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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과의 밀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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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격벽이 폭풍 같은 굉음과 함께 뜯겨 나간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보급 상자째로 민설아의 심장을 꿰뚫으려던 섀도우-B의 붉은 플라즈마 단검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문을 부수고 난입한 거대한 그림자, 제국 대장군 레이븐이 내뿜는 서슬 퍼런 살기가 독방 내부의 차가운 스팀을 단숨에 찢어발겼기 때문이었다.


“내 기함에서 무슨 짓을 벌이는 거냐, 쥐새끼가.”


레이븐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 초전도 나노 전류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어둠을 밝혔다. 레이븐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중력 제어 검을 뽑아 들어 섀도우-B의 측면을 강타했다.


콰아앙—!


플라즈마 단검과 중력 검이 충돌하며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광휘가 독방을 가득 채웠다. 섀도우-B는 레이븐의 압도적인 물리적 완력에 밀려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전신의 나노 연기 슈트를 폭발적으로 가동했다. 검은 연기가 독방 안을 가득 메웠고, 자객의 기척은 순식간에 천장 환기구 너머로 사라졌다. 굳이 대장군과의 정면 대결을 고집해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철저한 기만 퇴로였다.


“콜록, 윽……”


자객이 물러가자마자 설아는 바닥으로 쓰러지며 신음을 토했다. 신경 폭주의 대가는 가혹했다. 강철 구속구를 강제로 부수며 찢겨 나간 우측 손목 인대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고, 관절 뼈가 완전히 어긋난 손목은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찢어진 살갗 사이로 붉은 피가 차가운 메탈 바닥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때, 우두커니 서 있던 레이븐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설아는 흐릿한 오른쪽 시야를 억지로 넓혀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븐의 검은 가죽 장갑 위로 미세한 나노 전류가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얼굴 역시 차갑게 굳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동조 2단계: 통각 역전.


목에 채워진 전자기 차폐 차단 목걸이가 고통의 전송률을 30%로 제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아의 손목이 파열되며 발생한 비명 같은 통증 파동이 레이븐의 신경망을 사정없이 뒤흔든 것이었다. 적장의 심장 코어 역시 급격한 과부하 충격으로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너…… 오른손이……”


설아가 핏기가 가신 입술을 움직여 겨우 말을 뱉었다. 레이븐은 붉게 충혈된 푸른 눈동자로 설아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네년이 구속구를 무식하게 뜯어발긴 대가다. 감각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토록 끔찍한 저주일 줄이야.”


레이븐은 부러진 손목의 통증을 억누르며 뜯겨 나간 격벽의 수동 비상 차단 레버를 거칠게 내렸다. 육중한 강철 격벽이 다시 내려앉으며 독방을 완전히 폐쇄했다. 그는 섀도우-B가 남긴 바닥의 나노 연기 잔해를 군화로 짓밟으며, 그을린 벽면의 흔적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발렌타인 가문의 극비 암살 병기인 플라즈마 나노 단검의 용융 상흔이군. 내 이복 누이 엘리사가 보낸 밀정이다. 감찰관 벨리알의 눈을 피해 나를 확실하게 매장하기 위해 네년을 노린 거다.”


레이븐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제국을 위해 평생을 전쟁 병기로 살아왔으나, 가문은 그를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도구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설아는 부러진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으며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 가슴팍의 동조기가 은청색 성운 모양의 광채를 내뿜으며 기함의 반물질 반응로 주파수와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가문마저 네놈의 목숨을 노리는군, 대장군 각하. 벨리알의 감시망도 모자라 사적인 자객까지 보낼 정도면, 네놈도 이 기함 안에서 그리 안전한 처지는 아니야.”


설아의 냉소 섞인 지적에 레이븐은 침묵했다. 그는 천천히 설아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도사린 냉혹함 뒤로, 복잡하게 얽힌 전술적 계산이 일렁이고 있었다.


“민설아. 우리는 원수다. 네 조국을 초토화한 것은 제국의 군대고, 나는 그 군대의 수장이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리고 내가 실각하면 네년 역시 벨리알의 고문실에서 영혼까지 해킹당해 죽음을 맞이하겠지.”


레이븐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설아의 턱을 거칠게 치켜올렸다. 목걸이의 금속성 질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압박했다.


“가문과 황실의 정적들이 내 기함 내부의 제어권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놈들은 내 생체 데이터의 이상 수치를 확보해 나를 반역죄로 엮으려 하지. 그래서 제안한다.”


“……제안?”


설아는 턱이 죄어오는 아픔 속에서도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밀약이다. 네 가슴에 박힌 고대 양자 동조기의 힘을 사용해라. 네 감각 동조 능력을 안테나 삼아, 기함 내부의 모든 무선 신호와 장교들의 신경 링크 주파수를 역으로 가로채라. 가문의 밀정들이 내 등 뒤에서 무슨 모의를 꾸미고 있는지 내 눈과 귀가 되어 감시하란 말이다.”


설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원수의 사냥개가 되어 그의 정적들을 감시해 달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비참한 공생인가.


