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바람의 예감
석탄 가루와 유황 냄새가 뒤섞인 아침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Seoktan Valley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잿빛 장막에 가려져 있었으나, 오늘 아침 울려 퍼지는 구리 호각 소리는 유독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다.
삐이이익! 삐익!
“전부 나와라!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마당으로 모여!”
간수들의 거친 고함과 채찍 소리가 오막살이 벽을 두드렸다. 육남천 사부의 유해 항아리를 벽면 깊숙한 틈새에 숨기고, 부러진 Chilsal-geom을 바닥 밑 비밀 판자 아래 밀어 넣은 육한신은 낡은 마의를 추스르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오른손목에서 전해지는 격통이 뇌수를 찔렀다. 어젯밤, 사부의 유해를 훔치려던 밀정 Machil의 목울대를 왼손 찌르기 한 방으로 꿰뚫어 단죄했던 생생한 반동이 왼팔 근육에도 뻐근한 피로를 남겨두고 있었다.
한신은 오른쪽 다리를 몹시 절뚝이며 흙바닥 위에 엎드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수백 명의 광부들이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칠이 사라졌다.”
대열의 전면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음산했다. 가죽 무복을 입고 허리에 날이 휘어진 거대한 백골도를 찬 사내, 항산파 석탄곡 분타의 제일 호위무사인 독고령이었다. 애꾸눈을 가린 검은 안대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는 온통 칼자국이 가득했고,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삼류 광부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조표 분타주께서 신임하시던 밀정이 어젯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석탄곡 외곽 숲속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으니, 분명 이 안의 쥐새끼들 중 누군가가 사파의 살수와 내통했거나 직접 해를 끼친 것이 분명하다.”
독고령의 안광이 무릎을 꿇은 광부들의 정수리를 훑었다. 그 뒤로 간수 대장 번호가 철조망 가죽 채찍을 바닥에 내리치며 공포를 더했다.
찰싹!
“한 놈씩 처소를 이 잡듯 뒤져라! 먼지 한 톨이라도 수상한 것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칠 것이다!”
독고령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간수들이 오막살이들을 향해 난입하기 시작했다. 한신의 심장이 가볍게 요동쳤다. 사부의 유해 항아리와 Chilsal-geom은 철저히 숨겨두었으나, 독고령 같은 일류 고수의 예리한 눈이라면 언제 바닥의 미세한 틈새를 눈치챌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광산 소년 철이가 멀리서 한신을 향해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괜찮다는, 자신이 간수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철이는 일부러 마당 구석의 석탄 더미를 무너뜨리며 소란을 피웠고, 간수들의 채찍질이 그쪽으로 향하는 틈을 타 한신은 ‘청소 보법(소지보)’을 전개했다. 다리를 절뚝이는 척하면서도, 몸의 중심을 낮추어 경비병들의 시야 사각지대를 기민하게 빠져나갔다.
지금 이곳에 머무는 것은 자멸이다. 수색대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몸을 숨겨야 했다. 한신은 매연 가득한 탄광 마당을 벗어나 석탄곡 어귀 저잣거리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독한 갈증과 오른손의 통증을 식히기 위해 그가 향한 곳은 외곽에 위치한 초라한 목조 주막, ‘주막 장씨네’였다.
주막 내부 역시 광산촌의 살벌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석탄 먼지를 뒤집어쓴 몇몇 광부들이 구석에서 시름없이 싸구려 탁주를 들이켜고 있을 뿐이었다.
탁.
한신이 주막 구석의 흔들리는 나무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른손의 삼베 붕대 틈새로 검붉은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빨로 붕대 끝을 물어당겨 손목 관절을 억지로 고정하려 애쓰는 소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
“아신아, 또 몸을 상해왔구나.”
뚱뚱한 체구에 거친 무쇠 국자를 든 주막 주모 장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장씨는 한신이 벙어리 행세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대답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한 접시와 차가운 물 한 사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품속에서 삼칠근 약초 찌꺼기를 슬쩍 꺼내 한신의 붕대 옆에 밀어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분타 놈들이 눈이 뒤집혀 온 동네를 뒤엎고 있다. 마칠이라는 밀정이 죽었다더군. 억울한 민초들만 또 피를 보게 생겼어. 밥 든든히 먹고 당분간은 갱도 깊은 곳에 숨어 지내거라.”
