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검 끝을 비틀다
매캐한 불길이 서고의 목조 기둥을 타고 빠르게 치솟아 올랐다. 타오르는 불꽃은 고서의 마른 종이들을 집어삼키며 붉은 아지랑이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당철의 목줄기를 관통한 진소하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에 묻은 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지만, 가슴속을 가득 채운 분노와 살의는 단전의 구양진액보다 더 뜨겁게 들끓었다.
여동생 아란이 살아 있다.
그 단순하고도 잔혹한 진실이 소하의 영혼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황실 태의령 조충헌의 손에 의해 자아를 잃은 최정예 살수로 개조되어 낙양성에 배치되었다는 사실. 당철의 최후의 자백은 소하에게 구원의 빛이자, 동시에 가장 참혹한 어둠의 사슬이었다.
“소하야! 서둘러야 해! 청낭방의 살수들이 저택 외곽을 완전히 포위하고 불을 지르고 있어!”
서고의 무너진 창문 틈새로 청운검파의 후기지수 유원이 장검을 치켜든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 유원의 청색 도포 역시 이미 그을음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소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탁자 위에 놓인 신농의경 사본(神農醫經 寫本)을 품속 깊이 밀어 넣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사혈의 좌표가 찢겨 나간 불완전한 비서였지만, 지금 그에게는 생명줄과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가자.”
소하의 목소리는 서리발처럼 차가웠다. 열독 기화공을 무리하게 시전한 대가로 손목과 목덜미의 피부가 벌겋게 짓물러 극심한 화끈거림이 밀려왔고, 왼쪽 허벅지의 가시독 마비 통증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를 찌르는 듯했다. 하지만 소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절뚝거리는 다리로 무너져 내리는 서고의 문을 밀어젖혔다.
화르륵! 콰르릉!
약선가 저택의 지붕이 무너지며 불꽃의 비가 쏟아졌다. 소하와 유원은 저택 뒤편의 음침한 대나무 숲 우회로를 통해 청낭방 살수들의 촘촘한 포위망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강남 무림의 중심이자 수많은 인파가 뒤엉켜 신분을 숨기기 가장 용이한 대도시, 강남성(江南城)의 대로변이었다.
***
강남성의 정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잔뜩 흐려 있었고, 습하고 차가운 바람이 대로변을 따라 거칠게 휘몰아쳤다.
수많은 상단과 무림인들이 뒤엉킨 강남성의 번화가는 소하 일행에게 훌륭한 은엄폐물이 되어 주었다. 소하는 소란이 정성껏 짜준 푸른색 도포, 청낭포(靑囊袍)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인파 사이에 몸을 섞었다. 청낭포 내부의 은은한 약재 향이 그의 몸에서 풍기는 미세한 피비린내와 열독을 가려 주었지만, 병적으로 창백한 그의 안색과 가녀린 체구는 길을 지나가는 이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콜록, 콜록.
소하가 낮게 기침을 뱉어내며 청낭포 자락을 여몄다. 고막에서 흘러내린 피는 멎었으나 귀밑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이명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저 꼴을 보아하니 오늘내일하는 병자놈이군. 어찌 저런 약골이 강남성의 대로를 활보하는가?”
“쉿, 목소리 낮추게. 요즘 강남성에 기이한 마공을 쓰는 병약한 소년이 나돌아 관군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다지 않은가.”
인파 속에서 들려오는 냉소와 수군거림이 소하의 귓가를 스쳤다. 세상의 미련도, 타인의 평판도 소하에게는 하찮은 먼지에 불과했다. 오직 살아남아 아란이에게 도달하겠다는 일념만이 그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그때, 대로변 저편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화려한 기세의 무리가 군중을 밀쳐내며 다가왔다.
황금색 비단 검포를 걸치고 허리에 보석이 촘촘히 박힌 명검 태양검(太陽劍)을 찬 청년. 남궁세가의 오만한 소가주, 남궁태(南宮泰)였다. 그의 등 뒤에는 수십 명의 가문 호위 무사들이 서슬 퍼런 기세를 풍기며 대로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길을 비켜라! 남궁세가의 소가주께서 지나가신다!”
호위 무사들의 거친 호령에 민초들이 겁을 먹고 길가로 물러섰다. 소하 역시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길가 구석의 음지로 신형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남궁태의 예리한 안광이 청낭포 후드 사이로 드러난 소하의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포착했다. 남궁태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치솟아 올랐다.
“멈춰라.”
남궁태가 가죽 채찍을 가볍게 털며 소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에는 명문가 서출 출신 특유의 오만함과,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자를 짓밟아 권위를 세우려는 저열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강남 무림의 중심이라는 이곳에 어찌 이런 시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는 병자놈이 활보하는가? 남궁세가의 명예로운 길목을 더럽히는구나. 당장 무릎을 꿇고 내 말발굽의 먼지를 핥으며 사죄해라.”
대로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변의 관중들이 숨을 죽인 채 소하를 바라보았다. 유원이 장검 손잡이를 꽉 쥐며 한 걸음 나서려 했지만, 소하는 왼손을 들어 유원을 제지했다.
