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면 귀신이 걷는다
한구의 장화 발소리가 구덩이 비탈길의 자갈을 밟으며 다시 엽무강의 머리 위로 육중하게 울려 퍼졌다. 빗물에 젖은 진흙이 장화 굽에 밀려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엽무강은 진흙바닥에 엎드린 채, 한쪽 뺨을 오물에 파묻고 부르르 떨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방금 전 스스로 무릎 관절을 비틀어 만들어낸 기괴한 마찰음, ‘골음 기만’의 대가는 실로 처절했다. 무릎 뼈마디 사이로 고인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며 다리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야, 절름발이 무강이. 품속에 든 거, 진짜 그게 전부냐? 이리 와서 다시 보여줘 봐.”
한구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쥐새끼 같은 의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놈은 허리춤의 검자루를 쥔 채, 비탈길을 반쯤 내려와 엽무강을 내려다보았다. 오물 더미 속에서 고철을 줍던 폐품 수집상 황씨가 슬쩍 몸을 움직여 엽무강의 상체를 가려주었으나, 한구의 집요한 시선은 엽무강의 찢어진 옷자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엽무강은 썩은 개밥 그릇을 쥔 손가락을 일부러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입술을 반쯤 벌린 채 허옇게 침을 흘리며 비굴하게 울부짖었다.
“아이고, 사형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소인의 소중한 밥그릇인데…… 놈들이, 놈들이 또 빼앗아 갈까 봐 숨긴 것뿐입니다요! 사형님, 소인이 다리가 또 부러진 것 같습니다요! 아아악!”
그는 기형적으로 꺾인 오른쪽 다리를 붙잡고 진흙바닥을 사정없이 뒹굴었다. 가짜 다리 깁스 사이로 빗물과 섞인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진흙을 적셨다. 그 처참하고도 더러운 꼴에 한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독한 오물 냄새와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진동하자, 한구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장화 굽으로 흙을 걷어찼다.
“퉤! 미친 절름발이 새끼, 평생 썩은 구덩이에서 오물이나 처먹고 살아라. 냄새나서 더는 못 있겠군.”
한구는 혐오감에 침을 뱉고는 침을 뱉으며 비탈길을 서둘러 올라갔다. 놈의 육중한 발소리가 쓰레기장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엽무강은 흙바닥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황씨 노인이 조용히 다가와 엽무강의 쓰레기 자루를 여며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조심하게, 무강이. 놈들의 의심은 칼날보다 매섭네.”
황씨는 더 묻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다. 사공혁 일파의 눈을 피해 전대 장문인의 은혜를 갚으려는 노인의 침묵 덕분에, 엽무강은 품속의 진짜 보물, ‘무경도보 잔해’를 지켜낼 수 있었다. 엽무강은 찢어진 안감 속에 숨겨둔 가죽 조각을 매만졌다. 썩은 개밥 그릇 밑에서 간신히 수습한 도보의 구결이 그의 가슴팍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깊은 밤, 문지기 초소 안은 바람이 샐 때마다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밖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붕 틈새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닥에 놓인 깨진 사발 위로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엽무강은 초소 바닥의 썩은 목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 은밀히 숨겨둔 철척비(Iron Broom Blade)와 자성 묵철 숫돌이 어둠 속에서 고요히 모습을 드러냈다. 낮 동안의 비굴한 바보 연기는 온데간데없고, 그의 눈동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슬 퍼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낮에 수습한 무경도보 잔해를 꺼냈다. 썩은 가죽 조각에 붉은 안료로 그려진 도법의 선들이, 빗방울 소리와 어우러지며 그의 뇌리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을 휘두를 때 발생하는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라. 바람을 소유하려 하지 말고, 바람의 일부가 되라.’
그것이 바로 전대 장문인 엽천웅이 구상했던 무경도법의 극의, ‘정적의 도법’ 제1성 무풍(Windless)의 원리였다. 일반적인 무인들은 강맹한 내력으로 바람을 찢어 발기며 폭렬하는 소리를 내지만, 정적의 도법은 반대로 바람의 결을 따라 칼날을 미끄러뜨려 소리 자체를 소멸시킨다.
엽무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혼심법(Mukhon Mind Method)을 운기했다. 깨진 단전의 파편들이 요동치며 척추를 찔러왔지만, 그는 무심선(Mindless Zen)의 정신력으로 고통을 잠재웠다. 단전이 아닌 전신의 뼈와 골수 속 깊은 곳으로 묵기(Silent Qi)를 밀어 넣었다. 골수 속에서 응축된 차가운 내력이 그의 부러진 오른쪽 무릎 관절 주위로 흘러들어 가 기형적인 기맥을 형성했다.
그는 천천히 철척비의 손잡이를 돌려 뽑았다. 빗자루 자루 속에서 빛을 반사하지 않는 얇고 예리한 묵철 칼날이 드러났다. 엽무강은 칼날의 각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허공을 향해 천천히 검을 그었다.
