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보이는 적장
어둠이 지배하는 고대 아르케의 제단은 기묘하리만치 고요했다. 지상에서 대지를 찢어발기던 제국군의 플라즈마 포격 소리도, 귓가를 찌르던 무인 드론들의 금속성 소음도 이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오직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석조 기둥들 사이로 스며드는 미세한 오존 냄새와, 제단 중심부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은청색 광채만이 공간의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으…… 윽!”
민설아는 가슴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무게감에 신음을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기적이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우측 어깨가 플라즈마 화상으로 타들어 가던 빈사 상태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더듬었다. 찢겨 나갔던 가죽 슈트의 틈새로 만져지는 살결은 매끄러웠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는 가벼운 열감과 함께 은빛의 미세한 흉터만이 가느다란 실선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슴팍 정중앙, 쇄골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고동 때문이었다.
쿵. 쿵. 쿵.
그것은 분명 그녀 자신의 심장박동이었다. 그러나 그 박동의 이면에서, 기계적으로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울리는 또 다른 박동이 느껴졌다.
쿵— 쿵— 쿵—.
느리고, 무겁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박동. 마치 타인의 심장이 그녀의 가슴뼈 바로 아래에 함께 이식된 것 같은 감각이었다. 설아는 본능적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얇은 슈트 너머로 손끝에 닿은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그곳에는 기하학적인 곡선과 직선이 복잡하게 얽힌 은청색과 붉은색의 양자 회로 낙인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맥박에 맞춰 기이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혼란을 수습하려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지잉—!
머릿속을 날카롭게 관통하는 이명과 함께 시야가 강제로 뒤틀렸다. 어둠 대신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제단의 석조 벽면이 아니었다.
차가운 금속성 질감의 은빛 격벽, 홀로그램 스크린들이 허공을 수놓은 거대하고 sterile한 공간. 제국 제3함대의 정예 장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중심, 사령관의 강철 왕좌에 서서 분노를 터뜨리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생체 신호의 이상 주파수 원인을 즉각 규명해라! 기함 내부의 나노 방화벽이 해킹당한 흔적도 없는데, 내 심장 코어가 순간적으로 정지할 뻔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제국 대장군, 레이븐의 목소리였다.
그가 분노에 찬 어조로 부관들에게 소리칠 때마다, 설아의 뇌 신경망을 타고 그의 분노와 짜증, 그리고 알 수 없는 심장 부근의 압박감이 실시간으로 역류해 들어왔. 레이븐이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 설아 역시 숨이 턱 막히며 제단 바닥을 짚었다.
“하아, 하아……!”
설아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시야가 다시 어두운 고대 제단으로 돌아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뺨의 흉터를 타고 고였다.
원수의 눈과 오감이 자신의 뇌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그의 시야가, 그의 목소리가, 심지어 그의 감정 상태까지 해일처럼 밀려들어 정신을 오염시켰다. 증오하는 원수와 목숨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현실에 설아의 이성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았다. 복수해야 할 적을 살려두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저주라니.
띡, 삑—.
그때, 허공에서 가벼운 전자기음이 울렸다.
먼지구덩이 속에서 나타난 것은 축구공 크기만 한 녹슬고 때 묻은 소형 부유 로봇이었다. 로봇의 깨진 렌즈에서 푸른 불빛이 깜빡이며 설아의 전신을 스캔했다.
[아르케…… 혈통 코드 확인. 계승자의 생체 안정성 42% 수준으로 저하. 신경망 양자 오염 감지.]
기계적인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고대 유적의 보안 AI, ‘지키미-7’이었다. 지키미-7은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며 설아의 주위를 맴돌았다.
[경고. 제단 상부 구역에 제국 진압군의 무인 수색대 진입 중. 생체 반응 추적기 ‘스카우트-X’의 신호 감지. 탈출 경로를 탐색합니다.]
“제국군이……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설아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 했으나, 동조기가 가슴을 조여오는 부작용 때문에 다리가 풀려 다시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레이븐의 심장박동 주파수가 그녀의 뇌 신경을 간섭하며 극심한 두통을 유발하고 있었다.
