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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 위에 쏟아진 찻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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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을 더 복용하면 네 머릿속의 소중한 기억들이 영구히 지워질 게다! 그 장서각의 비급들도, 죽은 동료들의 얼굴도 전부 다!"


장 노인의 그 서슬 퍼런 경고는 며칠이 지난 지금도 서태경의 귓가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낙엽촌 모퉁이에 자리한 허름한 찻집, 낙엽헌(Nakyeop-heon). 이른 아침의 차가운 안개가 창틈으로 스며드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태경은 거친 삼베옷 소매를 걷어붙인 채 낡은 목조 탁자를 행주로 묵묵히 닦아내고 있었다. 두 눈을 가린 검은 안대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그의 하얗게 질린 뺨과 이마에는 식은땀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지난밤 겪었던 지독한 뇌 과부하(Brain Overload) 발작의 여파였다.


태경은 손끝으로 탁자의 거친 나뭇결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주방에서 끓고 있는 야생 찻잎의 쌉싸름한 향기가 평소보다 희미하게 느껴졌다. 장 노인의 비약이 뇌 신경의 폭주를 가라앉히는 대가로 그의 후각과 미각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억의 서고를 지키기 위해 육체의 감각을 등가교환으로 내던지는 처절한 형벌.


스스슥, 스스슥.


주방 구석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고아 소년 개똥이(Gae-ttong-i)가 태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태경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신 거지요? 지난밤에 장 할아버지가 다녀가실 때 형님이 피를 너무 많이 토하셔서 소백이 형이랑 저랑 정말 간이 콩알만 해졌단 말입니다."


"괜찮단다, 개똥아. 그저 환절기라 기관지가 잠시 상한 것뿐이야. 소백이는 어디 갔느냐?"


태경은 온화하게 웃으며 행주를 짰다. 내력이 전혀 없는 그의 목소리는 평범한 서생의 그것처럼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소백이 형님은 아침 일찍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습니다. 요즘 흑호방 무사들이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강화하는 바람에 장터로 내려오지 못하고 뒤편 흑호곡 근처에서만 맴돌고 계셔요."


태경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머릿속의 연산 장치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소백이가 역기맥 1차 타통에 성공한 이후, 그의 신형과 보법은 확실히 달라졌다. 흑호방의 책사인 갈풍(Gal Pung)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갈풍은 의심이 많고 교활한 뱀 같은 자였다. 소백의 기이한 성장에 의구심을 품고 분명 낙엽헌을 향해 은밀한 칼날을 들이밀 터였다.


딸랑.


찻집 문에 매달린 낡은 구리 종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순간, 태경의 전신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지팡이가 없는 상태였지만, 그의 발바닥은 바닥재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침입자의 체중을 읽어냈다.


'심음 감청술(Heartbeat Listening Technique) 가동.'


두두두두. 분당 일흔여섯 번. 걸음걸이가 가볍지만 발끝이 안쪽으로 살짝 굽어 있다. 삼류 경공을 익힌 자의 전형적인 보법이었다. 게다가 그의 옷자락에서는 찻집 손님들에게서는 날 수 없는 미세한 화약 냄새와 쇠붙이의 피비린내가 풍겼다. 평범한 약초꾼이나 주민이 아니었다.


"어이, 점소이! 문을 열었으면 손님을 맞아야지, 왜 멍하니 서 있는 게냐?"


주근깨가 가득하고 비열한 미소를 지은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가장 중앙에 위치한 탁자를 거칠게 두드렸다. 흑호방의 잠입 밀정, 배칠성(Bae Chil-seong)이었다. 갈풍의 지령을 받고 태경이 진짜 맹인인지, 혹은 소백의 배후에 숨은 고수인지 시험하기 위해 파견된 사냥개였다.


태경은 즉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겁에 질린 눈먼 점소이의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연기를 시작했다.


"아, 아이고! 손님, 어서 오십시오! 눈이 어둡다 보니 손님이 들어오시는 것도 미처 몰랐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흥, 눈먼 놈이 찻집 일을 한다더니 정말이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 낙엽헌에서 가장 뜨겁게 끓인 차를 한 잔 가져와 봐라. 뼈마디가 시려서 말이다."