스윽.
처음에는 미세한 파공음이 초소 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빗방울 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엽무강의 청이안(Hearing-Eye)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손목의 회전 각도를 미세하게 비틀고, 상체의 무게중심을 왼발 하나에 고정했다. 으스러진 무릎의 기형적인 뼈 조각들이 회전축이 되어 몸의 흔들림을 상쇄했다.
다시 한 번 발도.
서걱.
소리가 반으로 줄었다. 칼날이 공기의 결을 찢지 않고 흘러갔다. 엽무강은 눈을 감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초소 밖의 소음 속에서, 오직 자신의 칼날이 지나가는 무형의 궤적만을 감각했다.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수백 번의 반복.
마침내, 칼끝이 허공을 가를 때 바람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먼지 한 톨 흔들리지 않는 진공의 선이 어둠 속에 그어졌다. 1성 ‘무풍’의 경지가 그의 손끝에서 마침내 싹을 틔운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가혹했다. 무풍의 참격을 강제로 억누르고 제어하느라, 그의 오른손 손목의 실핏줄이 터져 가죽 장갑 안쪽이 축축한 피로 젖어 들었다. 엽무강은 피비린내를 삼키며 칼날을 다시 빗자루 자루 속에 밀어 넣었다.
***
다음 날 낮, 비는 그치지 않고 가늘게 이어졌다. 연무장 바닥은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엽무강은 가짜 다리 깁스를 한 채 빗자루를 짚고 마구간 구역을 쓸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마구간 한구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끔찍한 가죽 채찍 소리와 함께 어린 소년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 말을 제대로 안 씻겨? 사공표 대장님의 군마가 진흙투성이가 된 걸 보고도 정신을 못 차려!”
순찰대 부조장 배무덕이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마구간 잡역부 소칠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었다. 소칠은 겨우 열네 살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사공혁의 반란 당시 부모를 모두 잃고 마구간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던 아이였다.
찰싹! 찰싹!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소칠의 낡은 삼베옷이 찢어지고 살점이 터져 나갔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진흙바닥을 뒹굴었지만, 배무덕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놈은 사공표 밑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힘없는 잡역부 아이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장님, 잘못했습니다요! 제발 살려주십시오!”
소칠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배무덕의 장화를 붙잡으려 했으나, 배무덕은 무자비하게 아이의 얼굴을 군화 발로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소칠이 뒤로 나동그라지며 각혈했다.
엽무강은 마당을 쓰는 비질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빗자루 끝이 진흙바닥을 쓸 때마다, 바닥의 돌가루들이 미세한 내력에 반응해 소리 없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의가 단전의 파편들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배무덕…… 저 개새끼가.’
배무덕은 전대 장문인의 반란 당시, 가장 먼저 사공혁에게 붙어 사형제들의 등을 찔렀던 직접적인 배신자였다. 낮 동안 문지기 초소를 지키는 엽무강의 뺨을 때리며 화풀이를 하던 놈이, 이제는 어린 소칠마저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소칠은 매질을 당하는 와중에도 마당 구석에서 비질을 하는 엽무강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 속에 담긴 절망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늑대 같은 눈빛이 엽무강의 심장을 찔렀다. 엽무강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맹세했다.
“어이, 절름발이 무강이! 뭘 멍하니 서 있어? 여기 진흙이나 치워!”
배무덕이 채찍을 거두며 엽무강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고, 배 조장님! 화를 푸십시오! 소인이 얼른 치우겠습니다요, 헤헤헤!”
엽무강은 즉시 허리를 굽히고 멍청이 미소를 지으며 진흙탕 위로 기어갔다. 빗자루로 배무덕의 장화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는 척하며, 그의 청이안은 배무덕의 호흡 박자와 관절의 미세한 버릇을 완벽하게 머릿속에 기록했다. 배무덕은 엽무강의 머리를 가볍게 장화로 밀쳐내며 침을 뱉었다.
“더러운 새끼. 평생 그렇게 기어 다녀라.”
배무덕이 비웃으며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엽무강은 진흙바닥에 엎드린 채, 소칠을 향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소칠은 엽무강의 눈빛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거대한 심연을 보았다.
***
깊은 밤, 비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산문 앞 삼거리는 칠흑 같은 어둠과 자욱한 안개로 가득했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귀곡성처럼 사방을 뒤흔들고 있었다.
엽무강은 초소 안에서 귀면 가면(Ghost Mask)을 꺼내어 얼굴에 밀착시켰다. 차가운 쇠가죽 가면이 얼굴 피부에 닿자, 그의 기척은 완전히 소멸했다. 빗자루 자루에서 뽑아낸 철척비의 얇은 칼날이 밤안개 속에서 검은 안광을 흘렸다.
