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추격
야뇌의 신형이 밤안개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기 직전, 엽무강은 땅을 짚은 오른손 손가락 끝을 바위 바닥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독안룡의 숨통을 끊기 위해 심박 정지 비술을 해제하고 심장을 강제로 재가동한 반동이 뒤늦게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목구멍을 타고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피가 귀면 가면 밑자락을 적셨지만, 엽무강의 차가운 눈동자는 오직 한 곳만을 향해 있었다.
나뭇가지를 딛고 바람처럼 날아오르는 야뇌의 신형.
놈은 Heukmuga의 정찰 살수답게 몸놀림이 극도로 가볍고 영민했다. 그 가벼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단 한 곳, 사공혁의 침소였다. 놈의 입을 통해 ‘절뚝이는 보법을 쓰는 귀면도객’이라는 진실이 사공혁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은 물론이고 산 아래 약방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연희의 목숨마저 바람 앞의 등불이 될 터였다.
“진설아…….”
엽무강은 마비된 왼팔을 몸통에 묶어둔 삼베 밧줄의 매듭을 이빨로 강하게 물어 당기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절벽 위의 잔당들을 정리해라. 놈은 내가 쫓는다.”
“하지만 그 다리로 어떻게……!”
진설아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청강수선검을 쥔 채 외쳤으나, 엽무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놈은 이미 가파른 계곡 벽면의 험난한 바위 틈새를 딛고 질풍처럼 도망치고 있었다. 정상적인 육체로도 쫓기 힘든 일류 살수의 신법이었다. 하물며 오른쪽 무릎 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가죽 압박대에 겨우 고정된 불구의 몸으로는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벼랑 아래로 추락할 것이 자명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 사냥개를 잡을 수 없다.’
엽무강은 품속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연희가 혜민서 약방에서 비밀리에 제련해 준 ‘한골산 가루’가 담긴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극소량만 흡입해도 전신의 경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강력한 독초 가루였으나, 뒤집어 말하면 으스러진 관절의 지옥 같은 고통을 찰나의 순간 완벽하게 마비시키는 비약이기도 했다.
수명을 깎아먹고 간을 녹여버리는 가혹한 대가 따위는 이미 안중에 없었다.
엽무강은 가죽 주머니의 마개를 이빨로 뽑아내고, 붉은 독초 가루를 코끝으로 깊숙이 들이마셨다.
“커흑……! 쿨럭!”
들이마시는 순간, 허파가 통째로 끓는 쇳물에 녹아내리는 듯한 끔찍한 작열감이 전신을 덮쳐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역류하는 진기가 목구멍을 찢어 발겼다. 엽무강은 주먹만 한 검은 피를 바닥에 토해냈으나, 그의 입꼬리는 기괴하게 올라갔다.
통증이 사라졌다.
으스러져 뼛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며 지독한 마찰음을 내던 오른쪽 무릎 관절의 감각이 완벽하게 지워졌다. 무릎을 단단히 조여 매고 있던 쇠가죽 압박대의 가죽 끈이 터질 듯 팽팽해졌지만, 뇌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엽무강은 왼발로 귀곡협의 젖은 석판 바닥을 사정없이 박찼다.
*콰아앙!*
지면이 움푹 패이며 자갈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으스러진 다리를 디딜 때마다 뼈마디가 기형적으로 뒤틀리는 기괴한 골음이 울렸으나, 엽무강은 그 반동을 고스란히 왼발의 탄력으로 치환했다. 불구인 오른다리를 지지대가 아닌, 오직 튕겨 나가는 회전축으로만 사용하는 기형적인 신법이었다.
*스스슥-!*
가파른 계곡 벽면을 디디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벽 짚고 튀기’ 신법이 안개 속에서 전개되었다. 엽무강의 신형은 가파른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미끄러지듯 기어올랐다.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한 도약이었다.
