심장 주변을 얼려대며 간신히 자폭의 임계점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남궁태의 검강 파편에 스쳐 찢어진 소맷자락과 왼쪽 뺨의 미세한 자상에서는 여전히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소하야, 지상으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팽무도(팽무도) 그 부패한 판관 놈이 청낭방과 남궁세가의 압박을 받고 아예 강남성 전체를 뒤집어엎을 작정인 모양이야.”
어둠 속에서 때에 찌든 누더기 장포를 걸친 사내가 대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급히 다가왔다. 개방 출신의 정보꾼, 풍개(풍개)였다. 그의 영악한 눈동자에는 전례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유원 역시 장검을 꽉 쥔 채 소하의 등 뒤를 호위하며 골목 너머 관군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팽무도가 직접 움직였다는 말인가?”
소하의 목소리는 서리발처럼 차가웠다. 왼쪽 허벅지에 박힌 가시독의 마비 통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를 쑤셔댔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냉철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뇌물에 환장한 판관 놈이 남궁태의 울부짖음을 듣자마자 성내의 모든 관군을 소집했다. 네 얼굴이 그려진 벽보가 벌써 성문마다 붙기 시작했어. 누명도 아주 기가 막히더군. ‘전염병을 유포해 민초들을 학살하려는 사파의 마두’란다. 지상으로 나가려다간 백 보도 못 가 쇠뇌 세례를 맞고 고슴도치가 될 거다.”
풍개가 품속에서 낡은 가죽 지도를 꺼내 들었다.
“남쪽 관문으로 가려던 계획은 버려야 해. 팽무도가 직접 지휘하는 철제 바리케이드 검문소가 남문 대로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위병들뿐만 아니라 청낭방의 사설 칼잡이들까지 쫙 깔렸어.”
소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열었다.
청맥심술(聽脈心術).
대로변 너머에서 수백 명의 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거친 발소리, 쇠사슬이 찰랑이는 소리, 그리고 팽무도의 직인이 찍힌 현상 수배 벽보를 성벽에 풀칠해 붙이는 둔탁한 소리가 고막을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형국이었다. 공식적인 신분이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이상, 지상의 빛나는 대로는 더 이상 소하의 길이 아니었다.
“지하로 간다.”
소하가 눈을 뜨며 나직하게 뱉었다.
“지하라고? 설마 강남성 밑바닥을 흐르는 오수 하수도를 말하는 거냐?”
유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림의 고결한 협객으로서 오물이 가득한 지하 하수도로 기어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굴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하의 입꼬리는 서늘하게 비틀렸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똥통 속이라도 기어야지. 유 협객, 명문정파의 고결한 자존심을 지키다 관군의 화살받이가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내 생각이 짧았군. 가자.”
유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풍개가 앞장서서 골목 구석의 낡은 철제 덮개를 대나무 지팡이로 들어 올렸다. 덮개가 열리자 썩은 냄새와 축축한 냉기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왔다. 소하는 주저 없이 그 어둡고 냄새나는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툭, 투웅.
어두운 하수도 바닥에 상륙한 소하의 장화 밑창으로 끈적이는 오수와 진흙이 밟혔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불규칙한 맥박처럼 울려 퍼졌다. 냄새가 지독해 후각을 자극했지만, 오히려 이 지독한 악취야말로 적들의 감각 추적을 차단할 최고의 방패였다.
짖는 소리!
그때, 머리 위 지상에서 추향견(追香犬)들의 사나운 짖음 소리가 철제 덮개 틈새를 뚫고 하수도 내부로 울려 퍼졌다.
왈! 왈! 왈왈!
“벌써 사냥개들을 풀었군! 팽무도 그 탐욕스러운 돼지 같은 놈, 일 처리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네.”
풍개가 하수도 벽에 몸을 밀착시키며 혀를 찼다.
소하는 품속을 더듬었다. 얼마 전 처단한 태의원의 살수 사마귀에게서 빼앗은 붉은 철패, 벽혈령(壁血令)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붉은빛을 흘리고 있었다. 사마귀의 피가 묻은 이 철패 내부에는 태의원 본원과 공명하는 미세한 기공 진법과 함께, 사냥개들이 반응할 수 있는 특수한 사향(麝香) 향료가 입혀져 있었다.
‘이 냄새를 쫓아온 것이군.’
소하는 차갑게 미소 지으며 벽혈령을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바닥에 흐르는 더럽고 축축한 오수 진흙 속으로 철패를 사정없이 처박았다.
치이이익.
철패에 묻어 있던 태의원의 사향 향료가 하수도의 썩은 오물과 유황 성분의 진흙에 씻겨 내려가며 기괴한 거품을 일으켰다. 지독한 오수의 악취가 사향의 미세한 파동을 완벽하게 덮어버린 것이다.
지상에서 미친 듯이 짖어대던 추향견들의 울음소리가 순간 갈팡질팡하더니, 이내 엉뚱한 방향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추적의 실마리를 완전히 끊어버린 순간이었다.
“흐흐, 역시 독종이로군. 하수도 오물로 태의원의 추적령을 지워버리다니.”
어둠 속에서 굵직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수도 저편의 꺾임 길에서 횃불 하나가 켜지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자국 가득한 거친 얼굴에 참마도(斬馬刀)를 어깨에 멘 사내, 삼라파(三羅派)의 행동대장 마칠(마칠)이었다. 그의 등 뒤에는 삼라파의 정예 칼잡이 수십 명이 은밀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마칠, 약속대로 길을 열어두었겠지?”
