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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자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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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에밀리가 주입한 생명 동조 안정화 액의 차가운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은청색 양자 회로의 폭주가 진정되자 독방 안은 다시 지독한 침묵 속에 잠겼다. 민설아는 차가운 메탈 바닥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팍의 동조기는 미세한 은청색 성운의 광채를 내뿜으며 규칙적으로 맥박치고 있었고, 목에 채워진 전자기 차폐 차단 목걸이는 묵직한 이물감으로 그녀의 숨통을 죄었다.


48시간.


그것이 에밀리가 선고한 설아의 남은 수명이었다. 기함 ‘블랙 레비아탄’의 삼엄한 의무 보물고 깊은 곳에 보관된 고순도 헬릭스-V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그녀의 뇌세포는 양자 오염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괴사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녀와 생명을 공유한 제국 대장군, 레이븐의 죽음을 의미했다.


‘살아야 한다. 원수의 목숨을 쥐고서라도, 제국 황실의 추악한 음모를 밝혀내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어.’


설아는 목에 걸린 남동생 민우의 은빛 군인 인식표를 왼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흐려지려는 이성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오른눈의 흐릿한 시야 너머로 독방의 어둠이 일렁였다.


스스스스—.


그때, 독방 천장의 미세한 환기구 틈새에서 기괴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연기가 아니었다. 빛을 흡수하는 듯한 극도의 검은색을 띤, 미세한 나노 입자들의 군집이었다. 연기는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서서히 하나의 형상을 갖추어 나갔.


설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빛났다. 저항군 전사로서의 직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침입자였다. 기함의 삼엄한 전자기 차폐막과 감시 센서를 완벽하게 우회하여 독방 내부로 침투할 수 있는 존재.


연기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국 장교복 안에 발렌타인 가문의 검은 문장을 새긴 내의를 입은 사내였다. 창백하고 정중한 가면 같은 얼굴 뒤로 냉혹한 살기를 품은 사내, 레이븐의 이복 누이 엘리사 발렌타인이 보낸 극비 첩자 ‘섀도우-B’였다.


섀도우-B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목에서 나노 입자들이 빠르게 재구성되며 붉은 광채를 내뿜는 초고온 플라즈마 나노 단검이 길게 튀어나왔다. 분자 단위로 물질을 분해해 버리는 치명적인 암살 병기였다.


사내가 바닥을 박차며 번개처럼 쇄도했다. 그의 목표는 벽면의 기계식 구속구에 양손이 묶여 있는 설아의 목덜미였다. 단 한 번의 참격으로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일격 필살의 궤적이었다.


‘움직일 수 없어……!’


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양손은 강철 구속구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고, 약물 후유증으로 몸은 무거웠다. 피할 길이 없었다. 죽음의 푸른 불꽃이 눈앞까지 박두한 찰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레이븐의 기억 전이 데이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


과거 레이븐이 황실의 나노 실험실에서 혹독한 주입식 훈련을 받으며 체득했던 신체 가속의 공식들. 그의 근육이 기억하는 반사신경의 정수가 설아의 신경망을 타고 실시간으로 다운로드되었다.


‘양자 신체 가속: 신경 폭주(Nerve Overload).’


설아는 이성을 내던지고 가슴팍의 동조기 출력을 강제로 개방했다.


파지직—!


은청색 성운 낙인이 붉은 스파크를 튀기며 폭발적으로 발광했다. 안정화 액이 혈관 속에서 급격히 연소하며 그녀의 근육 세포에 초고전압의 양자 에너지를 강제로 주입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고 뇌 신경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주변의 모든 풍경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의 축이 늘어진 것이었다. 오직 설아의 반사 속도만이 3배 이상 폭증했다.


“아아아악!”


설아는 비명을 지르며 결박된 양팔을 앞으로 거칠게 낚아챘다. 신경 폭주로 쥐어짜 낸 초인적인 완력이 그녀의 상체에 실렸다.


콰직, 콰앙—!


단단한 강철 구속구의 기계 관절이 비틀리며 스파크를 일으키고 산산조각 났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억지로 구속구를 뜯어내는 과정에서 설아의 우측 손목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었고, 관절뼈가 어긋나는 극심한 아픔이 전신을 강타했다.


그러나 설아는 고통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구속구가 풀린 왼손으로 바닥에 놓여 있던 무거운 식수 컵을 집어 던져 섀도우-B의 시야를 가리려 했다. 하지만 섀도우-B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검은 나노 연기가 날아오는 컵을 허공에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 분자 단위로 분해해 잿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기만책은 통하지 않았다.


스윽—!


플라즈마 단검이 설아의 목덜미를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갔다. 초고온의 열기가 피부를 태울 듯이 엄습했고, 단검의 잔상이 스친 뒷벽의 티타늄 장갑판이 붉게 용융되며 녹아내렸다. 0.1초만 늦었어도 그녀의 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터였다.


설아는 낙법을 치며 구르는 동시에 섀도우-B의 다음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그녀는 부러진 우측 손목을 왼손으로 움켜쥔 채, 독방 구석에 놓인 무거운 철제 보급 상자 뒤로 몸을 던져 은신했다. 호흡이 턱 밑까지 차올랐고, 찢어진 손목에서 붉은 피가 메탈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섀도우-B는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목에 장착된 플라즈마 단검이 다시 한번 웅웅거리며 출력을 최대로 높이기 시작했다. 붉은색 광채가 독방 내부의 어둠을 붉게 물들였다. 사내는 보급 상자 너머에 숨은 설아를 단숨에 관통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며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그 순간, 설아의 손목이 꺾이며 발생한 맹렬한 통증 파동이 양자 동조기를 타고 기함의 저편으로 송신되었다.


사령실에서 감찰관 벨리알의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던 레이븐 대장군의 왼쪽 심장 코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그의 오른쪽 손목 인대가 타들어 가는 듯한 동조 통증이 실시간으로 엄습했다.


“크윽……!”


레이븐은 단말기 위로 피가 흐르는 자신의 장갑 낀 손목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살기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독방에 갇힌 포로, 민설아가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곧 자신의 소멸이었다.


“감히 내 기함 내부에서……!”


레이븐은 사령실의 제어 콘솔을 거칠게 밀쳐내고, 폭풍 같은 기세로 독방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색 초전도 나노 전류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한편, 독방 구석의 어둠 속에서 섀도우-B의 신형 나노 슈트가 거대한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허공으로 높게 솟구쳤다. 사내의 붉은 단검 끝이 설아의 심장이 위치한 보급 상자의 얇은 틈새를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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