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빙의 숨결
은서윤의 기계식 렌즈가 태오의 투명한 얼음 팔에 반사되어 기괴한 푸른빛으로 빛났다.
진료소를 나선 지 겨우 두 시간째였지만, 대지 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13구역의 낡은 철골 구조물과 가스관들이 눈더미 아래 묻히고,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백색의 장막만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이곳은 ‘만년빙의 심연’ 경계선. 영하 80도는 기본이고, 계곡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영하 120도 이하까지 기온이 급강하하는 인간 거부의 땅이었다.
“태오 씨, 거기 멈춰요! 발밑에 크레바스가 있어요!”
하얀 설상 위장 천을 전신에 두른 사내, 외곽 정찰대원 구본혁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태오의 어깨를 붙잡았다. 구본혁의 얼굴은 두꺼운 마스크와 고글로 가려져 있었지만, 고글 너머의 눈동자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디지털 온도계의 액정은 이미 영하 98도를 가리키며 붉은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태오는 걸음을 멈추고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눈더미 같았지만, 미세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균열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는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얼어붙은 채 발견되지 못할 심연이었다.
태오는 입가에 두른 두꺼운 가죽 목도리를 고쳐 잡으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김은 공중에 닿자마자 미세한 얼음 가루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영하 80도 행동 수칙.’
이 가혹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부와 스승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생존의 철칙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금속 장비를 절대 맨손으로 만지지 말 것. 피부의 단 1밀리미터도 허공에 노출시키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폐가 얼어붙지 않도록 호흡을 극도로 절제할 것.
태오는 오른팔을 낡은 가죽 코트 안쪽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동결 억제제 덕분에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전완근 절반을 뒤덮은 투명한 유리 결정은 여전히 무겁고 차가웠다. 능력을 무리하게 쓸 때마다 결정화가 심장 쪽으로 기어오르는 그 지독한 페널티가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신경을 짓눌렀다.
“구 정찰대원, 제국 수송선의 정확한 추락 좌표는 어디지?”
태오의 목소리는 칼바람에 묻혀 둔탁하게 울렸다. 구본혁은 주머니에서 소형 탐사 단말기를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화면의 액정이 극저온으로 인해 이미 검게 얼어붙어 먹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가 버티질 못하는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 근방의 기류 변화는 제 머릿속에 다 들어있으니까요. 저 전방의 절벽 너머, 바람이 소용돌이치는 협곡 초입에 수송선이 걸쳐져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구본혁이 태오와 그의 뒤에서 바짝 군장 가방을 움켜쥐고 있는 은서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온이 영하 110도 아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폭풍이 더 거세지면 ‘서리 격류’가 발생할 겁니다. 방한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1분 만에 세포가 얼어 터져 즉사할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회군하는 게 현명합니다.”
“안 돼.”
태오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 그의 눈동자는 이미 깊은 심연의 푸른 서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린이에게 남은 시간은 반나절뿐이다. 전지가 방전되면 그 애의 심장이 먼저 얼어붙어. 내게는 돌아갈 길 따위는 없다.”
은서윤 역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기계식 확대 렌즈가 달린 고글이 눈바람 속에서도 태오의 심장 부근을 조심스럽게 관측하고 있었다.
“나도 포기 안 해. 제국의 그 오만한 과학 관료들이 만든 수송선이 내 눈앞에 있는데, 자폭 장치든 삼중 잠금이든 내 손으로 직접 해체해 보지 않으면 죽어도 눈 못 감아. 가자고, 태오 씨.”
은서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을 압도하는 천재 공학자 특유의 집요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태오는 그녀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대검 손잡이를 왼손으로 고쳐 쥐었다.
“길을 안내해, 구본혁.”
구본혁은 한숨을 내쉬며 얼음 송곳을 지면에 박아 넣으며 앞장섰다. 세 사람은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협곡 아래로 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기온이 내려갈수록 대기 중의 산소마저 얼어붙는 듯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태오는 민우진식 열 보존 호흡을 극도로 미세하게 유지하며, 체내의 온기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폐쇄 회로를 가동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자욱한 화이트아웃 너머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더미 속에 반쯤 박힌 채 비스듬히 꺾여 있는 거대한 강철의 괴수. 제국 제13 보급선단의 대형 수송선이었다. 선체 사방에서 뿜어져 나온 고열의 엔진 잔열이 주변의 얼음을 녹여 기괴한 수증기 기둥을 형성하고 있었다.
“찾았다…….”
은서윤이 숨을 헐떡이며 기쁨의 목소리를 냈지만, 태오는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어 거대한 빙판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태오 씨? 왜 그래요?”
“조용히 해.”
태오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수송선 주변의 흩어진 화물 상자들과 눈더미를 향하고 있었다. 비록 극저온 환경으로 인해 ‘열량 감지’ 능력의 유효 범위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개조형 열원 추적 안경 없이도 그의 육감은 대기 중의 미세한 온기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눈보라 너머, 수송선 선체 주변의 눈더미들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인간의 호흡, 그리고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약한 열기.
“매복이다.”
