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자루가 부르는 진공
서태윤의 마른 손가락이 오크나무 책장 틈새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끝이 엽무강의 이마에 닿기 바로 직전, 비각 3층을 채운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엽무강은 심장 박동마저 멈춘 귀식공(Turtle Breathing Technique)의 극의 속에서 오직 차가운 이성만을 번뜩였다. 이마 위로 뻗어온 손가락에서 서태윤의 소양진기가 내뿜는 미세한 열기가 느껴졌다. 만약 놈의 손끝이 이마에 닿는 순간, 차갑게 식어버린 몸의 기묘한 감촉과 전신 관절이 해체된 기형적인 신체 구조를 들키게 될 터였다.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비각 아래층에서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황노인이 실수인 척 빗자루 자루로 청동 등잔을 쓰러뜨린 소리였다.
챙그랑!
고요한 비각의 침묵을 깨는 파열음에 서태윤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딱 멈추었다. 놈은 가늘고 날카로운 눈을 찌푸리며 책장 틈새에서 손을 거두었다.
“늙은이가 또 쓸데없는 짓을…….”
서태윤은 혀를 차며 횃불을 돌려 계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놈의 군화 발소리가 3층을 빠져나가 아래층으로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엽무강은 책장 뒷벽의 1인치 틈새에 구겨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비각의 거대한 목조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고 내부에 완벽한 어둠이 찾아온 후에야 엽무강은 멈추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두근. 두근.
느리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전신으로 뜨거운 피를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연골유신술(Soft Bone Flow)로 억지로 해체해 두었던 전신의 관절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극……!”
엽무강은 입술을 깨물며 오른손으로 늘어진 왼쪽 어깨를 붙잡았다. 우문패의 뇌전 기운에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왼팔은 무거운 모래주머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오직 오른손 하나만을 사용해 이탈된 뼈마디를 하나씩 제자리로 밀어 넣어야 했다.
드드득, 뚝.
어둠 속에서 관절이 맞춰지는 기괴한 마찰음이 울릴 때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부러진 오른쪽 무릎 관절을 강제로 맞출 때는 너무나 큰 고통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의 신음도 비각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관절을 모두 복구한 엽무강은 품속을 더듬었다. 황노인의 마스터키와 함께, 새로 수습한 무경도보 잔해(추가 구결)가 가죽 주머니 속에서 안전하게 만져졌다.
그는 서태윤이 비각 문을 잠그고 퇴각한 틈을 타, 황노인이 일러준 지하 하수 통로의 무쇠 창살로 향했다. 마비된 왼팔을 품속에 단단히 고정하고, 오른손 하나로 창살의 비밀 빗장을 마스터키로 해체했다. 축축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하수구를 기어 나오며, 그는 차가운 밤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동이 트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무경산 기슭을 비출 때쯤, 엽무강은 간신히 자신의 문지기 초소로 기어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물에 젖은 야행복을 벗어던지고, 초소 바닥의 썩은 목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품속의 비전 도보 조각과 마스터키를 숨겨두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빗자루 자루 속에 감춰진 철척비(Iron Broom Blade)의 얇은 묵철 칼날에 머물렀다. 어젯밤의 격렬한 참격과 도주 과정에서 칼날 끝에 미세한 균열이 더 깊어져 있었다.
‘우문패가 초소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 만약 놈이 불시에 들이닥쳐 이 빗자루를 검사한다면…….’
엽무강의 예리한 이성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놈은 손목의 굳은살까지 의심할 정도로 영민한 사냥개였다. 빗자루 자루 속에 칼날이 들어있는 채로 우문패를 대면하는 것은 스스로 목을 내주는 짓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철척비의 손잡이를 돌려 얇은 묵철 칼날을 자루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그리고 칼날만을 초소 바닥 목판 아래 깊숙한 진흙 속에 묻어 숨겼다. 이제 그의 손에 남은 대나무 빗자루는 내부가 텅 비어 있는, 그저 평범하고 가벼운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는 오른쪽 다리에 진흙과 나무껍질로 만든 가짜 다리 깁스를 다시 단단히 동여매고 낡은 이불 속에 몸을 눕혔다. 한독(寒毒)이 뼛속까지 시려와 몸이 덜덜 떨렸지만, 그는 눈을 감고 바보 같은 코골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해가 안개를 뚫고 솟아올랐다.
쾅!
