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소의 장벽
영하 80도의 눈보라는 인간의 영혼마저 얼려버릴 기세로 몰아치고 있었다. 허공을 거칠게 찢는 칼바람을 뚫고, 설태오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겹겹이 껴입은 낡은 방한 코트의 깃을 바짝 세웠지만, 가슴팍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까지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그 푸른 광채는 심장 깊은 곳에 봉인된 우주적 엔트로피의 핵이 박동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동시에 그의 목숨을 갉아먹는 저주였다. 능력을 쓸 때마다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동결의 페널티. 이미 그의 오른팔은 어깨 부근까지 완벽하게 투명한 유리 결정으로 변해 있었다. 감각도, 온기도 사라진 채 단단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 팔은 낡은 코트 소매 안에서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태오는 왼손으로 탄소강 대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오른팔을 쓸 수 없으니 오직 왼손 하나로 장호열의 목을 베어야 했다.
‘기다려라, 아린아.’
머릿속으로 박선우의 지하 진료소 온열실에 홀로 누워 있을 여동생 설아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전개해 두고 온 ‘절대영도 고치’가 아린의 체온을 단열 보존해 주고 있겠지만, 그 한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발전소를 함락하고 장호열의 고출력 화염 코어를 빼앗아 오지 못하면 아린은 그대로 동사할 것이다. 그 사실이 태오의 식어가는 심장을 분노로 붉게 불태웠다.
“태오 씨,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돼요. 제국 순찰대의 열 감지 레이더 주기가 빨라지고 있어요.”
눈보라 장막을 뚫고 날렵한 체구의 여성이 태오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르카디아 돔 출신의 천재 공학자, 은서윤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에 기계식 확대 렌즈를 착용한 고글을 쓴 채,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달린 공구 벨트를 다잡았다. 서윤의 손에는 오덕구가 정밀 개조해 준 ‘제국 보안 주파수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그들 뒤편의 어둠 속에서는 굳건한 풍채의 사내, 임찬영이 고철 수거단원들을 이끌고 숨을 죽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거대한 철제 해머를 어깨에 멘 임찬영이 낮게 읊조렸다.
“태오, 우리 수거단 녀석들이 발전소 외곽의 퇴로를 확보해 두었네. 하지만 장벽을 넘지 못하면 전부 개죽음이야. 보안관실 놈들이 오늘 밤 13구역을 완전히 쓸어버리려고 작정했어.”
태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앞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거대 괴수의 성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13구역 인공 열원 발전소. 슬럼가의 미약한 생명줄인 열 배급권을 독점하고 난민들을 착취하는 장호열의 철옹성이었다. 장벽 표면에는 삼중 전자기 방어막이 흐르고 있어,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눈바람 속에서 기괴하게 튀고 있었다.
“행동을 개시한다. 영하 80도 행동 수칙을 준수해.”
태오의 묵직한 목소리에 서윤과 찬영이 일제히 몸을 낮췄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금속 장비를 맨손으로 만지지 않고, 호흡을 최소화하여 입김으로 인한 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슬럼가의 생존 공식. 그들은 완벽한 유령처럼 소리 없이 장벽 밑으로 기어갔다.
위이이잉-
장벽 상공에서 서치라이트를 번뜩이며 정찰 드론 두 기가 다가왔다. 눈보라를 뚫고 붉은색 탐지 광선이 지면을 훑으려던 찰나, 은서윤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제국 보안 주파수 무전기의 다이얼을 정밀하게 조율하더니 강제 신호 발신 버튼을 눌렀.
“드론 전파 주파수 동기화 완료. 먹어라, 제국산 바이러스.”
서윤의 손가락이 단말기를 두드리자, 정찰 드론 두 기가 허공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드론의 서치라이트가 깜빡이더니 이내 가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고정되었다. 일시적인 시스템 마비였다.
“지금이에요! 15초 뒤면 백업 시스템이 돌아가요!”
서윤의 신호와 동시에 태오는 눈을 부릅떴. 그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의 푸른색으로 빛나며 고유 능력인 ‘열량 감지’가 활성화되었다.
