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의 소문, 뒤바뀐 덫
태경이 부러진 지팡이 끝을 땅에 지그시 누르자, 밤바람을 타고 흘러온 비열한 웃음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자멸의 검로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어둠은 맹인에게 가장 친숙한 영토였으나, 오늘 밤의 어둠은 유독 시리고 무거웠다. 낙엽헌 뒷방의 차가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서태경은 자신의 왼쪽 뺨과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배칠성이 지른 뜨거운 찻물에 데어 붉게 진물이 흐르던 화상 상처는 단단한 딱지로 굳어 가고 있었지만, 심장 박동이 빨라질 때마다 맥박을 타고 욱신거리는 극통을 유발했다.
그러나 그 고통보다 태경을 더 쓸쓸하게 만든 것은 감각의 상실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은은한 낙엽차의 잎 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장 노인이 조제해 준 정신 안정 비약의 독성이 그의 뇌 신경을 진정시키는 대가로 후각을 완전히 앗아간 것이다.
태경은 보이지 않는 눈 대신 귀를 기울였다. 지팡이 청풍죽(Cheongpung-juk)의 끝이 바닥의 미세한 떨림을 고스란히 손끝으로 전달해 왔다. 대로변 너머, 질척이는 진흙 길을 걸어가는 불규칙한 걸음걸이가 포착되었다.
스스슥, 터벅. 비틀.
‘분당 심박수 여든여섯 번. 왼쪽 발끝이 바깥으로 삼 도가량 벌어져 진흙을 깊게 밟는 소리. 그리고 품속에서 들리는 둔탁한 금속의 마찰음.’
태경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즉각적으로 신원을 도출해 냈다. 소백의 숙부이자 지독한 노름꾼인 설만강(Seol Man-gang)이었다. 그의 품에서 나는 소리는 일반 엽전의 가벼운 소리가 아니었다. 흑호방 본영에서만 특별히 주조하여 고리대금업과 도박장에서 유통하는, 납을 섞어 묵직하게 만든 특제 은화 주머니의 소리였다.
가난한 노름꾼의 품에서 나선 안 될 둔탁한 은화 소리. 그것은 단 하나의 진실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신(Betrayal)이었다.
* *
다음 날 아침, 낙엽촌의 안개는 평소보다 자욱했다. 태경이 낙엽헌의 문을 열고 빗자루질을 시작하기도 전에, 찻집 옆 골목길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 선생, 계셔요?”
나지막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마을 빨래터의 터줏대감이자 태경의 귀중한 정보원인 춘자(Chun-ja)였다. 그녀는 빨래 방망이를 품에 안은 채 주위를 기민하게 살피며 찻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곧이어 옆집 주막의 여주인 평양댁(Pyeongyang-daek) 역시 행주를 어깨에 걸친 채 은밀히 합류했다.
“춘자 낭자, 평양댁 형님. 이른 아침부터 어찌 이리 급히 걸어오셨습니까.”
태경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부러진 청풍죽 지팡이를 짚고 그들을 맞이했다. 춘자가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며 입을 열었다.
“어제 밤늦게 빨래터 옆 흑호방 무사들 사택에서 기이한 소리를 들었어요. 방파의 선풍대원들이 밤새도록 쇠사슬과 도날을 숫돌에 갈아대며 아주 신이 났더라고요. 흑호곡(Heukho Valley)으로 ‘큰 사냥’을 나간다면서, 이번에야말로 그 기형적인 검객 놈의 사지를 꺾어놓겠다고 낄낄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습니다.”
평양댁이 춘자의 말을 받아 들이쉬듯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니네, 서생. 어제 도박장 빚 때문에 손가락이 잘려 나간다던 설만강이 놈이, 하룻밤 사이에 은화 오십 냥을 한 번에 갚고도 돈자루를 흔들며 거드름을 피웠다더군. 주막에서 독한 고량주를 들이켜며 ‘조카놈 덕에 횡재했다’고 떠벌리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네. 아무래도 그 인간 말종이 소백이의 비밀을 흑호방에 팔아넘긴 게 분명해!”