초소의 낡은 목조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찬 군화 발이 문턱을 넘어섰다. 들이친 바람과 함께 지독한 뇌전의 살기가 초소 내부의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일어나라, 절름발이 쥐새끼야.”
얼굴 전면에 칼흉터가 가득한 거구의 용병, 우문패였다. 놈의 허리에 매달린 뇌절도에서 푸르스름한 진기의 잔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엽무강은 깜짝 놀라 자지러지는 척 이불을 걷어차며 바닥을 뒹굴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눈동자의 초점을 흐리는 멍청이 미소(Idiot Smile)가 그의 얼굴에 즉시 떠올랐다.
“아이고! 대협님! 깜짝 놀랐습니다요! 헤헤…… 귀신이 또 온 줄 알고 소인이 그만 오줌을 지릴 뻔했습니다요!”
우문패는 비굴하게 조아리는 엽무강의 몰골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놈의 코가 미세하게 실룩였다.
“밤새 초소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는 듯이 코를 골더군. 하지만 네놈의 몸에서 풍기는 이 냄새는 뭐지? 비각 주변의 오래된 종이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네 누더기에서 풍기는데.”
우문패의 날카로운 추궁에 엽무강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서태윤의 수색을 피하는 과정에서 비각의 먼지가 누더기에 묻은 모양이었다.
“헤헤, 먼지 말씀이십니까요? 대주방 삼월이 누님이 비각 구석에서 땔감으로 쓸 낡은 장부책을 버렸다기에, 소인이 밤중에 몰래 주워다 초소 바닥에 깔고 잤습니다요! 엉덩이가 시려서 그랬습니다요, 대협님!”
엽무강은 초소 구석에 뒹구는 반쯤 썩은 고서 조각들을 가리키며 멍청하게 웃었다. 미리 준비해 둔 기만용 알리바이였다.
하지만 우문패는 놈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놈의 시선이 엽무강의 오른손 손목에 머물렀다. 빗자루질을 하는 잡역부 치고는 검을 쥐는 손에만 생기는 독특한 형태의 깊은 굳은살.
“그 굳은살이 빗자루질만으로 생겼다기엔 너무 깊고 단단해.”
우문패가 성큼 다가와 엽무강의 오른손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놈의 단단한 손아귀가 엽무강의 관절을 조여왔다.
콰아아아!
우문패의 손끝에서 푸른 뇌전진기가 흘러나와 엽무강의 기맥을 타고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대방의 단전이 반응하는지 확인하려는 일류 고수의 직접적인 내공 시험이었다.
‘단전이 깨진 범인이라면 이 내력에 기맥이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지를 것이고, 무공을 숨긴 고수라면 반사적으로 단전의 진기가 요동쳐 방어하려 들겠지.’
우문패의 계산은 정확했다. 하지만 놈은 엽무강의 신체적 기밀을 알지 못했다.
엽무강은 단전 파괴 및 우회 경맥 상태였다. 그의 단전은 이미 사공혁에 의해 깨져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기운은 오직 척추와 뼈 속 깊은 골수 속에 묵기(Silent Qi)로 가라앉아 있었다.
우문패가 주입한 뇌전의 진기가 엽무강의 손목 기맥을 타고 흘러들었으나, 그 기운이 도달한 곳은 텅 비어 있는 깨진 단전의 잔해뿐이었다. 아무런 반발력도, 내력의 저항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뇌전의 뜨거운 열기가 어깨의 검창 상처와 부러진 무릎 관절을 자극해 뼛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마비된 왼쪽 어깨가 경련을 일으키려 했다.
“아아악! 뜨겁습니다요! 손목이 타들어 갑니다요, 대협님! 살려주십시오!”
엽무강은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을 뒹굴었다. 온몸을 사정없이 떨며 눈물과 침을 쏟아내는 그의 연기는 완벽한 범인의 발악이었다.
우문패는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 엽무강을 초소 밖 진흙 마당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퍽!
가짜 다리 깁스가 진흙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엽무강은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다.
“네놈이 정말로 무공을 모르는 범인이라면, 이 뇌전의 기운을 몸 밖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기맥이 타서 죽을 터.”
우문패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엽무강의 손목을 잡은 손에 뇌전의 강도를 더 높였다. 지독한 번개 기운이 엽무강의 오른팔 전체를 시커덓게 태우며 밀려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오른팔의 기맥이 완전히 타버려 영구적인 불구가 될 위기였다. 내력을 방출해 막으면 정체가 탄로 나고, 막지 않으면 신체가 파멸한다.