태오의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불어 닥치는 하얀 눈보라는 어두운 회색조로 다운톤되었고, 장벽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전자기 방어막의 고열 흐름이 선명한 진홍색 격자무늬로 스캔되었다. 장벽 표면에 흐르는 수만 볼트의 전류가 만들어내는 열의 흐름. 그 이면에는 미세하게 온도가 낮은 푸른색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를 따라와라. 오른쪽으로 세 걸음, 거기서 대각선으로 도약한다.”
태오는 왼손으로 대검을 쥔 채, 몸을 날려 장벽의 열 센서 사각지대를 정확히 짚고 올라섰다. 서윤과 찬영의 수거단원들이 그의 움직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왔다.
하지만 제국의 방어 체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은서윤이 장벽에 설치된 자동 포탑의 메인 전원선을 끊기 위해 환기구 해치를 열고 공구를 들이밀었을 때였다. 찌르르릉- 하는 기분 나쁜 기계음과 함께 해치 안쪽의 비상 적색등이 켜졌다.
“앗! 삼중 백업 전력망이 작동했어요! 전원 차단 신호가 중앙 제어실로 가버렸어요!”
서윤이 경악하며 외쳤다. 설상가상으로 임찬영이 쥐고 있던 수거단 전용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날카로운 주파수 소음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
- 치지직! ……침입자 발생! 외곽 4구역 대피선 차단! 경비대 전원 무장…… 치직!
“젠장, 무전 주파수가 감지당했다! 퇴로가 막히고 있어!”
임찬영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해머를 고쳐 쥐었다.
그 순간, 장벽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묵직하고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눈밭을 짓밟으며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바닥의 눈이 녹아내려 끓는 물이 되는 소리가 들렸다.
스으으으-
바람을 타고 숨이 막힐 듯한 고열의 아지랑이가 밀려왔다. 영하 80도의 눈보라조차 그 열기 앞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되어 기화해 버렸다.
“쥐새끼들이 기어코 발전소 장벽까지 기어 올라왔군.”
어둠을 뚫고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을 중장갑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 제국 안전국 중장갑 진압 분대장 우 상병이었다. 그의 뒤로는 붉은 방한 슈트를 입고 체내 열량 증폭 코어를 주황색으로 빛내고 있는 정예 경비대 상사들이 삼중 진압 진형을 갖추고 늘어섰다.
우 상병의 왼팔에는 그의 신장보다도 거대한 강철 방패가 장착되어 있었다.
‘초고온 열 차단 방패(Aegis-T).’
우 상병이 방패 손잡이의 스위치를 누르자, 방패 전면의 슬릿에서 붉은색 플라즈마 열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패 표면의 온도가 800도 이상으로 치솟으며, 주변의 공기가 중력 왜곡이라도 일어난 듯 일렁였다.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살가죽이 기화될 것 같은 살인적인 초고열 배리어였다.
우 상병이 은색 의안을 번뜩이며 태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놈이 장호열 보안관님이 찾으시던 ‘열량 강탈자’ 설태오냐? 네놈이 흘린 그 기분 나쁜 냉기 흔적이 탐지기에 아주 똑똑히 걸렸다.”
태오의 심장에 새겨진 엔트로피의 핵이 우 상병의 고열 방패를 감지하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열을 강탈하려는 공허의 갈망이 가슴팍을 찢어발기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태오는 왼손으로 대검을 고쳐 쥐며 우 상병의 고열 방패를 응시했다.
‘방패에서 방출되는 열기가 너무 강하다. 물리적인 칼날로는 접근하기도 전에 대검이 녹아내릴 터.’
하지만 태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적의 무기가 품은 800도의 초고온. 그것은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자, 동시에 스스로 냉기를 창조해낼 수 없는 자신이 심장의 힘을 폭발시킬 수 있는 최고의 ‘열원’이었다.
우 상병이 방패를 전면으로 내세우며 묵직한 발걸음으로 돌격을 시작했다.
“삼중 진형 전개! 낙오자 놈들을 전부 태워 죽여라!”
엄청난 열풍이 눈보라를 찢으며 태오의 안면을 향해 덮쳐왔다. 숨이 턱 막히는 고열의 압박 속에서, 태오는 피하지 않고 대검의 칼날을 비스듬히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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