배칠성은 탁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품속에서 손가락 크기의 작은 단검을 꺼내 손톱을 깎는 척하며 태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그의 안광에는 독사 같은 의심이 서려 있었다.


태경은 주방으로 향했다. 화로 위에서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의 물을 국자로 떠서 찻잔에 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찻잔을 쟁반에 올린 태경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배칠성의 탁자로 향했다. 일부러 지팡이 없이 벽을 더듬으며 걷는 시늉을 했다.


배칠성은 태경이 다가오는 궤적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리고 태경이 탁자 앞 두 걸음 거리에 도달했을 때, 배칠성이 은밀하게 자신의 오른쪽 발을 뻗어 태경의 동선 한가운데에 걸치듯 놓았다.


태경의 풍안청청(Wind Eye Clarity) 감각이 대기의 흐름 변화를 포착했다. 발끝에 닿기 직전의 공기 저항, 그리고 배칠성의 미세한 호흡 정지.


'발을 걸었군.'


태경의 뇌 속 연산 장치가 찰나의 순간에 수백 가지 경로를 도출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피해 가거나 균형을 잡으면, 맹인이 아님을 들키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부자연스럽게 넘어지면 기합(내력)의 흔적이 발각된다. 완벽한 일반인 맹인처럼 넘어져야 한다.'


태경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왼쪽 발끝을 배칠성의 구두코에 가볍게 걸리게 만들었다.


"앗!"


태경은 비명과 함께 무게중심을 완전히 잃고 앞으로 엎어졌다. 콰당! 소리와 함께 찻잔이 담긴 쟁반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태경은 바닥을 구르며 낡은 탁자 다리에 어깨를 세차게 부딪쳤다.


쨍그랑!


찻잔이 박살 나며 펄펄 끓는 뜨거운 찻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중 일부가 배칠성의 바지 가랑이 위로 쏟아졌다.


"으아악! 뜨거워! 이 눈먼 개새끼가 정말 미쳤나!"


배칠성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뜨거운 물을 털어내며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태경은 바닥에 엎드린 채, 깨진 도자기 파편에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와중에도 머리를 땅에 짓이기며 벌벌 떨었다.


"아이고! 대협,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발밑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태경의 목소리는 공포로 가득 찬 삼류 민초의 전형이었다. 목숨을 구걸하며 사시나무 떨듯 떠는 그의 몸짓에는 단 1리의 내력 기운도 섞여 있지 않았다. 배칠성은 그런 태경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지만, 그의 의심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갈풍이 내린 지령은 확실한 신체적 반응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눈이 멀었으면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나와서 손님에게 해를 끼치는 게냐! 오늘 내 네 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마!"


배칠성은 화로 옆에서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던 무쇠 주전자를 거칠게 낚아챘다. 주전자 주둥이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살을 삶아버릴 정도의 고열이었다.


"대, 대협!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태경이 울부짖는 순간, 배칠성이 주전자를 들어 올려 태경의 얼굴과 안대를 향해 펄펄 끓는 물을 사정없이 뿌려버렸다.


치이이익!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태경의 뇌 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날아오는 뜨거운 수포의 궤적, 물방울의 온도, 그리고 그것이 얼굴에 닿았을 때 발생할 피부 조직의 괴사 수준이 실시간으로 연산되었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손을 뻗어 내력 장풍으로 물줄기를 쳐내거나, 신형을 뒤로 물렸을 터였다. 인체의 자율 신경계는 위협을 감지하는 순간 회피 반사를 일으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피하면 죽는다. 내력이 흔들리는 순간 장서각의 복수는 여기서 끝이다.'


태경은 마음속으로 도가 정심 호흡법(Taoist Mind-Cleansing Breathing)을 운기했다. 단전이 아닌 뇌 신경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차가운 도가의 호흡. 그의 심장 박동이 강제로 분당 오십 번 이하로 뚝 떨어졌다. 전신의 근육 세포에 '움직이지 말라'는 정신적 봉인이 걸렸다. 회피하려는 모든 본능이 이성의 힘 아래 차갑게 짓눌렸다.