앞서 도망치던 야뇌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괴할 정도의 고속 기류 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 속에서 반쯤 깨진 귀면 가면을 쓴 사신이 외발로 절벽 벽면을 딛고 자신보다 더 높은 허공을 선점하는 모습을 본 놈의 애꾸눈이 공포로 찢어질 듯 벌어졌다.
“이, 이 괴물 같은 절름발이 새끼가……!”
야뇌는 비명을 지르며 품속에서 독이 묻은 비수 두 자루를 꺼내 엽무강의 흉부를 향해 사정없이 투척했다.
*슉! 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비수가 안개를 가르고 날아들었다.
엽무강은 공중에서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바람의 흐름과 비수가 공기를 찢는 미세한 기류의 진동이 청이안 감각을 통해 머릿속에 입체적인 지도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는 허공에서 전신 관절을 스스로 어긋나게 만드는 연골유신술을 전개했다. 척추와 어깨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며, 날아들던 비수 두 자루가 그의 누더기 도포 자락만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
“사, 사라졌다?!”
야뇌가 경악하며 고개를 치켜든 순간, 엽무강은 이미 놈의 머리 위 허공에 그림자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오직 오른손 하나로 대나무 빗자루 자루, 철척비의 손잡이를 가볍게 비틀어 당겼다.
*스스슥.*
자루 속에서 미끄러지듯 뽑혀 나온 얇고 푸르스름한 묵철 칼날이 밤안개를 갈랐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저항을 제로로 만들어 바람 소리조차 흡수해 버리는 정적의 도법 제1초식, 묵흔도(Dark Trace Blade)였다.
서각-!
살이 찢어지고 뼈가 잘려 나가는 마찰음마저 칼날 표면에 서린 차가운 묵기가 완벽하게 삼켜버렸다. 비명 소리조차 터져 나오지 못했다. 야뇌의 검은 복면 너머로 검붉은 피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고, 잘려 나간 목줄기 사이로 놈의 생명 신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야뇌의 시신은 계곡 아래 뾰족한 바위 위로 무겁게 추락했다.
*쿵.*
지독한 정적이 다시 귀곡협을 지배했다. 엽무강은 낙하하는 충격을 왼발 하나로 간신히 받아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커흑……! 쿨럭! 쿨럭!”
한골산 가루의 효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자, 억눌려 있던 지옥 같은 고통이 전신 골격 속으로 수십 배의 파동이 되어 몰려왔다. 깨진 단전 주변의 경맥들이 불타는 듯 요동쳤고, 으스러진 오른쪽 무릎 관절에서는 뜨거운 피가 깁스 붕대를 적시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간이 심하게 망가져 검붉은 피를 연신 토해내는 엽무강의 전신이 오한으로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는 쉴 수 없었다.
그는 으스러진 다리를 진흙 바닥에 질질 끌며 야뇌의 시신으로 기어갔다. 놈의 품을 뒤져 Heukmuga의 암살 표적 일지와 독 단검을 수습한 뒤, 시신을 무경산 뒤편 귀곡협 깊은 수렁의 오물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끈적이는 진흙과 썩은 오물이 야뇌의 시신을 삼키자, 흔적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엽무강은 빗자루 자루 조각을 주워 자신의 핏자국과 발자국을 꼼꼼히 지워냈다.
동이 트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안개를 녹여내기 시작할 때쯤, 엽무강은 가죽 압박대를 겨우 지탱한 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산문 입구의 문지기 초소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뼈가 내려앉는 듯한 고통에 의식이 흐려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비굴한 문지기 ‘무강’의 가면을 다시 얼굴에 썼다.
겨우 초소 문앞에 도달한 엽무강은 덜덜 떠는 손으로 초소의 목조 문고리를 잡았다. 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온기에 안도하며 문을 열고 안으로 기어 들어간 순간, 그의 전신이 얼어붙듯 굳어버렸다.
초소 내부의 낡은 평상 위.
어두운 그늘 속에 푸른 뇌전의 기운이 서린 무거운 도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사내, 우문패가 차가운 찻잔을 손에 든 채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번뜩이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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