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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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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열원 발전소 최상층, 노심 제어실의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장호열이 남긴 백색 서리 조각들이 바닥에서 희미한 빛을 반사하며 바스러졌다. 한때 13구역을 공포와 혹한으로 지배했던 독재자의 종말은 허망할 정도로 고요했다. 태오는 대검을 바닥에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왼손 바닥은 노심과의 강제 접촉으로 인해 살점이 타들어 가며 붉고 검은 화상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뜨거운 화상조차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극저온의 냉기에 밀려 서서히 하얗게 얼어붙고 있었다.


태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시작되었던 투명한 유리 결정화는 이제 손목과 전완근을 넘어, 팔꿈치와 오른쪽 어깨뼈, 그리고 목덜미 절반까지 완벽하게 뒤덮고 있었다. 피부 안쪽으로 흐르는 뼈의 윤곽과 미세한 신경망이 푸른 얼음 기둥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왼손을 뻗어 얼어붙은 오른팔의 살가죽을 세게 움켜쥐었지만, 뇌리로 전달되는 감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꼬집는 통증도, 살을 짓누르는 압력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


열역학 제1임계점을 돌파하고 우주적 엔트로피의 권능인 ‘절대영도의 정적’을 시전한 대가는 가혹했다. 그의 육체 절반은 이제 인간의 생명 활동이 정지된 차가운 얼음 조각상에 불과했다.


태오는 떨리는 왼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올렸다. 가방 안에는 이 박사의 실험실에서 목숨을 걸고 확보한 ‘안티-프리즈-04 안정제’ 원액 앰플 상자가 무사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죽 코트 안쪽 품속에는 피가 묻은 설지평 박사의 비밀 연구 일지 사본이 묵직한 감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쿠우우웅…….


발전소의 심장부였던 중앙 노심 코어가 정지하면서 요새 전체를 지탱하던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비명을 지르며 멈추어 섰다. 주황색 플라즈마 빛이 완전히 소멸한 발전소 내부에는 오직 어둠과 뼈를 깎는 혹한만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 정지는 단순히 13구역 발전소만의 종말로 끝나지 않았다.


태오가 장호열을 소멸시키고 노심의 에너지를 동결 정지시킨 행위는, 제국의 촘촘한 에너지 공급망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13구역 발전소는 아르카디아 연합 제국의 하부 동력 그리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절대영도의 공허가 공급망을 타고 역류하면서, 저 멀리 거대 온실막 너머에 존재하는 상류층의 도시, 아르카디아 돔 내부의 고위층 구역 전력망까지 연쇄 과부하로 인해 일시적으로 명멸하기 시작했다.


지배자들이 독점하던 온화한 세계에 최초로 차가운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태오의 사소한 생존 투쟁이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나비효과의 도화선이 된 순간이었다.


태오는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발전소 요새를 빠져나왔.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바닥의 눈더미가 푸른 서리로 얼어붙으며 서늘한 자국을 남겼.


발전소 마당으로 나서자, 눈보라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13구역 난민 조합원들이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한소희 대표를 필두로 한 수백 명의 난민들이 횃불을 든 채 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호열의 동결 청소 음모와 액체 질소의 공포 속에서 떨던 그들은, 발전소의 불빛이 꺼지고 독재자가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보안관이…… 죽었다.”


누군가의 나직한 외침이 정적을 깨뜨렸다.


“우리가 살았어! 장호열이 사라졌다고!”


광장은 순식간에 뜨거운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았고, 온기 전지를 나누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들은 태오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그를 슬럼가의 ‘차가운 구원자’이자 ‘서리의 신’으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뜨거웠고, 그들이 내뿜는 호흡은 온정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가로지르는 태오의 마음은 지독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람들의 뜨거운 기쁨과 뜨거운 눈물이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가슴속 엔트로피의 핵이 깨어나면서, 인간으로서 타인의 감정에 공명하던 마음의 회로가 냉기 속에 얼어붙은 것 같았다. 태오는 난민들의 환호를 뒤로한 채, 오직 하나의 목적지만을 바라보며 유령처럼 묵묵히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동결 위기에 처한 여동생 아린을 살려야 한다는 집념만이 그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지하 박선우의 무면허 진료소에 도착한 태오는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섰.


진료소 내부 역시 발전소 정지의 여파로 비상 전력마저 끊겨 가고 있었다. 온열 격리실의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며 삐이이- 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린의 척추에 이식된 안티-프리즈-04 장치가 방전 직전의 한계에 도달해 역류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태오 씨! 드디어 왔군요!”


김윤아 간호사가 초조하게 소리쳤고, 박선우 의사는 수제 동결 세포 치료기를 점검하며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아린의 창백한 이마 위로 하얀 서리가 빠르게 내려앉고 있었다. 아린의 숨결은 가늘었고, 그녀의 생명 온도는 소수점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태오는 망설임 없이 가방에서 안티-프리즈-04 안정제 원액 앰플을 꺼냈다. 주사기에 투명한 푸른빛 액체를 가득 채운 태오는,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아린의 척추 장치 슬롯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치이이이익—


안정제 원액이 장치 내부로 흘러 들어가자, 날카롭던 비명음이 잦아들며 둔탁한 기계 가동음으로 변했다. 점멸하던 붉은 표시등이 마침내 밝고 따뜻한 녹색 완충 신호로 고정되었다. 아린의 척추 신경으로 미세한 온열이 주입되자, 그녀의 이마에 맺혔던 서리가 눈물처럼 녹아내리며 가쁜 호흡이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최소 수개월은 배터리 폭주 없이 버틸 수 있는 완벽한 가동 상태였다.