그리고.


촤아아악!


끓는 찻물이 태경의 검은 안대와 이마, 뺨 위로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아아아아악!"


태경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살이 타들어 가고 피부가 익어가는 진짜 날것의 고통이었다. 안대 뒤의 눈꺼풀이 고열에 짓눌려 타들어 가는 극통 속에서도, 태경은 눈동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고개를 단 1리도 돌리지 않았다. 오직 끓는 물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살려주십시오! 불이 붙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태경은 얼굴을 움켜쥔 채 바닥의 흙먼지를 쓰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안대 틈새로 붉은 진물이 흘러내렸고, 그의 뺨과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게 부풀어 오르며 끔찍한 화상 흉터가 잡히기 시작했다.


배칠성은 주전자를 내려놓고, 바닥에서 벌벌 떨며 울부짖는 태경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정말 무공을 모르는 일반 맹인인가? 이 정도 고열의 기습에도 몸을 전혀 띄우지 못하고 정면으로 맞다니.'


그러나 배칠성은 의심이 많은 자였다. 그는 엎드려 신음하는 태경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가락 끝을 세워, 태경의 안대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눈동자를 직접 찔러보려 했다. 안구 뒤편의 시신경이 살아있다면 손가락이 접근하는 순간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거나 동공이 수축할 터였다.


손가락 끝이 태경의 안대 아래 피부에 닿으려던 찰나.


와장창!


주방 안쪽에서 수십 장의 낡은 도자기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굉음이 일어났다. 개똥이가 기지를 발휘해 쌓아둔 접시 더미를 통째로 밀어버린 것이었다.


"앗! 죄송합니다! 제, 제가 실수로...!"


개똥이의 다급한 울음소리가 찻집 내부의 무거운 침묵을 깼다. 배칠성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방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집중력이 찰나의 순간 분산되었다.


태경은 그 0.1초의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크게 돌려 바닥을 긁었다. 배칠성의 손가락 끝은 태경의 안구를 찌르지 못하고 뺨의 화상 상처만을 쓸고 지나갔다.


"아아악! 대협, 제발 자비를...! 제발...!"


태경이 뺨의 상처를 움켜쥐고 흐느끼자, 배칠성은 손가락에 묻은 태경의 진물과 핏자국을 보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화상을 입은 살가죽의 감각이었다. 기합으로 열기를 막아낸 흔적은 전혀 없었다.


"쳇, 진짜 쓸모없는 눈먼 병신이군. 이런 놈이 무슨 배후라고."


배칠성은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품속에서 엽전 몇 푼을 바닥으로 툭 던졌다.


"찻값과 약값이다. 갈풍 책사님이 과민반응을 하신 게 분명해."


배칠성은 거만한 걸음걸이로 낙엽헌의 문을 열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낙엽헌에는 오직 태경의 거친 숨소리와 흐느낌만이 맴돌았다.


스르륵.


문이 완전히 닫히자, 태경의 흐느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그는 바닥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안대 밑으로 붉은 피와 진물이 흘러내려 그의 삼베옷 깃을 적시고 있었지만, 태경의 입술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심장 박동은 이미 평소의 고요함을 되찾아 있었다.


"태경 형님!"


주방 문을 열고 설예진(Seol Ye-jin)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찬물에 적신 천과 장 노인이 준 화상 약재가 들려 있었다. 예진은 태경의 상처 입은 얼굴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 뜨거운 물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으신 겁니까? 몸을 조금만 움직이셨어도..."


예진은 떨리는 손으로 태경의 안대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붉게 익어버린 그의 눈가와 뺨에 찬 천을 대어주었다. 타들어 가는 화끈거림이 태경의 신경을 자극했지만, 그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태경은 예진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불타는 고통 속에서도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정교했다.


"적들이 찻집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먼저 그들의 눈을 가릴 차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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