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의 이방인들
쿵, 하고 무거운 진동이 어둠 속에서 울렸다.
장벽 경비초소 지하의 환기구 해치를 지나 수십 미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온 설태오는 축축하고 차가운 수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왼팔은 품에 안긴 여동생 설아린의 가녀린 육체를 부서져라 감싸 안고 있었다.
영하 80도의 그레이 웨이스트와는 다른 종류의 냉기가 피부를 스쳤다. 지독한 눈보라 대신, 기계유 냄새와 썩은 오수가 뒤섞인 습하고 무거운 한기. 거대 인공 온실막인 ‘아르카디아 돔’의 가장 어둡고 비참한 밑바닥, 지하 하수구 구역이었다.
“태오 씨! 아린이 상태는 어때요?”
뒤이어 수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은서윤이 단말기 배낭을 움켜쥐며 급히 물었다. 썰매가 폭발할 때 입은 타박상 때문에 그녀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태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아린을 살폈다. 척추 가죽에 이식된 생명 유지 장치, ‘안티-프리즈-04’의 작동등은 미약한 초록빛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린의 창백한 이마에는 미세한 서리가 다시 내려앉고 있었다. 급격한 기압 변화와 환경 전이로 인해 장치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탓이었다.
태오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결정화는 이제 오른쪽 어깨를 넘어 목덜미 절반까지 투명하고 단단한 청색 얼음 결정으로 뒤덮어 놓았다. 대검을 쥐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완벽하게 박제된 유리 조각 같은 팔.
아린의 뺨을 어루만져 그 온기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촉각을 상실한 태오의 손끝은 아무런 감각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 지독한 무감각이 태오의 심장을 더욱 차갑게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억지로 마비된 팔을 낡은 가죽 코트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왼손으로 대검을 고쳐 쥐었다.
“……아직은 버티고 있어. 하지만 서둘러야 해.”
“이쪽이야! 쥐새끼들처럼 거기 멍하니 서 있다간 제국 놈들의 드론밥이 될 거라고!”
수로의 어둠 저편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진흙을 바르고 냄새나는 하수구 장화를 신은 사내, 길동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평생을 13구역과 돔 지하의 오수관을 기어 다녔다는 길동의 눈동자에는 외지인에 대한 강한 경계심과 탐욕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특히 태오의 전신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푸른 냉기 아지랑이를 볼 때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춤거렸다. 13구역의 잔혹한 보안관 장호열을 얼려 죽였다는 괴물의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직감한 탓이리라.
“약속한 열량 전지는 어떻게 됐지? 장벽을 넘어오게 해줬으니 내 몫을 내놔야지.”
길동이 비열하게 손을 내밀었다.
태오는 왼손으로 코트 주머니에서 13구역 발전소에서 약탈한 소형 열원 전지 한 칸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길동은 전지를 받자마자 가슴팍에 대고 온기를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흐, 신용은 확실하군. 따라와. 순찰대의 눈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송수관 정비소 지하가 있어. 거긴 아르카디아 돔에서 흘러나오는 폐수 열기 덕분에 바닥에 서리가 내리지 않는 유일한 온기 구역이지. 아가씨를 눕히기엔 안성맞춤일 거야.”
길동이 앞장서서 미로 같은 하수구 교차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철제 파이프가 거미줄처럼 얽힌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녹슨 물방울이 떨어졌고, 고압 온수 배관이 지날 때마다 치익 하는 불길한 증기 소리가 수로 전체를 울렸다. 13구역의 투박한 폐허와 달리, 이곳은 제국의 고도화된 기계 문명이 뿜어내는 정교하고 거대한 디스토피아의 철창 같았다.
그때, 은서윤의 해킹 단말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삐비빅—!
“태오 씨, 멈춰요! 상층 수로에서 경보 주파수가 감지됐어요!”
은서윤의 경고와 동시에 수로 저편의 꺾인 모퉁이 너머에서 차가운 청색 서치라이트 불빛이 벽면을 타고 번져왔다.
위이이이잉—!
낮게 웅웅거리는 기계음. 아르카디아 돔 하층 구역을 순찰하는 자동 정찰 드론 3기가 수로 내부의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드론 하부에 장착된 복합 센서 렌즈가 사방을 정밀하게 스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장! 이 구역은 순찰 주기가 아닐 텐데!”
길동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비명을 지르려 하자, 태오는 그의 목덜미를 왼손으로 낚아채 벽면의 폐기물 가스 배관 뒤로 강제로 끌어당겼.
“조용히 해. 목숨이 아깝다면.”
태오의 서늘한 목소리에 길동은 입을 턱 다물었다. 세 사람은 가스 배관 뒤의 좁은 틈새에 몸을 밀착한 채 숨을 죽였다.
정찰 드론 3기가 그들이 숨은 배관 바로 앞까지 다가와 공중에 멈춰 섰다. 드론의 열 감지 센서가 수로의 미세한 온도 변화를 감지하려는 듯, 붉은색 스캔 레이저가 가스 배관 표면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이대로 있으면 아린이의 생명 유지 장치 열기와 내 단말기 잔열 때문에 3초 안에 록온당해요!”
은서윤이 단말기 화면을 보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 순간, 겁에 질린 길동이 억지로 몸을 비틀어 벽면에 붙은 오래된 오수 밸브를 잡았다.
“이, 유독가스 배관을 열어서 뜨거운 가스를 뿜어내면 드론의 열 센서를 교란할 수 있어! 내가 해볼 테니……!”
