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선
내가 살기 위해 목숨을 공유한 적장의 심장 속에, 언제든 황제의 손가락 하나로 터져버릴 시한폭탄이 심겨 있었다는 잔혹한 진실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깨진 액정 화면 위로 푸르게 명멸하는 홀로그램 설계도는 가혹할 정도로 선명했다. 제국 대장군 레이븐의 심장 박동 주기, 그 혈관의 가장 깊은 틈새에 나노 단위로 얽혀 있는 검은 기계 장치. 그것은 황제 발타자르의 마스터 키와 연동된 원격 자폭 칩이었다.
“……이것이 네놈의 심장 속에 박힌 진짜 족쇄였군.”
나는 붉게 타오르는 단말기 화면을 응시하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오른손 손바닥은 이미 섀도우-B의 기습을 피하며 구속구를 뜯어발기느라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어 감각이 없었다. 제복 소매를 찢어 겨우 가슴팍에 묶어둔 오른팔은 죽은 나무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동조 2단계의 통각 역전으로 인해, 레이븐이 스스로 왼손바닥을 베어내며 겪었던 깊은 자창의 고통이 내 왼손으로 고스란히 흘러들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내 왼손끝이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욱신거리며 피어오르는 전자기적 통증에 미세하게 떨렸다.
내 뒤에 서 있던 레이븐이 피 묻은 초전도 진동 단검을 거두며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배수 통로의 녹슨 파이프 위로 뚝뚝 떨어졌다.
“황제가 내 심장을 쥐고 있다는 걸, 기어이 확인했군, 사막의 쥐새끼.”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만하고 차가웠지만, 동조기를 통해 전송되는 그의 내면은 지독하리만치 시린 고독과 억눌린 분노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제국을 위해 평생을 전쟁 병기로 살아왔으나, 가문과 황실은 그를 언제든 터뜨려 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네놈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나는 단말기를 왼손으로 움켜쥐며 그를 돌아보았다. “원수를 죽이기 위해 내 목숨을 던질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황제의 장난감 노릇을 하다가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없다, 레이븐.”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살려두어야 하지.” 레이븐이 내 앞으로 다가와 붕대를 감은 왼손으로 내 턱을 거칠게 치켜올렸다. “내가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벨리알이 내 이상 수치를 황실에 전송하는 순간 내 심장은 터진다. 그리고 내 심장이 정지하면 네 가슴속 동조기 역시 네 심장을 멈추겠지.”
그의 푸른 눈동자 너머로 불타는 듯한 복수심과 생존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읽혔다.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는 원수였으나, 이제는 황실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대항해 서로의 목숨을 사수해야 하는 가장 모순적인 공생 관계가 된 것이다.
바로 그때, 내 귓가에 심겨진 무전기에서 지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아 누나! 큰일 났어! 벨리알 감찰관이 섀도우-B의 신호가 끊긴 걸 감지했어! 그자가 레이븐 대장군의 생체 데이터 이상 징후 보고서를 황실 의회에 암호화해서 송신하기 시작했어! 정밀 검열단과 황실 친위대를 기함으로 즉각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어!]
상황은 1초가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섀도우-B를 처단해 가문으로의 데이터 유출은 막았으나, 벨리알의 음험한 감시망까지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벨리알은 이미 레이븐과 나의 기묘한 연동을 확신하고 정면으로 그를 파멸시키기 위한 사법적 칼날을 빼 들었다.
“가문의 지원을 받아 벨리알의 보고서를 무마시킬 수는 없나?” 내가 찌푸린 얼굴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가주는 이미 섀도우-B의 실종을 감지했다.” 레이븐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가문은 내가 실패하기를 바란다. 이복 누이 엘리사가 벨리알과 손을 잡았으니, 가문의 로비 자금은 이제 내 목을 죄는 밧줄이 될 뿐이다.”
가문마저 그를 버렸다. 이제 기함 블랙 레비아탄 내부에서 우리를 지켜줄 물리적, 정치적 방패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실 친위대가 이 기함에 승선하는 순간, 나와 피난민들은 물론이고 레이븐 역시 반역죄로 기소되어 즉결 처형되거나 실험실의 해부대로 압송될 터였다.
“정면 대결은 파멸이다.” 나는 왼손으로 목덜미를 감싸고 있는 차가운 금속성 질감의 전자기 차폐 차단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친위 요원들이 기함에 승선해 정밀 스캔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빠져나갈 우회로를 만들어야 해.”
레이븐이 내 목덜미의 목걸이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주머니에서 소형 홀로그램 단말기를 꺼내 내 차단 목걸이의 수동 제어 주파수 코드를 전송했다.