소하는 천천히 청낭포 후드를 벗어던졌다. 헝클어진 흑발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안색, 그리고 목덜미와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미세한 은침 자국과 화상 흉터가 대낮의 흐린 빛 아래 기괴하게 드러났다. 소하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비틀렸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라는 자가 고작 대로변에서 병자를 핍박하며 가문의 위세를 세우는가? 참으로 눈물겨운 권위로군.”
“이, 이 비천한 놈이 감히……!”
남궁태의 안면이 순식간에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부르르 떨렸다. 대중 앞에서 일개 약골에게 조롱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오만한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좋다! 그 세바닥을 놀린 대가로 네놈의 사지를 잘라 강남성 개천에 던져주마!”
창-!
남궁태가 허리의 태양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 검기가 검신을 타고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남궁태는 창궁무애검(蒼穹無碍劍)의 초식을 전개하며, 소하의 어깨와 다리 관절을 겨냥해 서슬 퍼런 검강을 방출했다. 검기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대로변을 뒤흔들었다.
소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를 고요하게 가라앉히며 전신의 감각을 귀로 집중시켰다.
청맥심술(聽脈心術).
남궁태의 심장 박동 소리가 고속으로 요동쳤다. 그의 어깨 근육이 수축하고, 검을 쥔 손목 관절이 꺾이는 미세한 찰나의 타이밍이 소하의 고막을 타고 삼차원의 선으로 정밀하게 그려졌다. 남궁태의 검법은 화려하고 빨랐지만, 초식의 방향을 전환할 때 손목 기혈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치명적인 허점이 존재했다.
‘지금이다.’
검강이 소하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소하가 발끝을 1인치 비틀어 신형을 깃털처럼 움직였다.
육참골단 보법(肉斬骨斷 步法).
자신의 뼈를 내주고 적의 살을 벤다는 역발상의 기만 보법이었다. 소하는 검기를 정면으로 피하는 대신, 칼날의 사각지대로 깊숙이 침투했다.
스사사사삭!
남궁태의 날카로운 검강이 소하의 푸른 청낭포 자락을 스치며 거칠게 찢어발겼다. 소하의 왼쪽 뺨에 미세한 칼날 파편이 스쳐 붉은 선혈이 턱밑으로 흘러내렸지만, 소하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어, 어째서 내 검이 닿지 않는 것이냐!”
남궁태가 경악하며 대풍신법(大風步法)을 전개해 거리를 벌리려 했다. 초식의 연계가 끊기며 그의 손목 관절이 찰나의 순간 뒤틀려 정지했다. 소하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소하의 소매 안쪽에서 녹슨 청동 침통의 자성 은침(磁性 銀針) 한 자루가 손가락 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탄지기침(彈指氣針).
소하가 손가락 끝에 아주 미세한 진기를 실어 은침을 튕겼다. 쉭-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원거리의 정밀한 격발이었다.
피빅!
은침은 남궁태가 휘두르던 태양검의 자기장 흐름을 타고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휘어 들어가, 그의 오른손 엄지손가락 안쪽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인 소상혈(少商穴)에 소수점 단위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박혔다.
“……윽!”
남궁태의 입에서 짧고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은침에 담긴 자성 기류가 그의 손목 경맥을 관통하는 순간, 남궁태의 오른팔 전체의 진기 흐름이 거짓말처럼 뚝 끊기며 완벽한 마비 상태에 돌입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쨍그랑! 카카캉!
남궁세가의 보검 태양검이 남궁태의 손에서 미끄러져 차가운 대로변의 돌바닥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대로변에 모여 있던 수만 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숨을 멈추었다. 사방이 물을 끼얹은 듯 괴괴한 침묵에 잠겼다. 명문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병약해 보이는 소년의 손짓 한 번에 자신의 보검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며 무장 해제당한 것이다.
“내, 내 손이…… 어찌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남궁태는 마비된 오른손을 움켜쥔 채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수치심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중 앞에서의 굴욕적인 완패. 그의 오만한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 피를 흘렸다.
소하는 땅바닥에 떨어진 태양검을 차갑게 내려다본 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남궁태를 지나쳤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남궁태의 망막에 낙인처럼 박혔다.
“명가(名家)의 검 끝이 참으로 가볍고 오만하군. 그 검을 다시 쥐고 싶다면, 먼저 네놈의 그 썩어빠진 위선부터 치료하고 오너라.”
남궁태는 바닥에 처박힌 채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의 목소리는 수치심과 살의로 찢어질 듯 갈라져 있었다.
“진소하……! 감히 나를 모욕해? 네놈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당장 강남성 관부(官府)의 인맥을 총동원해 네놈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 내 삼대를 걸고 네놈을 파멸시키겠다!”
대로변의 소란을 뒤로한 채, 소하는 청낭포 후드를 다시 깊게 눌러쓰며 어두운 골목길의 음지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등 뒤로 강남성 판관 팽무도와 관군의 거대한 추격망이 무서운 속도로 좁혀오기 시작하는 전조의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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