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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풍(墨風)의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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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서리가 내려앉은 낙엽헌의 뒷방에는 지독한 화독(火毒)의 열기와 쓸쓸한 묵향이 뒤섞여 감돌고 있었다.


설예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찬물에 적신 삼베 천이 서태경의 왼쪽 뺨과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진물이 흐르는 붉은 화상 자국 위로 매서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배칠성이 고의로 쏟아부은 끓는 찻물은 태경의 살가죽을 가차 없이 삼켜버렸으나, 정작 당사자인 태경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은 채 꼿꼿이 앉아 있었다.


안대 뒤로 느껴지는 통증은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태경의 이성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만 머릿속 서고의 구석에서 동료들의 얼굴이 담긴 책장의 책등이 미세하게 흐릿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후각마저 무뎌져 코앞에 둔 독초의 쓴 냄새조차 희미했다. 육체의 감각을 지워내며 기억을 지켜내는 처절한 등가교환. 태경은 가만히 품속에 든 동료들의 잿가루 주머니를 손끝으로 움켜쥐었다.


그때, 뒷방의 낡은 목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들어선 이는 설소백이었다. 그의 손에는 흑호곡에서 나무를 베다 급히 달려온 흔적인 도끼와, 이가 사정없이 빠지고 비틀려버린 삼류 철검이 들려 있었다.


소백은 스승의 붉게 익어버린 얼굴과 목덜미를 보는 순간, 들고 있던 철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하는 쇳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찢었다. 소백의 정직하고 순박한 눈망울에 순식간에 핏발이 섰다. 주먹을 쥔 그의 손끝이 분노로 사정없이 떨렸다.


"스승님... 제 나약함 때문에... 저 개만도 못한 흑호방 놈들이 감히 스승님을...!"


소백의 목소리가 끓어오르는 살기로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묵풍검을 들고 흑호방 본영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러나 태경은 뺨의 천을 지그시 누르며 나직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분노는 검로를 흐리게 할 뿐이다, 소백아. 이것은 갈풍의 의심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내가 기꺼이 치러야 할 대가였을 뿐이니라. 그들의 눈을 완벽히 가렸으니, 이제 우리가 움직일 차례다. 그보다 네 검을 보여다오."


소백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철검을 주워 태경의 앞에 바쳤다. 태경은 보이지 않는 손끝으로 검날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검신 곳곳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고, 칼날은 탄성을 이기지 못해 기이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역시... 네 몸은 정상적인 기맥의 흐름과 반대로 움직이는 특이 체질이다. 역기맥근골법(Reverse Qi-Vein Method)의 그 폭발적인 수축과 탄성은, 장터에서 파는 평범한 무쇠 철검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네 뼈의 탄성이 검을 안에서부터 부러뜨리거나, 역으로 네 손목 경맥을 찢어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검을 쓸 수 없는 것입니까?"


소백의 목소리에 깊은 절망이 서렸다. 기껏 기맥을 뚫어 힘의 기틀을 마련했거늘, 무기가 육체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니.


태경은 대답 대신 바닥에 놓여 있던 대나무 지팡이 청풍죽(Cheongpung-juk)을 쥐었다. 비록 배칠성의 기습으로 미세한 균열이 더 벌어졌으나, 지팡이 끝은 여전히 태경의 정교한 손이 되어주었다. 태경은 지팡이 끝으로 뒷방의 흙바닥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기이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스슥, 슥.


지팡이 끝이 지나간 자리에 정교한 검의 도면이 그려졌다. 칼날의 중심은 얇고 가벼우나 무게중심이 칼끝에 극단적으로 쏠려 있는 구조. 마치 거대한 단풍잎이나 뱀의 혀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편형검(Flex Sword)의 형태였다.


"이 검은 네 기형 골격의 탄성을 100% 받아내어 휘어졌다 펴질 수 있도록 설계된 검이다. 검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적의 사각지대를 타격하되, 내력을 주입하는 순간 강철보다 단단하게 펴져 적의 무기를 부러뜨릴 것이다. 이것이 네가 완성해야 할 필살 초식, 역린일참(Inverted Scale Slash)의 진정한 그릇이다."


소백은 바닥에 그려진 기상천외한 설계도를 보며 침을 삼켰다. 강호의 그 어떤 문파에서도 본 적 없는 변칙의 병기였다.


"낙엽촌 대장간의 돌쇠(Dol-soe)를 찾아가거라. 그에게 내가 보낸 설계도라 전하고, 우리가 흑호산 폐광에서 극비리에 확보해 둔 청강석(Blue Steel Ore)을 건네며 야간 주조를 의뢰하거라. 검의 이름은 묵풍(墨風)이라 하거라. 먹향처럼 어둠 속에 숨어 고요하되, 바람처럼 매서운 변칙의 검이다."


소백은 태경의 지시를 가슴 깊이 새기며 흙바닥의 도면을 머릿속에 각인했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깔린 밤, 품속에 청강석 원석을 품은 채 흑호방의 야간 통행 금지령을 피해 대장간으로 은밀히 향했다.


낙엽촌 외곽의 낡은 대장간. 화로의 붉은 불빛이 창문 틈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백이 어둠을 틈타 대장간 문을 두드리자, 거구의 대장장이 돌쇠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소백은 태경의 지시대로 흙바닥에 그렸던 설계도의 비율을 설명하며 청강석을 건넸다.