태오가 나직하게 읊조리는 순간, 협곡 위쪽의 눈바람 너머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피이이이이-
그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대기를 찢고 날아오는 고온의 투척체였다. 태오의 열량 감지 시각에 붉은색 선으로 길게 뻗어 나오는 궤적이 투시되었다. 도겸의 저격수가 쏜 고열 화살이었다. 화살촉 끝에 장착된 소형 열원 증폭기가 주황색 불꽃을 튀기며 태오가 서 있는 바위 전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정면으로 피하기에는 눈바람의 저항이 너무 강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상황. 태오는 망설임 없이 오른발을 허공을 향해 내딛었다.
‘성에 발판 생성.’
그가 발끝에 모여 있던 미세한 냉기 파동을 허공의 수증기를 향해 폭발적으로 방출했다. 찰나의 순간, 공기 중의 수분이 급격히 결빙되며 태오의 발밑에 단단하고 투명한 푸른 성에 발판이 생성되었다.
카강!
태오는 성에 발판을 강하게 디디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가 디뎠던 성에 발판은 도약의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즉시 유리 가루처럼 사방으로 부서져 내렸지만, 그 힘으로 태오의 신체는 고열 화살의 궤적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쿠우웅!
화살이 태오가 서 있던 빙판 바위에 직격하며 엄청난 폭발 열기와 함께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녹아내린 얼음 물방울들이 공중에서 다시 얼어붙어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되어 사방으로 휘날렸다.
“하하핫! 역시 13구역의 괴물답군! 그걸 피하는가?”
자욱한 수증기 너머에서 비열하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눈보라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사내. 한쪽 뺨에 깊은 칼자국 흉터가 있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14구역의 악명 높은 약탈자, 도겸이었다.
도겸의 뒤편으로 수십 명의 사설 약탈단원들이 고온의 비수와 쇠사슬을 쥔 채 그들을 포위하듯 좁혀오고 있었다.
“설태오, 네 동생을 살릴 안정제가 저 수송선 안에 있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보물은 오늘 우리 구역의 수확물이다. 목숨이 아깝다면 그 잘난 대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시지!”
도겸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부하들이 지면의 눈더미 속에 숨겨두었던 덫의 줄을 일제히 잡아당겼다.
철컥! 슈우우욱!
지면을 덮고 있던 얼음 판때기들이 뒤집어지며, 고탄성 탄소강으로 제련된 가죽 와이어 덫들이 사방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사냥감의 발목을 낚아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거나 사지를 결박하는 잔혹한 사냥 도구였다.
“앗……!”
은서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던 가죽 와이어 하나가 그녀의 오른쪽 발목을 단단히 낚아챈 것이다. 와이어에 장착된 기계식 도르래가 미친 듯이 감겨 돌아가며, 은서윤의 몸을 수송선 아래의 어두운 절벽 틈새로 사정없이 끌고 가기 시작했다.
“태오 씨! 가방이……! 해킹 장비가 떨어져요!”
은서윤이 끌려가며 눈더미를 움켜쥐었지만, 얼어붙은 지면은 아무런 마찰력도 제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공구 가방이 열리며 기계 부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대로 그녀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도겸의 부하들에게 붙잡힌다면 보급선의 잠금장치를 해제할 방법은 영영 사라질 터였다.
태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도약한 상태에서 그대로 지면을 향해 하강하며, 왼손으로 은서윤을 끌고 가는 고탄성 와이어를 정면으로 움켜쥐었다.
바스락!
태오의 장갑 표면에서 서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심장 깊은 곳의 억제 장치를 강제로 비틀어 절대영도의 극저온 냉기를 왼손 손끝으로 집중시켰다. ‘접촉 즉시 동결’의 권능이 와이어를 타고 번개처럼 전도되었다.
치이이이익!
고탄성의 단단한 탄소강 와이어가 태오의 손길이 닿자마자 1초도 걸리지 않아 투명한 청색 얼음 사슬로 변해버렸다. 와이어 내부에 흐르던 인장력과 분자 운동 에너지가 완벽하게 정지된 것이다.
태오는 얼어붙은 와이어를 왼손으로 가볍게 비틀어 쥐었다.
쨍강!
강철보다 질겼던 사냥용 와이어가 유리창이 깨지듯 허무하게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은서윤은 굴러떨어지던 몸을 간신히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구본혁이 정찰 장비의 안테나를 세워 도겸의 저격수 좌표를 찍으려 시도했으나, 몰아치는 눈보라와 수송선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전자기 방전 노이즈로 인해 액정이 완전히 나가버려 장비가 먹통이 되고 말았다.
“제장, 기계가 완전히 죽었습니다! 여기서는 시야 확보도 불가능합니다!”
구본혁이 소리쳤다. 도겸의 부하들이 다시 한번 고열 화살을 장전하는 소리가 눈바람 너머로 불길하게 들려왔다.
태오는 은서윤의 옷깃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눈앞에 열려 있는 수송선의 거대한 파손된 해치 입구를 가리켰다.
“선체 내부로 진입한다. 좁은 공간으로 적들을 유인해 한 놈씩 얼려버린다. 서윤, 내 뒤를 바짝 따라와.”
태오는 마비가 시작되려는 오른팔의 통증을 억누르며, 수송선의 어두운 강철 해치 입구를 향해 비장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뒤편의 눈보라 속에서 도겸의 사설 약탈단이 무기를 치켜들며 붉은 열기의 아지랑이를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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