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속에 묻힌 칼날
매캐한 유황 연기와 검은 탄가루가 석탄곡(Coal Valley)의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다. 해가 저문 지 오래였으나, 광산촌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탁했다. 하루 열두 시간 동안 어두운 갱도 속에서 곡괭이를 휘두르며 석탄 마차를 밀어대던 광부들은 짐승처럼 헐떡이며 흙바닥에 쓰러져 잠을 청했다. 그들의 기침 소리에는 항상 검붉은 핏덩이와 석탄 가루가 섞여 있었다.
그 비참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육한신이 있었다. 올해로 열여덟이 된 소년의 몰골은 다른 삼류 광부들과 다를 바 없이 초라했다. 온몸에 그을음이 박혀 있었고, 더벅머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흙빛이었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는 삼베 끈으로 단단히 묶은 거친 회색 진흙 항아리가 매달려 있었다. 잔회검파(Janhoe Sect)의 전대 장문인이자 소년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던 사부, 육남천의 유해 항아리였다.
멸문지화(滅門之禍).
정파의 탈을 쓴 오악동맹(Five Sacred Alliances)의 비열한 습격 속에서, 문파는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육한신이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사부의 타버린 유해와 반쯤 부러진 묵철검인 칠살검(Chilsal-geom)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소년은 항산파 분타(Hangsan Sect Branch)가 지배하는 이곳 석탄곡으로 흘러들어와 정체를 숨겼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어리숙한 삼류 광부 ‘아신’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비결이었다.
밤바람이 윙윙거리며 대지를 쓸고 지나갈 때, 육한신은 석탄곡 외곽의 무너져가는 오막살이 마당으로 나섰다. 사방은 고요했으나 어둠 속에는 항산파 간수들의 눈길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기척을 보였다가는 즉시 마교의 첩자로 몰려 처형당할 터였다.
한신은 마당에 서 있는 늙은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의 몸통에는 이미 수만 번의 칼끝에 찔린 깊고 투박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스스슥.
한신은 낡은 빗자루를 들어 마당의 낙엽을 쓸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허리가 굽은 절름발이 광부의 둔한 몸짓이었으나, 그의 발끝은 흙바닥 위에 세 개의 점을 찍듯 정교한 기하학적 궤적을 밟고 있었다. 사부의 눈을 피해, 그리고 항산파의 감시를 피해 마당을 쓸며 하체의 내공과 보법을 익히는 위장 수련법, 청소 보법(掃地步)이었다.
충분히 주변의 동태를 살핀 한신은 빗자루를 내려놓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부러진 칠살검을 뽑아 들었다. 검날의 절반이 비스듬히 부러져 날 끝이 뭉툭하고 거친 검은색 묵철검. 일반 검보다 세 배는 무거운 그 검을 쥐는 소년의 오른손에는 거친 삼베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사부 육남천이 죽을 때 입고 있던 피 묻은 도포 자락을 찢어 만든 붕대였다.
“후우…….”
한신은 이빨로 삼베 붕대의 끝을 물어당겨 손목 관절을 극도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매일 천 번씩 찌르기를 반복한 탓에, 소년의 오른손가락 뼈마디는 이미 비정상적으로 굵어지고 뒤틀려 기형적인 형태로 변해 있었다. 검을 쥘 때마다 관절이 어긋나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찔러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 소리를 삼켰다.
복수(復仇)를 위해서라면, 이따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윽.
한신의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붕대 감은 오른손목이 완벽한 일직선을 이루었다. 어떤 기묘한 변화도, 화려한 초식도 없었다. 오직 정면을 향해 최단 거리로 뻗어 나가는 가장 단순하고 투박한 기본 일직선 찌르기 초식이었다.
쉬익!
부러진 검 끝이 공기를 가르며 느티나무 정중앙에 고정된 무쇠 표적판을 때렸다. 둔탁한 쇠소리가 밤공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손목으로 전달되는 가공할 반동에 뒤틀린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살 가죽이 터져 삼베 붕대 틈새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한신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오직 상대를 단 한 방에 관통하겠다는 처절한 집념만이 소년의 검 끝에 실려 있었다. 굳은살이 찢어지고 다시 박이기를 수만 번 반복하는 동안, 소년의 눈빛은 재 속에 묻힌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멀리서 자갈밭을 짓밟는 무겁고 거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석탄곡 광산의 행동대장이자 무자비한 채찍질로 악명 높은 간수 번호(Beon-ho)의 걸음걸이였다. 허리에 철조망이 박힌 특제 가죽 채찍을 찬 번호는 야간 순찰을 돌 때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광부들을 때려눕히는 살귀 같은 사내였다.