춘자와 평양댁의 보고를 듣는 동안, 태경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안대 뒤에서 그의 이성은 얼음처럼 차갑고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만강의 도박 빚을 고의로 조작해 늘려놓은 흑호방의 책사 갈풍(Gal Pung). 그리고 빚 독촉에 몰려 혈육의 비수를 쥐고 기어 나온 설만강. 모든 것이 갈풍이 설계한 비열한 판이었고, 그들은 이제 소백의 목을 꺾기 위해 흑호곡으로 살수들을 배치하려 하고 있었다.
“춘자 낭자, 평양댁 형님. 귀중한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태경은 품속에서 소박한 엽전(Copper Coins) 몇 푼을 꺼내 두 여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인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남기고 찻집을 빠져나간 직후, 뒷방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설소백이 걸어 나왔.
“스승님! 숙부님이... 어떻게 숙부님이 저와 제 가문을 이토록 처참하게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소백의 목소리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찢어질 듯 떨리고 있었다. 묵풍검을 쥔 그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고, 역기맥의 기운이 분노를 타고 척추뼈 틈새로 폭주하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칼을 거두어라, 소백아.”
태경의 음성은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는 부러진 청풍죽 지팡이 끝으로 소백의 떨리는 검날을 가볍게 톡, 쳤다. 미세한 진동이 소백의 손목 경맥을 자극하자, 폭주하려던 기혈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숙부놈이 흑호방에 정보를 넘겼습니다! 오늘 밤 흑호곡으로 살수들이 들이닥칠 텐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당장 가문 무덤을 더럽힌 그 인간을 찾아가 검으로 응징하겠습니다!”
“분노는 검로를 흐트러뜨리는 지독한 독약일 뿐이다. 삼류 검객의 개죽음이 네 가문의 원수를 갚는 길이라 생각하느냐.”
태경의 서늘한 일침에 소백은 입을 다물었다. 태경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소백의 앞으로 다가섰다.
“갈풍은 의심이 많은 책사다. 설만강이 가져온 정보를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덫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중으로 검증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의심의 틈새를 파고들어, 그들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걸어 들어가게 만들면 된다.”
“...무덤이라 하심은?”
태경은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흑호곡 뒤편을 둘러싼 울창한 미로, 안개 숲(Mist Forest)을 기억하느냐.”
소백의 눈동자가 커졌다. 안개 숲은 사시사철 자철석 광산의 기운이 흘러 나침반이 완전히 마비되고, 맹독성 안개가 깔려 방향 감각을 잃기 쉬운 천혜의 금지 구역이었다. 일반적인 무인들은 발을 들이는 것조차 꺼리는 죽음의 미로였다.
“소백아, 너는 이미 나와 함께 안개 숲 보법 규칙(Mist Forest Footwork Rules)을 훈련했다. 바람의 온도 차이와 고목의 이끼 방향만으로 방위를 가늠하는 법을 말이다. 그곳은 너에게 가장 완벽한 홈그라운드이자, 적들에게는 아사(餓死)의 함정이 될 것이다.”
태경은 지팡이 끝으로 방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설만강이 오늘 낮, 다시 한번 낙엽헌 주변을 서성거리며 정보를 캐내려 들 것이다. 소백아, 내 지시에 따라 연기를 시작하거라. 혈육의 비수를 역으로 쥐고, 갈풍의 심장을 찌를 역정보를 직접 던져줄 차례다.”
* *
정오 무렵, 낙엽촌 장터의 열기가 찻집 낙엽헌의 창호지 너머로 나른하게 번지고 있었다.
태경은 낙엽헌 뒷방의 창문을 미세하게 열어둔 채, 소백과 함께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심음 감청술’을 극도로 가동한 태경의 귀에, 찻집 뒷마당 담벼락 밑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든 비루한 호흡 소리가 포착되었다.