소하가 창백한 안색으로 마칠을 응시했다. 마칠은 소하의 독침 무공에 제압당해 강제로 해독제를 얻기 위해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으나, 최근 소하가 강남 무림을 뒤흔드는 광기 어린 통찰력을 보며 내심 깊은 경외감을 품고 있었다.
“당연하지. 우리 삼라파가 이 강남성 밑바닥 하수도 지리는 관군 놈들보다 백 배는 더 잘 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관군의 수색망을 우회해 성외 외곽의 안전가옥으로 바로 빠져나갈 수 있어.”
마칠이 앞장서며 횃불로 어두운 수로를 비추었다. 풍개가 건네준 비밀 수첩의 지도와 마칠의 실전 지리가 완벽하게 결합하자, 하수도의 복잡한 미로는 훌륭한 탈출로로 변모했다.
그렇게 하수도 음지를 따라 반 시진쯤 기어갔을 때였다. 수로 끝자락의 지상 출구로 이어지는 사다리 부근에서 갑자기 쇠붙이가 부딪치는 서늘한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위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소하가 손을 들어 일행을 제지했다. 청맥심술의 감각이 사다리 위 지상의 진동을 포착했다. 관군 순찰대 한 조가 출구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쳇, 쥐새끼 같은 관군 놈들이 여기까지 보초를 세워뒀군. 내가 처리하지.”
마칠이 이빨을 드러내며 참마도를 꽉 쥐었다. 소하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칠은 소리 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상 출구의 덮개를 살며시 밀어젖혔다.
스사사사삭!
어둠 속에서 마칠의 거구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졌다. 삼라파의 숙련된 살인 기술이었다. 관군 순찰대원 두 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목줄기가 끊겨 차가운 돌바닥 위로 쓰러졌다. 마칠이 아래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정리됐다. 올라와라.”
소하와 유원, 풍개가 차례로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섰다. 그곳은 강남성 서쪽 외곽의 음침한 뒷골목으로, 가난한 약초꾼들과 부랑자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였다. 자욱한 안개와 가난의 찌든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후우, 간신히 빠져나왔군.”
유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찢어진 도포 자락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소하는 안도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약방을 떠나 강남성 대로변으로 향할 때, 허팽(허팽)에게 약재 조달과 연락망 확보를 위해 서쪽 시장의 비밀 약방 거점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했었다.
수배령이 떨어진 지금, 허팽의 안위가 지극히 위험했다.
“풍개, 허팽은? 서쪽 시장의 거점은 안전한가?”
소하의 날카로운 질문에 풍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풍개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손을 미세하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소하야, 실은 방금 개방의 어린 메신저 노삼에게서 급보를 받았다.”
“말해.”
“너를 도우려던 의가 청년 허팽이…… 서쪽 시장에서 약재를 수습하던 도중, 청낭방(靑囊房)의 순찰대 놈들에게 납치당했다.”
쿠웅―!
소하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마지막 남은 심장의 삼도은침이 찌르르한 경고음을 울리며 전신 경맥에 뜨거운 구양 열독을 뿜어냈다. 창백하던 소하의 안면 위로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납치당했다고?”
“그래. 청낭방의 강남 분타주 독수 뇌진(毒手 雷震)이 네 정체를 알아채고, 너를 끌어내기 위해 네 주변 인물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모양이야. 허팽 그 어리숙한 녀석이 약재 상자 속의 은침들을 들키는 바람에…….”
소하는 대답 대신 허팽과 접선하기로 했던 골목 구석의 흙바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거친 마차 바퀴 자국과 함께, 진흙탕 속에 반쯤 파묻힌 작은 가죽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소하가 절뚝거리며 다가가 주머니를 집어 올렸다. 허팽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소하가 직접 배합해 준 한방 탕약 주머니였다. 주머니 표면에는 붉은 흙먼지와 함께, 청낭방 특유의 음습하고 비릿한 독약 냄새가 묻어 있었다.
백혈청안단(白血靑眼丹)의 찌꺼기 냄새였다.
“청낭방 놈들이 틀림없군.”
소하의 목소리에서 감정이 완전히 거세되었다. 그것은 분노를 넘어선, 차가운 살의의 심연이었다.
“그 멍청한 조수 녀석,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소하야, 청낭방 강남분타의 지하 감옥은 한 번 들어가면 산 송장으로 나오는 지옥이다. 그곳은 겉으로는 빈민을 치료하는 혜민원이지만, 실제로는 납치한 민초들에게 백혈청안단을 강제로 먹여 경맥을 굳히는 잔혹한 인체 실험의 도살장이야. 허팽 그 녀석도 생체 실험체로 쓰일 위기에 처했다.”
풍개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가득했다.
소하는 허팽의 탕약 주머니를 품속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녹슨 청동 침통(녹슨 청동 침통)의 덮개를 만지작거렸다. 내부에 정렬된 97개의 자성 은침들이 그의 손길에 반응하듯 차갑게 진동했다.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 타인의 칼날을 구걸하던 소년의 눈동자에, 생존을 넘어선 파괴적인 투지가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내 조수를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청낭방의 원수들에게 똑똑히 가르쳐 주마.”
소하는 찢어진 청낭포 자락을 거칠게 여미며, 청낭방 강남분타의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린 성내 서쪽 하늘을 향해 서늘한 안광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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