한신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자, 뜨거운 육즙과 함께 장씨의 따뜻한 정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이 온통 정파의 위선과 핍박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이 초라한 주막의 주모 장씨만큼은 소년에게 어머니 같은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막 안의 탁한 공기를 가르고, 서늘하고 맑은 기운이 한신의 감각을 자극했다. 마치 황량한 광산촌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밤바람이 불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한신은 고개를 들어 주막 반대편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남장을 한 채 푸른 장포를 걸친 한 여무인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려하고 차가운 이목구비, 남장 아래 숨겨진 날렵한 체구. 그녀의 등 뒤에는 푸른 빛을 발하는 예리한 청강검이 기대어 있었다.
‘일류의 고수…….’
한신의 철 분석안이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소년의 본능이 경고를 보내왔다. 그녀가 내뿜는 정순한 도가 계열의 내력은 항산파의 졸개들과는 차원이 다른 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정파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강호룰 방랑하던 천재 무인, 백령이었다.
백령은 탁한 주막의 풍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조용히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맑고 깊은 눈동자는 이미 주막 구석에 앉은 더럽고 초라한 광부 소년, 한신을 향하고 있었다.
백령의 눈에 비친 한신은 기묘한 모순덩어리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쓴 영양실조 걸린 광부 소년. 하지만 그 더벅머리 아래로 순간적으로 드러난 눈빛만큼은, 쇳물을 제련하는 용광로처럼 뜨겁고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백령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소년의 오른손이었다. 피와 땀, 그리고 석탄 먼지로 찌들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삼베 붕대. 그 틈새로 보이는 손가락 마디마디는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굵어지고, 뒤틀리고, 굳은살이 층층이 박여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손가락.
백령은 천재였다. 가문의 화려한 유운검법을 단숨에 익혔고, 수많은 정파 고수들의 검로를 보아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저 손이 지닌 진짜 의미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저것은 광산에서 곡괭이질을 몇 년 했다고 만들어지는 손이 아니었다.
매일 밤, 뼈가 깎이고 살이 터져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오직 단 하나의 초식만을 수만 번, 수십만 번 밀어 넣은 광기 어린 집념의 무인만이 가질 수 있는 파멸의 흔적이었다.
‘재미있군.’
백령의 차가운 입술 끝에 묘한 흥미가 서린 미소가 걸렸다. 정파 세가들의 화려하고 기만적인 검법에 신물이 나 있던 그녀에게, 이 잿빛 광산촌 구석에 숨은 범재의 처절한 광기는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전율이었다.
스윽.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막의 탁한 유황 먼지가 양옆으로 갈라지는 듯했다. 그녀의 청강검 끝에 달린 푸른 검결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맑은 쇠소리를 냈다.
한신은 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늘어진 오른손을 마의 소매 안으로 깊숙이 감추고, 왼손으로 탁자 밑을 더듬었다. 비록 Chilsal-geom은 오막살이에 두고 왔으나, 주모 장씨가 건넨 무쇠 숟가락 하나만으로도 급소를 찌를 준비를 마쳤다.
스르륵.
백령은 한신의 경계를 비웃듯, 아무런 살기도 내뿜지 않은 채 그의 맞은편 의자에 묵묵히 앉았다. 주막의 다른 광부들은 남장 여인의 기품에 기가 질려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백령은 자신이 마시던 독한 술병과 흙으로 구운 술잔 하나를 한신의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순한 내력을 실어 술병을 가볍게 기울였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맑고 독한 향취를 풍기는 술이 잔을 채웠.
한신은 침묵했다. 벙어리 아신의 가면을 유지한 채, 그저 어수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백령은 한신의 더벅머리 아래 숨겨진 안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소매 틈새로 삐져나온 삼베 붕대 감긴 기형적인 손가락 마디를 가만히 가리켰다.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탁자 위의 술잔이 한신의 앞으로 미끄러져 다가갔다. 차가운 쇠 냄새와 독한 술 향기가 소년의 코끝을 찔렀다.
백령이 나지막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막 밖에서 들려오는 간수들의 거친 고함 소리조차 지워버릴 듯한, 고요하지만 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 손으로 쥐는 것은 곡괭이인가, 아니면 칼자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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