“……오빠?”


아린이 가늘게 눈을 뜨며 희미한 목소리로 태오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침대 곁에 서 있는 태오를 보며, 안심했다는 듯 가녀린 손을 뻗어 태오의 뺨을 만지려 했다.


태오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아린의 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뺨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태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생의 부드러운 살결도,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져야 할 따뜻한 체온도, 격리실 내부의 온기조차 전혀 인지할 수 없었다. 마치 두꺼운 강철 장벽 너머로 남의 살을 만지는 것처럼, 완벽한 무감각이 그의 왼손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른팔뿐만 아니라 온전하다고 믿었던 왼손과 온몸의 촉각 신경망이 절대영도의 권능을 시전한 대가로 얼어붙어 마비된 것이었다.


태오는 다급하게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려보았지만, 쇠 비린내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미각마저 완전히 소실된 상태였다.


오직 아린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신격의 봉인을 해제한 결과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들의 상실이라는 처절한 파멸의 시작이었다. 자신이 구한 동생의 따뜻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간다는 잔혹한 진실이 태오의 심장을 무겁게 조여왔.


태오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심리적 단절감 속에서, 어머니의 차가운 펜던트를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으로 아린과의 약속을 되새기며, 자신이 왜 괴물이 아닌 인간이어야 하는지 약속의 이행 감각 각인 수칙을 뇌리에 뼈저리게 각인시켰. 미세한 냉기 억제 파동이 가슴속에서 퍼져나가며 심장의 폭주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비켜봐, 태오.”


박선우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태오의 투명하게 변해버린 오른팔을 잡았다. 그는 수제 동결 세포 치료기를 가동해 보았지만, 치료기의 모니터에는 오류 메시지만이 반복해서 떴다.


“세포가 죽은 게 아니야. 신경망 자체가 유리화되어 버렸어. 이건 일반적인 의학 기술로는 손을 댈 수가 없다.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부작용이야.”


박선우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치료 불가능하다는 선언이었다.


그때, 격리실의 문이 열리며 은서윤이 단말기를 든 채 급히 들어섰다. 그녀는 태오의 어깨뼈와 목덜미까지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얼음 결정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태오 씨…… 팔 상태가 왜 이래요? 장호열과 싸우면서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서윤은 서둘러 자신의 스캐너를 가동해 태오의 심장 파동을 정밀 스캔했다. 스캐너의 홀로그램 모니터 위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기하학적인 엔트로피 그래프 파형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심장 속 엔트로피의 핵이 완전히 깨어났어요. 이 냉기 파동이 태오 씨의 전신 신경망을 실시간으로 얼려가고 있어요. 이대로 두면 몇 달 안에 전신이 완벽하게 결정화되어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사망할 거예요.”


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오를 살리기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였다.


“방법이 없을 리가 없어.”


태오는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품속에서 이 박사의 실험실에서 훔쳐낸 피 묻은 설지평 박사의 비밀 연구 일지 마이크로칩을 꺼내 서윤에게 건넸다.


“아버지가 남긴 기록이다. 여기에 내 심장을 안정시킬 단서가 있을 거다.”


서윤은 침을 삼키며 마이크로칩을 자신의 휴대용 단말기에 꽂았다. 단말기가 지이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작동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제어실 벽면에 푸른 반투명 홀로그램 화면을 투사했다.


수많은 수식과 복잡한 기후 역학 도면들이 허공에 어지럽게 펼쳐졌다. 서윤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폭풍처럼 두드리며 손상된 데이터 코드들을 하나씩 복구해 나갔. 마침내 화면 중앙에 붉은색으로 강조된 정밀한 3차원 지도와 좌표가 떠올랐다.


그곳은 13구역이 아니었다.


거대한 유리 반구로 덮여 사계절이 통제되는 화려한 디스토피아, 아르카디아 돔의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국 비밀 연구소였다.


“해독 완료했어요…….”


서윤이 홀로그램 지도를 가리키며 태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지평 박사님은 이미 태오 씨의 심장 폭주를 예견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그 결정화를 멈추고 엔트로피의 핵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 ‘엔트로피의 핵 스태빌라이저’를 아르카디아 돔 지하에 숨겨두셨어요. 태오 씨가 살기 위해서는…… 저 돔 내부로 들어가야만 해요.”


태오는 홀로그램 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자신의 투명한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감각이 사라진 차가운 팔, 미각과 촉각을 잃어가는 가혹한 대가. 하지만 아린에게 진짜 따뜻한 봄날을 선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태오는 왼손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 쥐었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푸른 빙정 문양이 서늘하게 회전했다. 적들의 심장부인 아르카디아 돔으로 향하는, 더 가혹한 생존 투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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