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페르노의 군주
“콜록, 쿨럭……!”
지하 연구소의 무너진 잔해 사이로 검붉은 얼음 조각이 섞인 피가 쏟아졌다. 시멘트 바닥에 닿은 핏방울들은 찰나의 순간에 얼어붙어 툭툭 소리를 내며 굴렀다. 설태오는 왼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팍 가죽 코트 틈새로 보이는 청색 빙정 문양은 이미 불길한 검붉은 빛으로 오염되어 기분 나쁘게 명멸하고 있었다.
오른팔은 이미 손가락 끝부터 어깨죽지, 그리고 목덜미 부근까지 투명한 유리 결정으로 뒤덮여 완벽하게 마비된 상태였다. 감각이 사라진 오른팔은 그저 죽은 고목나무 가지처럼 옆구리에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리하게 ‘절대영도의 정적’을 시전한 대가는 뼈아팠다. 심장을 묶고 있던 제국의 억제 장치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유발하며 척수를 타고 냉기를 역류시키고 있었다.
“태오 씨! 제발 그만해요! 그 몸으로 위로 올라갔다간 정말로 심장이 터져 죽을 거예요!”
은서윤이 태오의 찢어진 코트 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태오의 초월적인 힘에 대한 경외감보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동료를 향한 극도의 공포와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절대영도의 고치 속에서 안전하게 동결 보존된 요한 신부와 구출된 난민들이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서윤.”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른 동공 깊은 곳에서 정교하게 대칭을 이룬 빙정 문양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고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각과 촉각이 마비되어 갈수록, 인간으로서의 정서마저 서서히 동결되어 가는 전조였다.
“이들을 데리고 박선우의 진료소로 가라. 아린이의 곁을 지켜.”
“하지만 장호열은……!”
“그놈은 내가 끝낸다.”
태오는 왼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흡열 탄소강 대검을 굳게 쥐었다. 대검의 묵직한 무게감이 왼손바닥을 타고 전해졌지만, 오른팔의 마비 탓에 몸의 균형을 잡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러나 물러설 길은 없었다. 장호열을 죽이고 그의 발전 코어를 강탈하지 못하면, 아린이를 살릴 안정제 원액을 쥐고도 슬럼가 전체의 동결 청소를 막을 수 없었다.
태오는 은서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발전소 최상층으로 향하는 강철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절뚝거리는 그의 발걸음 뒤로 하얀 서리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은서윤은 입술을 깨물며 요한 신부와 난민들을 부축해 지하 비밀 통로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단 한 사람과의 생사결뿐이었다.
* * *
나선형 철제 계단을 오를수록 주변의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영하 80도의 가혹한 슬럼가 겨울에 익숙해진 육체에게, 그리고 심장에 엔트로피의 핵을 품은 태오에게 이 온기는 축복이 아닌 지독한 독약이었다. 영상 20도, 30도, 그리고 40도에 육박하는 고온의 열기가 숨통을 조여왔다. 대기 중에 가득한 열 에너지가 태오의 차가운 피부에 닿자마자 미세한 수증기로 기화되며 살가죽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유발했다.
가슴속 검붉게 오염된 빙정 문양이 뜨거운 열기를 감지하고 미친 듯이 박동했다. 주변의 열을 강제로 빨아들이려는 심장의 본능과, 이를 억누르려는 체내의 마비된 신경망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차갑게 식혀라. 흐름을 가두어라.’
태오는 입술을 깨물며 민우진 스승에게 배웠던 ‘열 보존 호흡법’을 전개했다.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뜨거운 공기를 심장 근처에서 억누르고, 체내의 최소 생명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혈류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늦췄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오한이 동시에 찾아왔지만, 태오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가슴 안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차가운 펜던트를 왼손 끝으로 지긋이 눌렀다. 미세하게 퍼지는 서늘한 안정이 폭주하려던 심장의 고동을 간신히 붙잡아주었다.
마침내 나선형 계단의 끝, 발전소 최상층의 노심 제어실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주황색 불빛이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며 대기를 왜곡하고 있었다. 태오는 왼손으로 대검을 굳게 쥐고, 어깨로 무거운 철문을 밀어젖혔.
쿠우우웅-
철문이 열리는 순간,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열풍이 태오의 안면을 때렸다.