“목걸이의 수동 제어권을 넘기지.” 레이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제부터 네 가슴속 동조기의 주파수 감쇄율은 네 스스로 조율해라. 벨리알의 감시 스캐너가 다가올 때 주파수를 극도로 낮춰 생체 반응을 위장해야 한다.”
단말기 화면에 목걸이의 미세 다이얼 제어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며, 나는 그가 나에게 보여준 뜻밖의 전술적 양보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비록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강제적인 공조였으나, 적장 레이븐이 나를 단순한 포로가 아닌 하나의 전술적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지호야, 기함 하부의 화물 수송로 탈출 좌표를 확보해 줘.” 나는 왼손으로 제어반을 조작하며 무전기로 지시했다.
[알았어, 누나! 기함의 중앙 컴퓨터 방화벽을 우회해서 하부 격벽을 수동으로 개방할 수 있는 좌표를 찾고 있어. 하지만 황실 성계의 감시 위성망이 너무 촘촘해서, 기함이 도약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각 탈출을 실행하는 건 불가능해. 일단 탈출로를 설계해 두고 타이밍을 봐야 해!]
지호의 말대로였다. 기함 내부에서의 비밀 공조와 탈출 경로는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우주로 나가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제국의 심장부인 테라-아우렐리아 성계의 압도적인 군사력이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황실 친위대가 기함에 승선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기함 하부의 화물 격벽을 물리적으로 개방해 우회 탈출하는 지능적인 게릴라식 퇴로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웅웅웅—.
기함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음이 배수 통로의 파이프라인을 타고 흘렀다. 초광속 도약이 해제되는 신호였다.
[초광속 도약 해제. 테라-아우렐리아 주성계 진입 10초 전.]
기계적인 여성의 안내 방송이 기함 내부의 모든 천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레이븐과 함께 사령실 격벽 뒤의 관측창 앞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광경은 기괴할 정도로 웅장하고 찬란했다.
암흑의 우주 한가운데, 제국의 심장인 황실 주성 ‘테라-아우렐리아’가 그 찬란한 백은색 빛을 내뿜으며 자전하고 있었다. 행성의 지표면은 고도로 발달한 나노 기계 문명의 금속성 도시들로 가득 차 있었고, 행성의 궤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인공 고리—아우렐리아 게이트가 스스로 빛을 발하며 거대한 중력 왜곡 장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막 행성 카이로스의 황량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은하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의 압도적인 권력의 상징이었다.
쿵—!
기함이 아우렐리아 성계의 거대 인공 고리 중력장 진입을 시작하는 순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격렬한 파동이 일어났다.
“으윽……!”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격벽을 짚었다. 가슴팍 피부 밑에 이식된 고대 양자 생명 동조기가 황실 행성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대한 나노 네트워크 신호와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은청색 성운 모양의 낙인이 미친 듯이 발광하며 내 쇄골과 목덜미를 따라 기하학적인 아르케 회로 패턴을 붉고 푸르게 점멸시켰다.
타는 듯한 열기가 전신 신경망을 타고 흐르며 뇌하수체를 사정없이 찔렀다. 머릿속에서 고대 아르케 선구자들의 주파수 파동이 기이한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이 공명은 대체…… 왜 동조기가 황실 행성과 반응하는 거지?’
내가 아르케의 혈통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인과의 이끌림인가, 아니면 황제가 준비 중인 은하 정화 장치가 동조기의 에너지를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인가.
“민설아! 정신 차려라!”
레이븐이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동조기를 통해 전송되는 격렬한 양자 공명의 고통은 그의 심장 나노 코어 역시 붉게 물들이며 그를 동시에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심장박동이 아우렐리아의 인공 고리가 방출하는 중력 주파수에 맞춰 위험하게 동기화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사령실의 메인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붉은색 비상 경보등이 켜졌다.
[경고. 황실 직속 친위 수송선 3척이 기함 블랙 레비아탄의 제4도킹 베이에 접안을 시작했습니다. 황실 감찰관 벨리알의 명령에 따른 무장 친위 요원들의 강제 승선 프로토콜이 가동됩니다.]
가슴을 죄어오는 타는 듯한 공명 속에서, 나는 도킹 베이 너머로 제국의 백은색 철갑을 두른 황실 친위 요원들이 살기 어린 무기를 쥔 채 기함 내부로 들이닥치기 시작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감지했다.
보이지 않는 사선의 끝, 절체절명의 파국이 우리를 향해 그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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