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학살
안개 숲(Mist Forest)의 대기는 축축하고 비린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미로 속에서, 사방을 메운 백색의 장막은 한 치 앞의 시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바스락.
낙엽이 젖은 흙에 눌리는 나직한 소리와 함께, 가죽 갑옷을 걸친 사내들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자는 철검문의 순찰대장 마철두(Ma Cheol-du)였다. 애꾸눈을 험악하게 찌푸린 그는 품속에서 황동으로 만든 특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기맥의 미세한 흐름을 추적하는 법보였으나, 현재 그 침은 마치 미친 짐승처럼 사방으로 회전하고만 있었다.
“빌어먹을! 자철석 기운이 너무 강해 침이 돌지 않는구나. 갈풍 놈이 이딴 죽음의 숲에 그 기형 검객이 숨어들었다고 장담하더니, 사람을 아주 사지로 밀어 넣는군.”
마철두가 웅얼거리며 침을 뱉었다. 그의 손에 쥔 사슬 끝에는 흑호방이 자랑하는 사나운 기맥 추적견, 흑랑이 침을 흘리며 안개 속을 향해 콧김을 뿜고 있었다. 녀석의 코끝은 자철석의 방해 속에서도 소백이 흘린 미세한 역기맥의 흔적을 쫓아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같은 시각, 안개 숲 외곽의 습한 암반 지대.
서태경은 이끼 낀 거대한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낡고 검은 안대로 굳게 가려져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태경은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낙엽송의 젖은 솔향도, 안개에 섞인 흙내음도 이미 그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거세된 지 오래였다. 뇌 과부하를 막기 위해 장 노인이 지어준 비약의 독성이 그의 후각을 영구히 앗아간 대가였다. 배칠성의 뜨거운 찻물 기습에 데어 붉고 흉하게 굳은 왼쪽 뺨과 목덜미의 화상 딱지만이 습한 대기 속에서 욱신거리며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태경은 손에 쥔 개량된 대나무 지팡이, 청풍죽(Cheongpung-juk)의 끝을 땅에 가볍게 두드렸다.
톡.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음파와 지면의 떨림이 대나무 마디를 타고 그의 손바닥 신경으로 고스란히 역류했다. *풍안청청(Wind Eye Clarity)*의 심안이 개안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안개 숲의 뒤틀린 고목들, 젖은 흙바닥의 경사, 그리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철두 일당의 뼈와 관절의 움직임이 흑백의 정교한 입체 도면으로 재구성되었다.
‘열두 명. 마철두의 보폭은 이 자들의 평균보다 사 푼 넓다. 오른쪽 다리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군. 기맥견의 박동 소리가 소백이의 은신처 방향으로 빨라지고 있다.’
태경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도가 정심 호흡법을 운기해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두통의 열기를 가라앉혔. 그리고 마차 옆에 대기하고 있던 거지 소년 혁이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혁이야. 바람이 동쪽으로 불기 시작할 때, 약방에서 가져온 독초 가루를 살포하거라.”
“예, 서 선생.”
안개 숲 깊은 곳, 거대한 고목의 굵은 가지 위에 설소백(Seol So-baek)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돌쇠가 단조해 준 역근 편형검, 묵풍검의 자루를 굳게 쥐고 있었다. 검신에 서린 미세한 청강석의 푸른 자력이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명멸했다.
소백은 스승이 가르쳐준 *안개 숲 보법 규칙(Mist Forest Footwork Rules)*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나무의 동쪽에만 자라는 붉은 이끼의 결을 따라 세 걸음, 지면의 경사가 아래로 삼 도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라.’
그는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오히려 바람의 온도 변화와 발끝에 닿는 흙의 기울기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느껴졌다. 소백은 붉은 이끼가 자란 고목의 가지를 딛고,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풍신경의 호흡을 유지하며 소리 없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하산했다.
그때, 마철두의 기맥견이 소백의 하산 기척을 감지하고 안개 속을 향해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크르르... 왕! 왕!”
“찾았다! 저쪽이다! 모두 검을 뽑아라!”
마철두가 외치며 사슬을 풀었다. 기맥견 흑랑이 안개 속을 뚫고 야수처럼 소백의 목덜미를 향해 뛰어올랐다. 날카로운 이빨이 소백의 가슴팍에 닿기 직전의 찰나.
동풍이 불어왔다.
숲 외곽에서 태경의 지시를 받은 혁이가 살포한 흑호산 독초 가루가 안개를 타고 밀려들었다. 미세한 가루가 기맥견의 예민한 코끝과 눈에 닿는 순간, 녀석은 맹렬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고꾸라졌다.
“끼우우웅! 깽!”
독초의 독성에 미쳐버린 기맥견은 제어력을 잃고 오히려 자신을 부리던 마철두의 부하들의 목덜미를 사납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동물의 광폭화에 적들의 대열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이 개새끼가 미쳤나! 당장 쳐내라!”
마철두가 횃불을 높이 들어 안개를 걷으려 했으나, 자욱한 습기와 독초 가루가 뒤섞인 안개 숲의 기류는 횃불의 불꽃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칙,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전장은 완벽한 암흑과 백색의 혼돈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금이다, 소백아. 낙엽을 흩뿌려라.”
안개 속에서 울려 퍼지는 태경의 나직한 전음이 소백의 귀에 꽂혔다.
소백의 몸 안에서 역기맥의 기운이 척추 뼈의 뒤틀린 틈새를 타고 거꾸로 솟구쳤다. 득, 드득, 하는 기괴한 관절 파열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안개 속에서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가볍게 솟구쳤다.