엽무강의 이성이 찰나의 순간 역발상의 전술을 계산해 냈다.
‘몸속으로 들어온 뇌전의 기운을 내 묵기로 막는 것이 아니라, 뼈 속 우회 경맥을 통해 그대로 흘려보내 도구를 통해 배출한다.’
그의 오른손은 마당 구석에 기대어 있던 대나무 빗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빗자루였으나, 내부의 묵철 칼날을 빼내어 텅 비어 있는 대나무 자루였다.
엽무강은 묵혼심법의 기운을 아주 미세하게 조절하여, 우문패가 주입한 뇌전의 살기를 자신의 뼈를 타고 흘려보내 오른손에 쥔 빗자루 끝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아이고, 뜨거워라! 마당에 불이 붙었습니다요! 쓸어야 합니다요, 쓸어서 불을 꺼야 합니다요!”
엽무강은 빗자루 먼지뿌리기(Dust Blind)를 전개했다. 빗자루 끝에 실린 우문패의 뇌전 기운이 마당의 마른 돌가루와 먼지를 만나 자욱한 흙먼지 폭풍을 일으켰다.
스아아아아!
갑작스럽게 피어오른 거대한 먼지 장막이 우문패와 주변 순찰 무사들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무사들이 기침을 하며 눈을 가리는 사이, 엽무강은 먼지 속에서 정적의 도법 1성 ‘무풍(Windless)’의 경지를 미세하게 전개했다.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에 공기의 저항이 사라지며 미세한 진공의 궤적이 형성되었다.
엽무강은 빗자루 끝을 땅바닥에 강하게 밀착시키며 쓸어내렸다. 그의 몸을 관통해 흘러들어온 우문패의 파괴적인 뇌전 진기가, 무풍의 진공 궤적을 타고 소리 소문 없이 축축한 진흙바닥 속으로 스며들어 분산되었다.
퍼석, 퍼석.
흙먼지가 고요하게 가라앉으며, 우문패의 살기 어린 뇌전은 단 한 톨의 폭발음도 내지 못한 채 대지 속으로 완전히 소멸했다.
먼지가 걷히자 마당 한가운데는 오직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채 빗자루를 쥐고 덜덜 떨고 있는 비참한 절름발이 문지기만이 서 있었다.
우문패는 자신의 뇌전진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당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놈의 예리한 기감에도 어떠한 무공의 반발이나 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그저 미친 바보가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빗자루를 휘둘러 먼지를 피운 것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일류 사냥꾼의 집요한 의심은 그리 쉽게 꺾이지 않았다.
우문패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 엽무강이 쥐고 있는 대나무 빗자루 자루를 향했다. 빗자루질을 하는 동작의 기묘한 각도, 그리고 뇌전의 기운을 받아내고도 타지 않은 대나무의 단단함이 놈의 눈에 위화감으로 걸려들었다.
“빗자루가 묘하게 무겁고 단단하군…….”
우문패가 낮게 읊조리며 엽무강의 손에서 대나무 빗자루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대, 대협님? 제 귀한 빗자루입니다요…… 그걸로 마당을 쓸어야 오늘 밥을 얻어먹습니다요…….”
엽무강은 진흙탕 바닥에 엎드린 채 비굴하게 손을 뻗으며 애걸했다. 그의 심장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바보처럼 울부짖었다.
우문패는 빗자루 자루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내부를 응시했다. 놈의 손끝에 흐르는 푸른 번개 기운이 대나무 표면을 지지직 소리를 내며 태우기 시작했다.
“귀신 살수가 빗자루 자루 속에 얇은 칼날을 숨겨두고 밤마다 목을 벤다는 소문이 있지.”
우문패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엽무강을 노려보았다.
“네놈의 이 빗자루 속을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우문패가 양손으로 대나무 자루의 양끝을 쥐고 내력을 주입했다. 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파괴적인 뇌전의 기운이 대나무 자루를 감싸 안으며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빠드득, 콰직!
두꺼운 대나무 자루가 우문패의 강력한 완력과 번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부러지며 날카로운 파편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엽무강은 진흙바닥에 엎드려 조아린 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차가운 외눈으로 부러지는 빗자루 자루를 응시했다.
대나무가 쪼개지며 텅 비어 있는 내부가 우문패의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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