“하지 마!”
은서윤이 말렸지만, 길동의 손가락은 이미 녹슨 황동 밸브를 힘껏 돌려버린 뒤였다.
치이이이익—!
밸브 틈새로 고온의 황산 가스와 미지근한 오수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최신형 제국 드론의 센서는 단순한 열량 변화뿐만 아니라 대기 성분의 급격한 변화까지 감지하는 복합 분석 장치였다.
삐이이이이—!
드론의 표시등이 일제히 경고 신호인 적색으로 변하며, 서치라이트가 태오 일행이 숨은 배관 틈새를 정조준했다. 록온 경보음이 귓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경보가 돔 전체에 울리면 장호진의 중력 타격대가 수분 내로 이곳을 포위할 터였다.
시간이 없었다.
태오는 왼손을 뻗어 바로 옆을 지나던 뜨거운 고압 온수 배관을 움켜쥐었다.
스우우우웁—!
태오의 가슴팍에 새겨진 푸른 빙정 문양이 눈이 멀 것 같은 청색 광채를 뿜어냈다. 스스로 냉기를 만들어낼 수 없는 열역학 제2법칙의 제약. 태오는 배관 내부의 끓어오르는 온수 에너지를 자신의 심장 속 엔트로피 핵으로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고압 온수 배관이 하얗게 얼어붙으며 쩍 갈라졌고, 태오의 체내로 유입된 열량은 즉각 절대영도의 냉기 파동으로 역치 변환되었다.
“서리 장막(Frost Veil)!”
태오가 왼손을 허공을 향해 뿌렸다.
그의 손끝에서 방출된 극저온의 서리 바람이 뿜어져 나오던 온수 증기와 오수를 순식간에 결정화시켰다. 공기 중의 수분이 일시에 얼어붙으며 정찰 드론 3기의 광학 렌즈와 열 감지 센서 카메라 표면을 완벽하게 뒤덮어 버렸다.
쩍! 쩍! 쩍!
순식간에 두꺼운 얼음 장막이 드론의 눈을 가려버렸다. 시야를 완전히 상실한 드론들이 허공에서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며 수로 벽면에 부딪혔다. 드론의 내부 회로가 냉기로 인해 오동작을 일으키며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였다.
“서윤, 지금이다!”
태오의 외침과 동시에 은서윤이 단말기 무전 해킹 장치의 트리거를 당겼다.
“드론 비상 정지 주파수 동기화 완료! 강제 시스템 다운!”
서윤이 전송한 가짜 백업 신호가 얼어붙은 드론들의 수신기에 직격했다. 드론의 붉은 표시등이 노란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가동 소음을 멈추고 툭, 툭, 툭 오수 수로 바닥으로 떨어져 무력화되었다.
“하아…… 하아……”
태오는 벽면에 기댄 채 가슴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대량의 흡열과 급격한 냉기 방출의 반동으로 인해,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푸른 빙정 문양이 미세하게 검붉은 빛으로 명멸했다.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전신을 때렸고, 그의 입가에서 차가운 서리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오른팔의 결정화가 목덜미를 타고 턱밑까지 미세하게 기어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태오 씨, 괜찮아요? 심장 박동 주파수가 너무 불안정해요!”
은서윤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태오는 왼손으로 입가의 서리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어. 길동, 안내해.”
길동은 방금 전 눈앞에서 제국의 드론들이 손짓 한 번에 얼어붙어 다운되는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가 있었다. 그는 침을 삼키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쪽이야! 거의 다 왔어!”
길동의 가이드를 따라 세 사람은 어두운 오수관을 기어 마침내 목적지인 ‘송수관 정비소 지하’에 도달했다.
그곳은 아르카디아 돔 내부의 대형 온수 순환 펌프가 가동되는 지하 공간이었다. 거대한 펌프 기계가 웅웅거리며 무거운 소음을 내뿜고 있었고, 바닥은 돔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폐수의 잔열 덕분에 서리가 내리지 않아 상대적으로 온화했다.
태오는 아린을 낡은 제어반 옆의 마른 짚더미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 아지트를 사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였다.
삐이이이이—! 삐이이이이—!
갑자기 아린의 등 뒤, 척추 가죽에 이식된 안티-프리즈-04 장치에서 귀를 찢는 듯한 고압의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장치 후면의 슬롯에서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고, 아린의 가녀린 몸이 사시나무 떨듯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숨결에서 방출되는 하얀 서리의 밀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서윤! 장치가 왜 이러지?”
태오가 왼손으로 아린의 손을 잡으며 소리쳤. 하지만 감각을 잃어버린 그의 손끝은 아린의 격렬한 떨림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무서운 괴리가 태오의 이성을 뒤흔들었다.
은서윤이 급히 휴대용 진단 단말기를 아린의 척추 장치에 연결했다. 단말기 화면에 붉은색 경고 그래프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장벽을 넘어오면서 압력과 환경 주파수가 완전히 뒤틀렸어요! 13구역의 구형 전지로는 이 장치의 급격한 전압 강하를 감당할 수 없어요!”
은서윤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태오의 차가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시한폭탄의 종말을 선고하듯 비장하게 외쳤.
“태오 씨, 아린이에게 남은 시간은 최대 6시간이에요! 이 돔 하층 구역 내부에서 쓰이는 특수 규격의 고출력 플라즈마 전지를 구해서 이식하지 않으면…… 장치가 강제로 역류해서 아린이의 심장을 안에서부터 완전히 얼려버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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