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드는 음모
강남성 대광장의 소란이 멀어지고, 약선가 저택의 밀실로 들어선 소하의 귓가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이명이 윙윙거리고 있었다. 과도하게 시전한 청심결(靑心決)의 부작용이었다. 왼쪽 고막에서 흘러내린 핏자국이 뺨을 타고 내려와 턱끝에서 굳어 가고 있었고, 가시 덩굴에 스쳤던 왼쪽 허벅지는 감각이 무뎌져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찬 듯 지체되었다.
“흐읍…….”
소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고의 목조 탁자에 신농의경 사본(神農醫經 寫本)을 펼쳤다. 방금 전 벽연과의 비무에서 승리하고 획득한 가문의 비전서였다. 소하의 손끝이 떨림을 억누르며 빛바랜 한지 페이지를 넘겼다.
단전 깊은 곳에서 구양진액(九陽津液)의 열독이 수시로 요동치며 수명이 겨우 구십 일 남았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 저주받은 구양역맥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두 번째 사혈인 은백혈을 뚫어야 했고, 그 정확한 좌표가 바로 이 책에 적혀 있어야 했다.
스르륵, 탁.
책장을 넘기던 소하의 손길이 어느 한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본의 중반부를 넘어서자마자 나타나야 할 세 번째와 네 번째 사혈의 좌표 부분이 거칠게 찢겨 나가 있었다. 찢어진 단면에는 마른 먹 흔적과 거친 손톱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누락되었군.”
소하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찢어진 종이의 성분과 희미하게 남아 있는 먹의 향을 분석해 보니, 이것은 강남에서 쓰인 것이 아니었다. 중원 낙양성에 위치한 의가 연합 백의련(百醫聯) 본부에 보관된 원본에서 강제로 뜯겨 나간 파편임이 분명했다.
수명을 연장할 세 번째 사혈의 좌표를 잃었다는 좌절감이 밀려오려는 찰나, 소하의 청맥심술(聽脈心術)이 미세하게 작동했다.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 속에서도, 서고 문바깥에서 다가오는 한 사내의 심장 박동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두근. 두근. 두근.
평범한 의원의 맥박이 아니었다. 살기를 감추려 애쓰고 있지만, 미세하게 긴장하여 수축하는 손목 근육의 파동과 비정상적으로 빠른 심박수. 벽연이 경고했던 독수 뇌진의 첩자, 당철(唐鐵)이었다.
스윽.
서고의 문이 열리며 단정한 의원 복장을 한 장년의 사내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해독탕 대접이 들려 있었다.
“진 소협, 비무에서 승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벽연 소저의 부탁으로 소협의 귀 출혈과 허벅지 가시독을 치료할 약선 해독탕을 끓여왔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당철은 인자한 얼굴로 다가와 약대접을 건넸다. 하지만 소하는 탕약에서 풍기는 미세한 무색무취의 독기 성분을 청맥심술로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탕약을 건네는 당철의 소맷자락 아래에서 검은 은침의 끝자락이 소하의 목덜미 사혈을 조준하는 순간이었다.
슈욱-!
당철이 약대접을 던짐과 동시에 소맷자락에서 무색무취의 음독침(陰毒針)을 날렸다.
하지만 소하는 이미 그의 근육 수축 소리를 듣고 고개를 비틀어 피한 상태였다. 독침은 소하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뒤편 목조 책장에 깊숙이 박혔다. 콰아아악! 독침이 박힌 자리가 순식간에 검게 부식되며 흘러내렸다.
“이 쥐새끼가…… 피했느냐!”
당철의 온화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품속에서 청낭방의 특수 병기인 무색무취의 독액 병을 꺼내 공중에 던져 깨뜨렸다. 파장창!
순식간에 서고 내부가 폐를 녹여버리는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부식 독무로 가득 찼다. 허벅지의 마비와 이명 때문에 소하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흡입하는 순간 즉사할 위기였다.
‘크윽, 단전의 열기를 쓴다.’
소하는 이를 악물며 전신의 땀구멍을 열었다.
열독 기화공(熱毒 氣化功)!
단전 깊은 곳에 갇혀 있던 사웅의 순양 내력과 구양진액을 순간적으로 폭주시켰다. 소하의 전신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모공을 통해 스팀과도 같은 초고열의 붉은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서고를 가득 채웠던 보이지 않는 부식 독무가 고열에 닿아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하얀 연기로 기화되어 타버렸다.
그 대가로 소하의 손목과 목덜미 피부에 미세한 화상 흉터가 남았고, 단전의 순양 진액이 급격히 연소되는 통증이 밀려왔다.
“무, 무공을 쓰지 못하는 기경역맥의 약골이 어떻게 이런 화독을……!”
당철이 경악하며 등 뒤의 비취 방패를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소하의 손끝이 더 빨랐다. 소하는 허리춤의 청동 침통에서 자성 은침(磁性 銀針) 세 자루를 뽑아 들어 번개처럼 튕겼다. 탄지기침(彈指氣針)이었다.
피빅! 피빙!
자성 은침들은 당철이 들어 올린 비취 방패의 외곽을 기묘한 자기장 곡선으로 우회하여, 그의 단전 기해혈과 양손의 합곡혈에 정확히 박혔다.
“크아아악!”
당철은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은침에 실린 자기장 파동이 그의 전신 경맥을 완벽하게 묶어버린 것이다. 당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마비 상태가 되어 바닥에 처박혔다.
소하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당철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끝에 쥔 마지막 은침이 차갑게 빛났다.
“가문을 참살한 뇌진의 개새끼야. 내 마지막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여동생 아란이는 어디에 있지?”
당철은 전신이 마비된 통증 속에서도 이빨을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어젖혔다. 그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크크크…… 진소하, 불쌍한 가문의 망령 놈. 네 여동생 진아란을 찾고 싶으냐? 그 년은 죽지 않았다.”
소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안광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느냐.”
“이미 황실 태의령 조충헌(趙充憲) 대인께서 그 년의 머릿속에 붉은 살수의 기공 침을 박아 뇌 신경을 완벽히 지배하셨다. 네 여동생은 자아를 잃고, 오직 너를 참살하기 위해 태의원의 최정예 ‘붉은 살수’로 사육되어 중원 낙양성에 배치되어 있지! 크하하하! 남매끼리 서로 목을 베는 꼴이 아주 볼만하겠구나!”
순간, 소하의 뇌리 속에서 뜨거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극단적인 정신적 붕괴가 일어났다. 여동생 아란이 살아있다는 구원의 빛과, 그녀가 자신을 죽이러 올 살수가 되었다는 참혹한 어둠이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닥쳐라.”
소하의 목소리가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의 차갑고 냉철하던 눈빛이 광기 어린 분노로 이글거렸다.
푹-!
소하의 손끝이 번개처럼 출수되어 당철의 목줄기 천돌혈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당철의 비명 소리가 목구멍 속으로 피와 함께 들이쳤다.
당철의 목줄기를 관통한 소하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여동생 아란이 황실 태의원의 살수로 키워지고 있다는 참혹한 진실을 움켜쥔 채, 소하는 피눈물을 삼키며 서고 밖에서 들려오는 청낭방 무사들의 불길 냄새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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