‘왔군. 설만강.’
태경은 미세하게 눈짓을 보냈다. 소백은 침을 꿀꺽 삼키며, 미리 약속된 대로 목소리 톤을 약간 높여 다급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스승님! 흑호방의 순찰 주기가 흑호곡 근처까지 좁혀졌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서 역기맥 수련을 진행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마당 담벼락 밑, 낙엽 더미 뒤에 숨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설만강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흙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숨을 죽였다.
태경이 찻잔을 탁자에 가볍게 내려놓으며 묵직하고도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련 장소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다행히 흑호곡 입구 너머의 안개 숲(Mist Forest) 깊은 곳에 자철석이 깔린 공터가 있더구나. 그곳은 자력의 기운이 강해 적들의 기맥 감지망을 완벽히 교란할 수 있고, 맹독성 안개 덕에 흑호방 무사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한다.”
“안개 숲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곳은 나침반도 통하지 않는 미로인데... 어찌 그곳에서 길을 찾는단 말입니까?”
소백의 연기는 우직하고도 자연스러웠다. 태경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내가 장서각에서 외운 도가의 비전 중, 안개 숲 보법 규칙(Mist Forest Footwork Rules)이 있다. 나무의 동쪽에만 자라는 붉은 이끼의 결을 따라 세 걸음 걷고, 지면의 경사가 아래로 삼 도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내달리면 미로를 완벽히 돌파할 수 있지. 오늘 밤 삼경(三更), 그곳의 가장 깊은 자철석 공터에서 역기맥근골법의 2차 타통 수련을 진행할 것이다. 목패와 묵풍검을 모두 챙겨 그곳으로 이동하거라.”
“예, 스승님! 오늘 밤 삼경, 안개 숲 깊은 곳에서 뵙겠습니다!”
담벼락 밑에서 이 모든 대화를 훔쳐듣고 있던 설만강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안개 숲! 흑호곡이 아니라 안개 숲 삼경이 진짜 수련처였구나! 붉은 이끼를 따라 걷고 지면의 경사로 길을 찾는 보법 규칙까지...!’
설만강은 자신이 천하의 비밀을 독점했다는 극도의 희열에 휩싸였다. 그는 갈풍이 자신에게 준 은화 열 냥이 떠올랐다. 이 가짜 수련처 정보를 가져다주면, 갈풍은 자신에게 더 큰 황금을 쥐여줄 것이 분명했다.
설만강은 흙먼지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네 발로 기어 담벼락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흑호방 본영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
낙엽헌 지붕 위, 낡은 기와 틈새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거지 소년 혁이(Hyeok-i)가 그 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혁이는 품속에서 태경이 만들어 준 작은 암호용 호루라기를 만지작거리며, 설만강이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동선과 방향을 정확하게 눈으로 쫓았다.
“쥐새끼 한 마리가 덫을 향해 뛰어가는군.”
혁이는 소리 없이 지붕을 타고 넘어가며, 골목 모퉁이에 대기하고 있던 서당 아이 돌이(Dol-i)에게 신호를 보냈다. 돌이는 숯 조각을 들어 마을 담벼락에 기이한 소용돌이 문양(안개 숲 유인 개시)을 정교하게 그려 넣었다.
낙엽헌 뒷방의 태경은 부러진 청풍죽 지팡이를 가볍게 짚고 창가로 다가섰다. 후각을 잃어 흙먼지의 냄새도, 가을 안개의 쓸쓸한 향취도 맡을 수 없었지만, 그의 귀에는 마을 담벼락에 숯이 긁히는 소리와 흑호방 본영에서 무사들이 무기를 챙겨 안개 숲 방향으로 분산 이동하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또렷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뒤바뀐 사냥터. 갈풍과 그의 정예 살수들은 자신들이 대어를 낚으러 간다고 확신하겠지만, 실제로는 맹인이 정교하게 설계한 보이지 않는 자멸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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