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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의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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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진의 녹수검 끝이 한신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청강검의 차가운 날끝이 번개처럼 끼어들었다.


깡—!


협곡의 좁은 바위 벽 사이로 고막을 찢을 듯한 예리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불꽃이 어둠 속에서 붉게 튀었고, 그 반동으로 학진의 녹수검이 한 치 뒤로 밀려났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푸른 그림자가 한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장 차림의 장포를 휘날리는 백령이었다. 그녀의 청강검은 유려한 구름의 궤적을 그리며 학진의 자하검기를 부드럽게 흘려내고 있었다.


“바보같이 무게 중심을 잃다니! 정신 차려, 육한신!”


백령이 나지막이 쏘아붙이며 유운검법(流雲劍法)의 변칙적인 초식으로 학진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검 끝이 허공에 수십 개의 푸른 잔상을 만들어내자, 학진은 어깨의 부상과 기습에 당황한 듯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후우…… 후우…….”


한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왼손으로 움켜쥔 부러진 칠살검(七殺劍)이 무겁게 흔들렸다. 오른손은 삼베 붕대 아래에서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고, 무리하게 척추를 비틀어 왼손 검로를 전개한 탓에 등줄기를 타고 타오르는 듯한 격통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제대로 타통되지 않은 왼팔의 경맥이 미세하게 파열되어 손목에서부터 피가 삼베 틈새로 베어 나왔다.


“비열한 계집년이 감히 대협의 비무에 끼어드는구나!”


학진이 어깨의 자상을 움켜쥐며 광기 어린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주변으로 항산파 무사 수십 명이 횃불을 치켜들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좁고 가파른 협곡 외길은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바닥에는 석탄곡에서부터 흘러든 검은 재와 유황 먼지가 바람을 타고 서늘하게 흩날렸다. 피난민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백령, 무양과 광부들을 쫓아오는 졸개들을 막아주시오. 이 자는 내가 상대하겠소.”


한신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령은 한신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늘어진 오른팔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나 마. 네가 죽으면 저 항아리는 내가 깨부술 테니까.”


백령은 청강검을 휘두르며 협곡 입구를 향해 쇄도하는 항산파 무사들을 막아서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이제 좁은 협곡의 외길에는 한신과 학진, 오직 두 사람만이 마주 서게 되었다.


“불구자 놈이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구나. 조표를 죽인 그 야바위 같은 왼손 검술이 진짜 일류의 검강 앞에서도 통할 것 같으냐!”


학진이 녹수검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의 단전에서부터 정순한 자하기공(紫霞氣功)의 내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녹수검의 푸른 날 위로 보랏빛 검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기류를 찢어발겼다. 바람 소리조차 집어삼키는 항산파 비전의 살상 쾌검이 한신의 전면을 향해 폭풍처럼 몰아쳤다.


쉭! 쉭! 쉭!


수십 개의 자하검영이 한신의 사각지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한신은 몸의 중심을 낮추며 잔회검파 기초 보법을 밟았다. 발끝이 지면의 잿가루를 쓸어내며 몸의 회전축을 반대로 뒤집는 변칙적인 회피였다. 그러나 학진의 검 속도는 이류 최상급다웠다.


카아앙! 캉!


한신은 왼손으로 칠살검을 들어 올려 밀려드는 자하검기를 겨우 막아냈다. 일반 검보다 세 배는 무거운 묵철검의 무게가 왼팔 근육을 짓눌렀다.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뼛속까지 울리는 반동이 왼손목을 타고 척추로 이어졌다. 허벅지의 상처에서도 피가 배어 나와 바지를 붉게 물들였다. 육체적인 한계가 코앞이었다. 이대로 단순한 합을 주고받다가는 지쳐서 목이 베일 것이 자명했다.


‘기연도, 절세의 내공도 없다. 내가 믿을 것은 오직 이 눈과, 십만 번을 찔러온 감각뿐이다.’


