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비각의 그림자
밤안개는 무경산의 험준한 절벽을 타고 내려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대지를 적시는 밤이슬이 산문 초소의 지붕을 때리며 툭, 툭 소리를 냈다. 초소 앞 평상에 앉아 졸던 감시꾼 한구의 거친 코골이 소리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초소 내부의 어둠 속에서, 엽무강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낮 동안의 비굴하고 멍청한 빛을 완전히 지워낸 채, 심연처럼 깊고 차가운 안광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 자시(子時).’
엽무강은 소리 없이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죽 압박대로 단단히 조여맨 오른쪽 무릎 관절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 낮에 우문패가 가한 뇌전진기의 여파로 왼쪽 어깨와 왼팔은 여전히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다. 왼팔은 몸 옆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 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오직 오른손 하나와 기형적으로 비틀린 왼발의 탄력만으로 오늘 밤의 일을 완수해야 했다.
무강은 초소 뒷벽의 썩은 목판 틈새를 뜯어냈다. 그는 한 구의 소리 없는 유령이 되어, 숨소리마저 지우는 귀식공(Turtle Breathing Technique)을 전개한 채 안개 낀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기어 나갔다. 평상에 앉아 졸고 있던 한구는 바로 등 뒤에서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존재가 지나가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대나무 숲의 서늘한 기운이 늘어진 왼팔에 닿았지만 감각은 여전히 무뎠다. 엽무강은 오른손으로 품속을 더듬어 배무덕에게서 빼앗은 황동 순찰패를 확인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뇌리로 전해졌다.
그는 절뚝이는 다리를 끌면서도 지면을 딛는 소리를 완벽히 소멸시켰다. 빗자루질을 하며 매일 연마했던 정적의 도법 1성 ‘무풍’의 보법이었다. 바람을 가르지 않고, 바람의 흐름에 동화되는 움직임. 마비된 왼팔을 몸개에 바짝 밀착시킨 채, 그는 그림자처럼 무경도문 북편 깊은 곳에 위치한 금지된 무경비각으로 향했다.
금지된 무경비각(Forbidden Mukyeong Library).
사공혁이 찬탈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뒤, 정통 도법의 맥을 끊기 위해 철제 인장으로 봉인해 버린 금기의 땅이었다. 비각 주변을 지키던 정예 무사들은 낮 동안 사공표의 실종 사건으로 인해 낙조애 절벽 수색을 위해 대거 이동한 상태였다. 한무길이 건네준 경비 교대의 틈새는 정확했다. 지금 비각 주변에는 오직 서늘한 밤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엽무강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비각의 거대한 목조 외벽으로 다가갔다.
서걱, 서걱.
비각 입구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낡은 빗자루가 돌바닥을 쓰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엽무강은 즉시 숨을 멈추고 기척을 죽였다.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허리가 기억 자로 굽고 눈곱이 낀 채 먼지를 쓸고 있는 80대의 노인, 황노인이었다.
치매에 걸린 척 연기하며 사공혁의 감시 속에서도 비각을 지켜온 충직한 사서.
황노인은 엽무강이 숨어 있는 대나무 그늘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빗자루질을 하며 나직하게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어이구, 늙은이가 눈이 어두워 열쇠를 어디다 흘렸나 보네……. 비각 3층 구석에는 먼지만 가득할 텐데, 사공혁 그 고얀 놈이 책들을 다 태우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행이야…….”
칭그랑.
황노인이 쓸고 지나간 돌바닥 위로 묵직한 쇠뭉치가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비각 내부의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비밀 마스터키였다. 황노인은 열쇠가 떨어진 것도 모르는 척, 먼지를 쓸며 느릿느릿 반대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엽무강은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손을 뻗어 바닥의 마스터키를 낚아챘다. 마비된 왼팔 대신 오직 오른손 하나만을 움직였음에도, 그의 동작에는 단 한 톨의 바람 소리도 섞이지 않았다.
그는 마스터키를 품에 넣고 비각의 비밀 측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미세한 마찰음조차 묵혼심법의 차가운 묵기로 지워버린 채, 그는 비각 내부의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각 내부는 지독하리만큼 고요했고, 오래된 종이 냄새와 곰팡이 슨 흙내음이 진동했다.
엽무강은 으스러진 오른다리를 끌며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무릎 관절 내부에서 뼈 조각들이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무심선(Mindless Zen)을 전개해 통증을 정신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혔다. 마비된 왼팔이 계단 난간에 부딪히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왼 소맷자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마침내 도달한 비각 3층.
이곳은 정통 무경도문의 비전 서적들이 사공혁에 의해 무가치한 쓰레기로 분류되어 방치된 황량한 공간이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서가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엽무강은 한무길이 일러준 대로 서가 맨 구석, 전대 장문인의 저서들이 꽂혀 있던 낡은 오크나무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 손가락끝에 미세한 묵기를 실어 책장 뒷벽의 비밀 홈을 더듬었다.
‘찾았다.’
책장 뒷벽의 이중 판자가 소리 없이 열리며, 가죽 주머니에 싸인 낡고 찢어진 가죽 조각들이 드러났다. 사공혁이 불태우려 했던 ‘무경도보 잔해’의 또 다른 구결들이었다. 단전을 우회하여 전신 골격에 내력을 비축하는 기형적인 운기법의 핵심 중반부 구결이 적힌 가무지보(無價之寶)였다.