“내가 왜 네놈의 사냥개가 되어야 하지? 네놈들이 파괴한 내 고향 카이로스의 먼지들이 아직도 내 폐부에 가득 차 있는데.”


“살아남기 위해서다.”


레이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네놈이 목숨처럼 아끼는 카이로스의 생존자들 때문이지. 더스트 호에 탄 네 동료들과 피난민 수송선이 외곽 궤도에서 표류 중인 것을 알고 있다. 벨리알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는 순간, 즉각 정화령이 내려져 우주의 먼지가 될 거다.”


설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쇄골의 자창 흉터를 적셨다. 동생 민우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 스승 한태성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 뇌리를 스쳤. 그녀가 무너지면 카이로스의 마지막 불꽃마저 영원히 꺼져버릴 터였다.


“……조건이 있어.”


설아는 왼손으로 목에 걸린 민우의 은빛 인식표를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우리 동료들과 피난민들의 생존을 보장해. 수송선의 좌표를 제국군의 추격망이 미치지 않는 안전 구역으로 이동시키고, 그들을 제3함대 직속 ‘극비 군사 징용 노동자’로 위장 등록해라. 벨리알과 바란 소장이 함부로 손댈 수 없도록.”


레이븐은 잠시 설아의 눈동자를 응시하더니,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좋다. 거래 성립이다. 내 권한으로 그들의 신분을 임시 보장하지. 대신 네년은 지금 즉시 기함 내부의 주파수를 스캔해라.”


레이븐은 품속에서 기함 내부의 암호화된 장교 명단과 주파수 대역이 기록된 극비 단말기를 꺼내 설아의 앞에 던져두고는, 독방 구석의 감시 사각지대로 물러섰.


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부러진 우측 손목에서 가해지는 통증이 머리를 깨부술 듯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약해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차가운 메탈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양자 호흡 제어법.’


설아는 호흡을 극도로 차분하게 유지하며 맥박을 늦추었다. 가슴팍의 동조기가 은청색 성운의 광채를 내뿜으며 고동치기 시작했다. 신경망을 타고 흐르는 양자 에너지가 기함 내부의 무선 전자기장과 공명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시야 너머로 보이지 않는 신호의 숲이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


‘양자 감각 전이: 시각 가로채기.’


설아는 정신을 집중해 기함의 하급 장교 구역 주파수로 뇌파를 보냈다. 전자기 차폐 차단 목걸이의 미세한 나노 다이얼을 왼손 끝으로 미세하게 조율하며, 레이븐이 제공한 주파수 결을 따라 의식을 확장했다. 뇌 신경이 팽창하며 찢어지는 듯한 이명이 일었지만, 그녀는 이빨을 드러내며 버텨냈다.


지이이잉—.


마침내 주파수가 락온되었다. 설아의 오른쪽 눈동자가 레이븐의 안구 색상과 같은 차가운 은빛으로 일시 변하며, 타인의 시야가 그녀의 뇌리로 직접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이븐의 직속 부관이자, 언제나 설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죽이려 했던 젊은 엘리트 장교 카이의 시야였다.


시야 속 카이는 기함 하부의 어둡고 으슥한 비상 통로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안구에 장장된 가시광선 고글 ‘아이 오브 제국’이 주변의 스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띄우고 있었다. 카이는 주위를 극도로 경계하며 통로 끝의 전자기 차폐 격벽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창백한 피부에 음험한 미소를 지은 사내, 황실 감찰관 벨리알이었다.


설아는 카이의 눈을 통해 벨리알의 금빛 안경 렌즈에 반사되는 차가운 조명을 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카이의 청각 신경을 타고 설아의 뇌리에 선명하게 꽂혔.


“감찰관 각하,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카이가 자신의 개인 단말기를 전개해 벨리알에게 건넸다. 단말기 화면 위로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레이븐 대장군의 심장 나노 코어 수치와 실시간 생체 데이터 로그가 빽빽하게 떠올랐. 그 안에는 설아가 자해를 감행했을 때 발생했던 레이븐의 심각한 심장 마비 쇼크 기록과 오른쪽 손목의 이상 신경 통증 주파수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오, 대단하군. 대장군의 직속 부관이 직접 가져온 배신의 물증이라니.”


벨리알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이 이상 생체 데이터가 황실 의회에 송신되는 순간, 대장군은 포로와의 금기된 동조 사실이 폭로되어 반역죄로 즉각 참수당할 것이다. 카이 중위, 가문과 황실을 위한 자네의 충성을 황제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걸세.”


카이는 복잡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오직 대장군 각하를 구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사막의 기생충이 각하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한, 각하는 파멸할 겁니다. 데이터를 황실로 송출해 즉각 강제 진압 친위대를 소환해 주십시오.”


설아는 카이의 시야를 통해 그들이 3시간 뒤 황실 성계 진입 직전, 레이븐의 반역 증거 데이터를 황실 중앙 서버로 암호화 송신하기 위해 예약을 걸어두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충격적인 배신의 현장이 설아의 영혼을 강타하는 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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