그는 으스러진 오른쪽 무릎에 쇠가죽 압박대를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조여 고정했다. 뼈마디가 강제로 맞춰지며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배무덕의 야간 순찰 시간은 자시(자시) 반.’
엽무강은 초소 뒷벽의 썩은 목판을 소리 없이 뜯어내고 밖으로 기어 나갔다. 감시꾼 한구는 폭우를 피해 순찰 조 초소 안에서 술을 마시며 졸고 있었다. 엽무강은 귀식공을 전개해 심장 박동을 극한으로 낮춘 채, 비바람 속으로 녹아들었다.
절뚝이 환영보(Hwanyeongbo)의 기형적인 박자가 빗물로 흥건한 삼거리 바닥 위에 전개되었다. 걸을 때는 절뚝거리는 비정상적인 걸음걸이였으나, 빗방울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 미세한 내력의 흐름으로 궤적이 뒤틀려 잔상만을 남겼다. 그는 한 마리 밤의 유령처럼 소리 없이 산문 앞 삼거리의 어두운 대나무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저 멀리서 흐릿한 초롱불 빛이 다가왔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불빛 아래, 술 냄새를 풍기며 걸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배무덕이었다.
“에이, 빌어먹을 날씨. 사공표 대장님은 왜 이런 날에 나만 순찰을 돌리는 거야.”
배무덕은 투덜거리며 가죽 채찍을 허리에 찬 채 걸어오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놈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져 있었고, 호흡은 거칠었다.
엽무강은 대나무 가지 위에 소리 없이 엎드려 있었다. 그의 청이안이 배무덕의 발소리와 맥박 소리를 정확히 포착했다. 거리는 십 장, 오 장, 삼 장…….
바람이 강하게 불어 대나무 숲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순간, 엽무강은 허공에서 소리 없이 낙하했다. 몸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적적인 하강이었다.
스스슥.
배무덕이 기이한 오한을 느끼고 멈춰 섰다. 놈은 삼류 절정의 무사답게 미세한 살기를 감지한 듯했다. 놈이 급히 허리의 칼자루를 쥐며 뒤를 돌아보려 했다.
“누구……!”
하지만 놈이 고개를 완전히 돌리기도 전에, 엽무강은 이미 절뚝이 환영보로 배무덕의 사각지대인 왼쪽 등 뒤를 선점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칼날에 부딪혀 미세한 금속 마찰음을 내려던 찰나, 엽무강은 묵혼심법의 묵기로 빗줄기의 궤적을 찢어 상쇄했다.
정적의 도법 제1초식, 묵흔도(Dark Trace Blade).
번뜩임도, 소리도 없었다. 오직 공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칠흑 같은 검은 선 하나가 배무덕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1성 ‘무풍’의 경지가 실현된 완벽한 참격이었다.
스윽.
배무덕의 목뼈와 살가죽이 단 한 번의 마찰음도 없이 가볍게 갈라졌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목동맥이 끊어진 상태에서 놈의 눈동자가 경악과 공포로 크게 벌어졌다. 놈은 자신이 누구에게 베였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툭. 툭.
배무덕의 목이 잘려 나간 자리에 피가 세차게 뿜어 나오기 직전이었다. 엽무강의 손길은 잔인하리만큼 신속하고 침착했다. 그는 품속에서 혜민서 허의원이 제조해 준 강력한 부패 약물, 화골수(화골수) 약병을 꺼냈다.
그는 쓰러지는 배무덕의 시신 위로 화골수를 대여섯 방울 고르게 떨어뜨렸다.
치이익!
소름 끼치는 거품 소리와 함께 배무덕의 옷과 살가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강산성의 약물이 뼈와 장기를 순식간에 진득한 검은 물로 변화시켰다. 쏟아지는 폭우가 그 검은 액체를 산문 앞 삼거리의 진흙탕 속으로 빠르게 씻어 내렸다. 단 수십 호흡 만에, 낮 동안 어린 소년을 채찍질하던 악질 무사의 존재는 지상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엽무강은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검은 물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흔적은 남지 않았다. 배무덕은 이제 문파 내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실종자’가 될 터였다. 문도들은 귀신이 놈을 잡아갔다며 공포에 떨 것이다.
그가 몸을 돌려 퇴각하려던 찰나였다. 배무덕이 쓰러졌던 진흙바닥에서 황동으로 만든 순찰패가 비를 맞아 번뜩였다. 엽무강은 휠체어 바퀴 자국이나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빗자루로 바닥을 쓸며 순찰패를 수습하려 손을 뻗었다.
저벅, 저벅, 저벅.
안개 속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야간 순찰대의 다음 조가 삼거리 검문소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의 거리는 불과 삼십 장.
시신이 완전히 녹아내려 빗물에 씻겨 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수십 호흡에 불과했다. 엽무강의 눈빛이 밤안개 속에서 다시 한 번 차갑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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