한신은 호흡을 멈추고 내면의 분노를 차갑게 식혔다. 그리고 두 눈에 힘을 주어 철 분석안(鐵 分析眼)을 가동했다.


순간, 한신의 안구가 붉은 쇳물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안구 경맥이 찢어질 듯한 압박감과 함께, 눈앞의 세계가 흑백으로 변하고 오직 철의 질감만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학진이 휘두르는 명검 녹수검의 궤적이 붉은 선으로 번뜩였다.


철 분석안의 시야 속에서, 완벽해 보이던 녹수검의 검날 중앙 부근에 미세한 푸른색 균열선이 포착되었다. 제련 과정에서 묵철과 강철의 온도를 맞추지 못해 생긴 치명적인 열피로(熱疲勞) 흔적이었다. 아무리 겉보기에 화려한 명검이라 할지라도, 대장장이의 피를 이어받은 한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죽어라, 불구자 놈!”


학진이 내지른 녹수검이 한신의 왼쪽 어깨를 향해 매섭게 찔러 들어왔다.


한신은 피하는 대신, 왼손에 쥔 칠살검의 무겁고 두꺼운 단면을 비스듬히 세워 녹수검의 측면을 정면으로 내리쳤.


콰아앙—!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체중을 실어 무겁게 내리찍는 묵철 참격(墨鐵斬擊)이었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칠살검 자루 내부에 숨겨진 순도 높은 묵철 핵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웅장한 진동이 칠살검의 검신을 타고 학진의 녹수검으로 역류했다.


웅웅웅웅—!


녹수검이 미세하게 떨리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학진의 손목이 진동의 반동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마비되듯 흔들렸다. 검 자루를 쥔 그의 악력이 느슨해진 찰나, 한신은 척추를 비틀어 몸의 회전축을 반대로 뒤집는 좌수역검술의 필살 궤적을 전개했다.


‘지금이다.’


한신의 왼손 끝에서 뿜어진 칠살검의 푸른 날끝이, 학진의 녹수검 중앙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의 정중앙을 정확히 찔러 들어갔. 십만 번의 찌르기로 단련된 가공할 정밀함이었다.


파아앙—!


칠살검 내부의 묵철의 공명 진동(墨鐵 共鳴 振動)이 녹수검의 제련 결함 부위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주파수를 만들어냈다. 진동이 극대화되는 순간, 학진이 자랑하던 명검 녹수검의 검신이 쩍 갈라지며 수십 개의 날카로운 철편으로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사방에 흩뿌려졌다.


“무, 무어라……?!”


학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의 검이 파괴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흩날리는 무쇠 파편들 사이로, 한신의 부러진 칠살검 끝이 학진의 오른쪽 가슴을 깊숙이 관통했다.


푸학!


학진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거구가 협곡 바닥으로 사정없이 굴러떨어졌다. 흙먼지와 검은 재가 그의 화려한 무복을 더럽혔다.


“대장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항산파 무사들이 명검이 박살 나고 수장이 쓰러지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잃고 비명을 질렀. 협곡 전체가 깊은 충격과 침묵에 빠져들었다. 한신은 왼손의 검을 거두며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붕대 감긴 오른손등으로 묵묵히 닦아냈다. 왼팔의 경맥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학진은 가슴의 깊은 자상을 움켜쥔 채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눈에는 이제 오만함 대신 깊은 공포와 굴욕감이 서려 있었다. 주변 무사들이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서며 한신을 경계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감히 내 녹수검을…….”


학진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피를 흘리며 뒤로 후퇴하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품속 장포 안쪽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붉은 가죽 끈이 달린 전령용 구리 호각이었다.


학진은 마지막 남은 내력을 쥐어짜 호각을 입에 물고 거칠게 불어댔다.


삐이이이이이익—!


협곡의 가파른 절벽 벽면을 타고,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롭고 긴 호각 소리가 안개 낀 밤하늘 위로 길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한풍산 기슭 너머에서 대기 중인 그의 부친, 항산파의 거물 학무성(郝武成)에게 보내는 최후의 신호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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