[계승자여, 신경 오염을 억제해야 합니다. 고대 선구자들의 ‘양자 호흡 제어법’을 활성화하십시오. 호흡을 맞추어 뇌파를 고정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지키미-7의 조언에 설아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과거 어머니 한지원의 연구 일지에서 보았던 구절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3초간 멈추어 가슴의 양자 흐름을 붙잡아라. 그리고 뇌파의 주파수를 외부의 파동과 평행하게 유지해라.’
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팍의 은청색 낙인이 박동하는 주기에 맞춰 호흡의 속도를 늦추었다. 서서히 뇌리를 지배하던 극심한 두통이 옅어지며 가슴의 통증이 진정되었다. 동조기의 발광이 차분한 보랏빛으로 가라앉았다.
“지키미-7, 적들의 정확한 위치는?”
[상부 통로에서 수색 요원 5명 진입 중. 적들은 생체 반응 추적기를 사용하여 제단의 미세한 열 신호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모래바람’ 저격소총을 움켜쥐었다. 비개조 순수 인류의 신체적 한계와 우측 어깨의 화상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정면 대결은 자살행위였다. 게다가 상대는 제국의 최정예 장비를 갖춘 수색대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적들에게 없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방금 전 그녀의 뇌를 지옥으로 몰고 갔던 바로 그 저주, ‘감각 공유’였다.
“눈을 감으면…… 놈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설아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극심한 혼란을 이성으로 통제하며, 레이븐의 뇌파 주파수에 자신의 의식을 강제로 동조시켰.
‘양자 감각 전이: 시각 가로채기.’
순간, 시야가 뒤틀리며 다시 궤도 기함 블랙 레비아탄의 사령실 화면이 펼쳐졌다. 레이븐은 전방 홀로그램 스크린을 통해 사막 지상 수색대원들의 헬멧 카메라 피드를 실시간으로 전송받고 있었다.
설아는 레이븐의 눈을 빌려, 제단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제국군 수색대원 5명의 위치와 사각지대를 완벽하게 내려다보았다. 놈들의 중장갑 슈트 이음새, 총구를 겨누는 각도,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생체 반응 추적기 ‘스카우트-X’의 화면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지키미-7, 지금이야. 3번 통로의 방어벽을 일시 가동해.”
[프로토콜 가동. 방어벽 일시 폐쇄.]
지키미-7이 제단의 콘솔로 부유해 들어가 고대 에너지를 주입하자, 거대한 석조 격벽이 굉음과 함께 내려앉으며 수색대원 3명의 진입로를 차단했다. 순식간에 적들은 분열되었다.
“뭐지? 고대 트랩인가? 2분대, 즉시 우회해라!”
통신기 너머로 당황한 제국군 장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발소리와 진동을 완벽하게 지우는 ‘사막 유령 보법’을 시전하며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모래 먼지가 가득한 바닥을 밟았음에도, 그녀의 발끝은 미세한 흔들림조차 남기지 않았다. 수색대원들이 들고 있는 진동 감지 센서에는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설아는 격벽 너머로 분리된 채 경계를 서고 있는 제국군 초병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눈을 감은 상태로 레이븐의 시야를 통해 초병의 배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그녀는 단검을 굳게 쥐었다. 보이지 않는 적의 위치를 적장의 눈을 빌려 완벽하게 조준하는 기이한 전술적 우위.
그녀가 초병의 목덜미, 가장 취약한 장갑 틈새를 노려 단검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쿠구구궁—!
갑자기 가슴속 동조기가 미친 듯이 고동치며 뇌 신경을 강하게 때렸다.
그와 동시에, 대기권 밖 궤도 기함의 왕좌에 앉아 있던 레이븐이 급격한 이질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무섭게 흔들렸다.
그의 시야에 사령실의 스크린 대신, 붉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카이로스의 유리 사막과, 그 어두운 유적 지하에서 자신을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는 한 검은 머리칼의 저항군 여전사의 얼굴이 홀로그램처럼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레이븐은 궤도 위에서, 설아는 사막의 지하에서, 서로의 영혼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시각적 충격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완벽하게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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