*낙엽만천(Scattered Falling Leaves).*
소백이 묵풍검을 휘두르는 순간, 검 끝이 사방으로 흔들리며 안개 속에 수십 개의 푸른 환영을 만들어냈다. 진짜 검로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절망적인 교란이었다.
슥! 서걱!
“억! 어디서...!”
“내 다리가...!”
아무런 파공음도 없이, 안개 속에서 사내들의 목줄기와 발목 경맥이 차례로 끊겨 나갔다. 선혈이 백색의 안개 위로 붉은 꽃처럼 비산했다가 낙엽 위로 뚝뚝 떨어졌다. 소백은 붉은 이끼의 결만을 밟으며, 적들이 비명을 지르는 방향의 사각지대로 유령처럼 스며들어 숨통을 끊었다.
마철두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부하들의 비명 소리에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나와라! 이 쥐새끼 같은 놈! 정면으로 승부하자!”
마철두가 평생을 수련한 철검문의 정종 내력을 검신에 가득 주입했다. 그의 무거운 검 끝에 흑철색 강기가 서리며 주변의 안개를 강하게 밀쳐냈다. 그는 살기가 느껴지는 전방을 향해 철검문의 비전 절초, *철검 붕산격(Iron Sword Mountain Splitter)*을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무거운 쇠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가공할 중압감이 소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소백은 피할 틈을 찾지 못하고 묵풍검을 들어 정면으로 그 일격을 받아냈다.
깡!
무시무시한 내력의 충격이 소백의 어깨 관절을 강타했다. 청강석의 뛰어난 탄성 덕분에 묵풍검이 부러지지는 않았으나, 검신이 반원 모양으로 휘어지며 소백의 몸을 뒤로 강하게 퉁겨냈다.
“컥!”
소백은 바닥을 구르며 안개 속의 맹독 안개를 소량 흡입했다. 가슴속 경맥이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한독(寒毒)이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수련용 삼베 도복이 찢겨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다. 손목 경맥에는 가벼운 찰과상과 함께 마비 증세가 찾아왔다. 일류 고수의 문턱에 선 마철두의 정면 타격은 삼류 검사였던 소백이 감당하기에 여전히 무거웠다.
마철두가 애꾸눈을 번뜩이며 잔인하게 웃었다.
“하하하! 쥐새끼 놈, 겨우 이 정도냐! 내 검은 네 놈의 비열한 쾌검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다시 검을 치켜들며 수직으로 소백의 심장을 내리찍으려 진격했다.
그 순간, 안개 숲 외곽에서 청풍죽 지팡이 끝이 대지를 가볍게 때리는 진동음이 소백의 발바닥을 타고 그의 뇌리로 곧바로 전달되었다. 지팡이의 울림 속에 태경의 차갑고 명확한 전술 가이드가 실려 있었다.
‘소백아, 당황하지 마라. 마철두는 오른쪽 다리에 하중을 싣고 검 끝을 수직으로 내리누르는 직선의 궤적만을 고집한다. 뼈의 탄성을 뒤틀어 그의 칼날 측면을 가볍게 비껴 흘려라. 그리고 검이 지면에 박히는 0.1초의 공백기, 그의 왼쪽 겨드랑이 밑 삼 리(三里)의 혈도를 찔러라.’
스승의 목소리는 소백의 불타는 기맥을 진정시키는 양생의 비약이었다.
소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철두가 뿜어내는 검기의 웅장한 바람 소리가 귀에 또렷이 박혔다.
쉬이이익!
철검 붕산격의 묵직한 칼날이 소백의 이마를 가르며 떨어지는 순간, 소백은 상체를 기괴한 각도로 뒤로 꺾었다. 그의 뒤틀린 척추뼈가 스프링처럼 수축했다가 옆으로 퉁겨 나갔다.
채앵!
묵풍검의 휘어지는 날이 마철두의 철검 측면을 가볍게 긁고 지나갔다. 정면 충돌이 아닌, 완벽한 각도에서의 흘리기였다. 마철두의 무거운 검강은 힘의 방향을 잃고 소백의 옆 진흙 바닥을 깊숙이 폭사시켰다.
쿠우웅!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는 찰나, 마철두의 검이 땅에 박혀 거두어지지 않는 단 0.1초의 호흡 공백이 발생했다.
소백의 신형이 역기맥의 탄성을 타고 전방으로 쾌속하게 미끄러졌다. 그의 손에 쥔 묵풍검의 끝이 뱀의 혀처럼 기이한 원호를 그리며 솟구쳤다.
*역린일참(Inverted Scale Slash).*
서걱!
마철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왼쪽 겨드랑이 밑 살갗이 깊숙이 찢어지며 분수 같은 선혈이 안개 속으로 흩뿌려졌다. 어깨 관절의 경맥이 완벽하게 파열되어 그의 왼팔이 맥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아아악! 내 팔이! 내 팔이!”
마철두는 부하들의 참혹한 시신과 자신의 피 흘리는 어깨를 번갈아 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자신들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사냥한 괴물의 존재 앞에, 그의 오만한 일류 무사의 기세는 완벽히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는 부러진 칼자루를 버려둔 채, 비명을 지르며 안개 숲 외곽을 향해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백은 묵풍검을 거두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팍은 한독의 기운으로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으나, 안대 뒤에 가려진 스승의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며 검을 굳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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