돌쇠는 청강석의 푸른 광채와 소백이 설명하는 검의 구조를 번갈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이건 보통 대장장이나 삼류 무사가 고안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뼈의 탄성을 이용해 검을 휘두른다고? 쇠의 인장 강도와 곡률 배분이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해. 네 뒤에 있는 그 눈먼 점소이 서생... 진짜 정체가 대체 뭐냐?"


돌쇠는 태경의 설계도에 담긴 정교한 물리적 역학 구조를 보며 그가 단순한 맹인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러나 돌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이 강호의 의리였고, 태경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좋다. 내 평생 이런 기이한 쇠질은 처음이지만, 내 모든 기술을 쏟아부어 주마. 다만, 청강석을 녹이려면 화로의 온도를 극한으로 올려야 한다. 밤중에 대장간 굴뚝으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를 텐데, 흑호방 순찰대 놈들의 눈을 피하는 게 문제로군."


돌쇠는 즉시 화로에 석탄을 가득 채우고 풀무질을 시작했다. 푸른빛을 띠는 청강석이 뜨거운 화염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대장간 내부가 푸른 신비로운 불꽃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돌쇠의 우려대로, 대장간 굴뚝을 통해 미세한 푸른 연기가 밤하늘로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장간 외곽 갈대밭 너머로 횃불의 불빛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흑호방의 야간 순찰 무사들이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연기를 포착한 것이었다.


"어이! 이 밤중에 대장간에서 무슨 쇠질이냐! 당장 문 열어라!"


거친 고함과 함께 대장간 나무 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소백은 즉시 청강석의 푸른 빛이 닿지 않는 대장간 한구석의 어두운 석탄 더미 뒤로 신형을 숨겼다. 숨을 죽인 소백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아직 역기맥이 완벽히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류 무사들과 정면 충돌하는 것은 자멸이었다.


돌쇠는 침착하게 달구어진 청강석을 재빨리 화로 깊숙이 숨기고, 대신 옆에 있던 녹슨 무쇠 농기구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쇠망치를 어깨에 멘 채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이 밤중에 남의 일터를 깨부수려 드는 거냐!"


돌쇠의 거구와 뿜어져 나오는 험악한 기세에 문앞에 서 있던 흑호방 무사들이 주춤했다. 순찰 조장은 코를 찡그리며 대장간 내부를 훑어보았다.


"이 밤중에 왜 화로를 돌리는 거지? 게다가 굴뚝으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던데, 대체 뭘 주조하고 있는 거냐?"


"하! 푸른 연기? 이 무식한 놈들아, 녹슨 가마솥이랑 밭갈이 보습을 같이 녹여봐라! 쇠에 낀 이끼랑 불순물이 타면서 푸른 연기가 나는 것도 모르냐? 사흘 뒤에 흑호방에 바칠 상납금 마련하려면 밤낮으로 농기구라도 고쳐 팔아야 할 것 아니냐!"


돌쇠는 쇠망치로 바닥의 무쇠 보습을 쾅 내리치며 윽박질렀다. 그의 단단한 완력과 퉁명스러운 배짱에 무사들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조장은 대장간 구석구석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색하려 했으나, 돌쇠가 거대한 몸집으로 앞을 가로막자 결국 혀를 찼다.


"쳇, 쓸데없이 기운 빼지 마라. 사흘 뒤에 상납금 한 푼이라도 부족하면 이 대장간을 통째로 흑호산맥 들개 먹이로 던져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무사들은 침을 뱉으며 대장간 문을 닫고 멀어졌다. 소백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쇠의 임기응변 덕분에 최악의 발각 위기는 넘겼으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휴, 쥐새끼 같은 놈들... 소백아, 서둘러야겠다. 저놈들이 다시 의심을 품고 돌아오기 전에 검의 기틀을 잡아야 해."


돌쇠는 다시 화로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청강석을 꺼내 모루 위에 올려놓았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기이한 광채가 대장간 내부를 비추었다. 돌쇠가 거대한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


딩-! 딩-!


맑고 묵직한 쇳소리가 대장간 내부에 울려 퍼졌다. 소백은 그 망치질 소리에 맞춰 자신의 역기맥 호흡을 조율했다. 망치가 청강석을 때릴 때마다, 푸른 불꽃 잔상이 소백의 눈동자에 각인되며 묵풍검의 기이한 형태가 서서히 잡혀가기 시작했다. 밤샘 수련의 피로와 화로의 열기가 소백의 온몸을 적셨지만, 소백은 검 끝에 서리는 푸른 기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신이 마침내 뱀의 혀처럼 정교한 편형의 곡선을 그리며 완성되어 가던 바로 그 순간.


대장간 창문 너머로,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삼엄하고 묵직한 발소리들이 갈대밭을 밟으며 조여들기 시작했다. 횃불의 붉은 그림자들이 창살 틈새로 기괴하게 흔들리며 대장간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단순한 말단 무사들의 순찰이 아니었다. 살기등등한 흑호방 정예 무사들의 기척이었다.


돌쇠의 허공에 머물러 있던 망치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소백의 호흡이 쩍 멈추었다. 대장간을 집어삼킬 듯한 침묵 속에서, 횃불의 기척이 문앞에 멈춰 섰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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