제어실 내부는 거대한 용광로의 심장부와 같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유리 원통형 노심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내부에는 끓어오르는 붉은색 플라즈마 에너지가 가득 차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방으로 얽힌 황동 파이프와 압력 밸브들 사이로 고압의 스팀이 뿜어져 나와 제어실 전체를 주황빛 안개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치는 열기의 중심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붉은색 모피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얼굴 전체에 흉포한 화상 흉터가 가득한 사내. 13구역의 절대 지배자이자 보안관인 장호열이었다. 그의 등 뒤에는 화염 방사기를 개조한 거대한 중화기 ‘인페르노’가 금속 사슬에 묶인 채 장착되어 있었고, 가스 노즐 끝에서는 주황색 예비 불꽃이 쉭쉭 소리를 내며 일렁이고 있었다.
“결국 쥐새끼처럼 기어 올라왔구나, 설태오.”
장호열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흉포한 눈빛이 태오의 마비된 오른팔과 찢어진 코트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검붉은 문양을 훑었다.
“이 박사의 연구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더군. 요한 그 늙은 고철덩어리를 구하겠다고 네 그 알량한 심장의 봉인을 강제로 뜯어발기다니. 정말 눈물겨운 우정이야.”
태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에 쥔 대검 끝을 비스듬히 바닥으로 내린 채, 개조형 열원 추적 안경의 다이얼을 미세하게 조절할 뿐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장호열의 전신은 시뻘건 용암처럼 타오르는 에너지 덩어리였다. 특히 그의 등에 장착된 ‘인페르노’의 압축 연료 탱크는 폭발 직전의 소형 태양처럼 진홍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설태오.”
장호열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강철판이 붉게 달아오르며 열풍을 피워 올렸다.
“너는 네 가슴에 새겨진 그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더군. 네 아비 설지평이 너를 살리기 위해 그 핵을 심장에 박았다고 생각했겠지? 어리석은 놈.”
장호열이 광기 어린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 푸른 빙정 문양은 제국 황실의 극비 기후 프로젝트, ‘헬리오스(Helios)’의 마스터 가동 코드다! 전 지구의 온기를 영원히 통제하고 수확할 수 있는 신의 열쇠란 말이다! 네 아비는 그 열쇠를 훔쳐 도망친 대역죄인이고, 너는 그 죄인의 피를 이어받은 가엾은 실험체에 불과해.”
태오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부친 설지평 박사가 남긴 일지 사본의 내용이 장호열의 대사와 겹쳐지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진실의 파편이 맞춰지는 충격이 밀려왔다.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와 자신의 육체가 황실의 실험체였다는 가혹한 사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황제 폐하께서는 수백 년 동안 이 대동결의 세계를 다스리며 완벽한 통제를 원하셨다. 그리고 네 심장에 박힌 그 ‘엔트로피의 핵’이야말로 폐하의 마지막 불꽃을 완성할 궁극의 제물이지. 내가 오늘 네 목을 잘라 그 핵을 황실에 바치는 순간, 나는 이 지옥 같은 13구역을 벗어나 아르카디아 돔의 최고 귀족으로 올라서게 될 것이다!”
장호열이 거대한 인페르노의 노즐을 들어 올렸다. 쇠사슬이 찰랑이는 소리와 함께, 1,500도에 달하는 압축 가스의 가열음이 제어실 전체를 찢어발길 듯 울려 퍼졌다.
“낙오자 주제에 감히 신의 열쇠를 품고 살아가려 했다니. 이제 네 동생 설아린과 함께 차가운 재가 되어 사라져라!”
태오는 마음속의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왼손에 쥔 대검 끝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대검 끝이 강철 바닥에 박히는 순간, 미세한 청색 서리 고리가 원형으로 퍼져나가며 장호열이 디디고 있던 바닥의 열기를 아주 미세하게 빨아들였다. 태오는 제어실 내부의 열량 분포와 기류의 흐름을 정밀하게 계산했다. 상대는 100kW급의 화염 능력을 지닌 강자였고, 이 방은 온통 적의 무한한 에너지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었다. 적이 방출하는 열기를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냉기 에너지를 급속 충전할 타이밍을 노려야 했다.
“내 동생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태오의 목소리가 절대영도의 정적처럼 제어실의 열기를 뚫고 서늘하게 울렸다.
장호열은 광기 어린 폭소를 터뜨리며 인페르노의 트리거를 힘껏 당겼다.
“죽어라, 설태오-!”
콰아아아아아아-!
인페르노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어실 내부의 산소와 플라즈마 에너지를 한꺼번에 연소시키며 팽창하는, 1,500도가 넘는 거대한 주황빛 화염 폭풍이었다. 거대한 불꽃의 해일이 제어실 전체를 집어삼키며, 단신으로 서 있는 태오의 가녀린 체구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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