한신은 즉시 검을 품속에 숨기고 빗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몸을 낮추어 어수룩하고 다리를 가볍게 저는 삼류 광부 ‘아신’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이, 거기 벙어리 녀석. 이 야밤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어둠을 뚫고 번호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고, 붉은 불꽃이 그의 흉악하게 생긴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었다. 번호의 눈빛은 낮 동안 쌓인 피로와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어버…… 장, 장작을…… 치우고 있었습니더…….”
한신은 일부러 말을 더듬으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흙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번호의 발끝만을 바라보았다.
번호는 횃불을 높이 들어 오막살이 마당을 비추었다. 그의 날카로운 수색 감각이 마당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늙은 느티나무 아래 흙바닥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찌르기 수련을 할 때 발끝으로 지면을 강하게 지탱하느라 깊게 파인 기묘한 발자국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음? 바닥에 이 구멍들은 뭐지? 꼭 무공을 수련하는 놈들이 보법을 밟은 자리 같은데?”
번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횃불을 한신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기름 냄새가 소년의 코끝을 찔렀다. 한신의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표정만큼은 완벽하게 바보스러운 공포로 채워 넣었다.
“이, 이기…… 광산에서 쓸 무거운 곡괭이를 휘두르다 보이…… 발이 미끄러져서 그렇습니더, 나리. 살려주이소…….”
한신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비벼댔다. 번호는 한신의 뒤틀리고 비정상적으로 굵어진 오른손가락 마디를 힐끗 보았다. 그 손은 영락없이 가혹한 채굴 노동으로 뼈가 으스러지고 굳은살이 박인 광부의 흉측한 손이었다.
“쳇, 쓸데없는 소리.”
번호는 침을 뱉더니, 갑자기 군화 발을 들어 한신의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한신의 몸이 마당 구석으로 나뒹굴었다. 갈비뼈가 부러질 듯한 격통이 밀려왔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옆구리에 푸른 멍이 드는 굴욕적인 대가였으나, 한신은 신음 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흙바닥을 뒹굴며 엄살을 부렸다.
“아이고, 나리! 죽습니더! 살려주이소!”
“한심한 쥐새끼 같은 놈. 한 번만 더 밤늦게 밖에서 알짱거리다 걸리면 그땐 이 채찍으로 가죽을 벗겨내겠다.”
번호는 코방귀를 끼며 돌아섰다. 그가 멀어져가는 순간, 흙바닥에 엎드려 있던 한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눈동자 속에서 바보스러운 공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차갑고 무거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 삼베 붕대가 감긴 오른손이 흙바닥의 돌멩이를 으스러뜨릴 듯 꽉 쥐어졌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힘을 드러내면 분타 전체가 움직이고, 사부님의 유해를 지킬 수 없다…….’
한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은 소년은 오막살이 안으로 기어들어 가 문을 걸어 잠갔다. 방 한구석, 삼베 조각으로 정성스럽게 감싸인 사부의 유해 항아리가 고요히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쾅! 쾅! 쾅!
갑자기 멀리 광부들의 공동 막사 쪽에서 문짝이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석탄곡의 밤공기를 찢었다. 이어 횃불을 든 항산파 간수들의 거친 고함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신은 급히 창틀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번호가 간수들을 이끌고 광부들의 막사를 거칠게 뒤지고 있었다.
“전부 밖으로 나와! 무림맹의 지령이다! 석탄곡 내부에 마교의 첩자가 숨어들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지금부터 모든 막사와 개인 소지품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겠다!”
번호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간수들은 광부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내어 매질을 가하고 있었고, 그들의 발걸음은 점차 한신이 있는 외곽 오막살이를 향해 좁혀져 오고 있었다.
유해 항아리 바닥에는 오악동맹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문파의 비전 구결이 새겨져 있었다. 만약 항아리가 저들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정이었다.
간수들의 거친 군화 소리가 오막살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한신의 눈빛이 재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처럼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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