엽무강이 떨리는 오른손으로 가죽 조각을 꺼내 품속에 밀어 넣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비각 1층의 무거운 목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규칙적이고 묵직한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엽무강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일반 경비 무사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발걸음마다 실린 내력의 파동이 비각 전체의 기류를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 발소리는 거침없이 3층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서태윤……!’
문파의 비전 서적들을 사공혁에게 넘겨주고 내무장로 자리를 꿰찬 배신자, 서태윤이었다. 놈은 매일 밤 서고의 장부와 밀실을 직접 검사하는 예리하고 집요한 기감을 지닌 이류 절정의 고수였다.
계단 외에는 탈출로가 없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기에는 마비된 왼팔과 부러진 다리 때문에 소리 없이 착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방이 꽉 막힌 폐쇄 공간에서 서태윤의 삼엄한 기감에 노출되는 순간, 정체는 폭로되고 모든 복수극은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막다른 길이었다.
발소리가 이미 2층을 지나 3층 계단 참에 다다르고 있었다. 서태윤이 들고 있는 횃불의 붉은 불빛이 계단 벽면을 타고 3층 서가 입구로 스며들었다.
엽무강은 눈앞의 거대한 오크나무 책장 뒷벽과 비각 벽면 사이의 좁은 틈새를 바라보았다. 폭은 단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약 1인치에 불과한 비좁은 틈새였다.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그 어두운 틈새는 인간의 몸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엽무강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연골유신술(Soft Bone Flow).’
엽무강은 전신의 기맥을 닫고 묵혼심법의 묵기를 뼈마디 사이에 주입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마비된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드드득, 뚝.
지독한 골음이 뼈 속에서 울렸다. 엽무강은 이빨이 깨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비명을 안으로 삼켰다. 왼쪽 어깨 관절이 뼈째로 이탈하며 힘없이 늘어졌다. 뒤이어 쇄골과 갈비뼈를 스스로 비틀어 관절의 연결 고리를 하나씩 해체해 나갔다.
뼈가 살을 찢고 나오는 듯한 지옥 같은 통증이 뇌리를 난사했다. 전신이 망치로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묵혼심법의 진기로 출혈을 강제로 억누르며 상체를 극단적으로 납작하게 가라앉혔다. 부러진 오른쪽 무릎 관절마저 비틀어 관절의 위치를 기형적으로 변경했다.
몸이 가죽부대처럼 부드럽고 얇게 접혔다.
엽무강은 납작해진 몸을 책장 뒷벽의 1인치 틈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거친 벽면의 가시들이 상처 입은 어깨와 등 가죽을 찢고 파고들었지만, 그는 단 한 톨의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좁은 틈새에 완전히 구겨진 채 몸을 밀착시키자마자, 그는 귀식공(Turtle Breathing Technique)을 전개했다.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분당 열 번, 다섯 번……. 마침내 심장이 완전히 정지했다. 전신의 숨구멍이 닫히고 체온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는 먼지 낀 책장 뒤의 한 구의 고요한 벽돌이자, 생명의 온기가 완전히 사라진 시체로 동화되었다.
스스슥.
서태윤이 횃불을 높이 든 채 3층 서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염소수염을 기른 그의 차가운 얼굴 위로 횃불의 붉은 불빛이 일렁였다.
서태윤은 3층 서고 중앙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일류 고수에 필적하는 그의 예리한 기감(氣感)이 서고 내부의 미세한 기류 흐름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투명한 바늘 같은 진기의 파동이 책장 사이사이와 먼지 쌓인 바닥을 집요하게 찔러왔다.
바늘 끝 같은 기감이 엽무강이 숨어 있는 책장 틈새를 스쳐 지나갔다. 엽무강은 심장 박동마저 멈춘 채, 뼈 속에 잠침시킨 묵기만을 유지하며 완벽한 무(無)의 상태를 유지했다.
서태윤이 눈을 떴다. 그의 눈빛에 미세한 의혹이 서렸다.
“이상하군…… 분명 쥐새끼의 기척을 느꼈는데.”
서태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무거운 군화 발소리가 석판 바닥을 울릴 때마다, 책장 뒤에 갇힌 엽무강의 파열된 무릎 관절에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 뼈 조각들이 요동쳤다. 뼈 조각이 어긋나 쇳소리가 나려는 순간, 엽무강은 혀를 깨물어 피를 삼키며 내력으로 무릎 뼈를 강제로 움켜쥐었다.
서태윤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타박.
발소리가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엽무강이 납작하게 구겨져 숨어 있는 오크나무 책장 바로 앞이었다.
서태윤과 엽무강 사이의 거리는 불과 책장 판자 한 장 두께였다. 서태윤이 내뿜는 소양진기의 뜨거운 열기가 판자 틈새를 타고 엽무강의 식어버린 피부에 닿았다.
서태윤이 횃불을 책장 가까이 들이밀었다. 불빛이 책장 뒷벽의 미세한 틈새로 스며들어, 먼지 속에 구겨진 귀면 살수의 차가운 외눈을 비추기 직전이었다.
서태윤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 책장에 보관된 전대 장문인의 비전 서적을 사공혁 장문인께 바쳐야겠군…….”
서태윤의 마른 손가락이 엽무강의 코끝 바로 앞에 꽂혀 있는 낡은 도보 가죽 책을 잡기 위해 틈새로 뻗어 들어왔다. 손가락 끝이 엽무강의 이마에 닿기 일보 직전의 순간, 사위는 지독한 정적 속에 잠겼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